백성호의 하루명상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42> 한 손만으로 소리를 내시오

colorprom 2008. 7. 3. 12:31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42>

한 손만으로 소리를 내시오

                

      



#풍경1 : 일본의 대선지식인 백은(白隱·1685~1768)선사는 눈 밝은 스승을 못 만났죠.
그래서 홀로 공부를 해서 깨쳤습니다.
그는 종횡무진 법문을 하고 다녔죠. 그러다 어떤 거사를 만났습니다.
거사가 말했죠. “스님이 정말 깨쳤거든, 손 하나만 가지고 소리를 내보시오.”
백은 선사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나와 남의 경계 허물면 모든 소리가 나의 소리

그래서 피나는 노력을 거듭했죠.

어느 날 처마밑 아궁이에서 불을 때고 있었죠. 마침 비가 왔습니다.

그런데 스님의 처마 밑 반신은 마르고, 처마 밖의 반신은 젖어 있었죠.

백은선사는 그걸 보고 마침내 크게 깨쳤습니다.

#풍경2 : 백은선사는 사람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죠.

어느 날 근처 마을의 생선가게집 처녀가 임신을 했습니다.

부모는 화가 났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윽박질렀죠.

한참을 망설이던 처녀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죠. “백은선사입니다.”

처녀의 부모는 깜짝 놀랐죠. 당장 백은선사에게 달려가 따졌죠.

그 말을 들은 선사가 말했습니다. “그런가.”

결국 태어난 아기는 백은선사에게 맡겨졌죠. 마을 사람들은 모두 백은선사를 욕했죠.

그는 말이 없었습니다. 다만 젖동냥과 탁발로 아기를 잘 키울 뿐이었죠.

그렇게 1년이 지났죠.

참다 못한 처녀가 부모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아기의 아버지는 생선가게에서 일하는 청년”이라고 말이죠.

처녀와 부모는 백은선사에게 달려갔죠. 그리고 자초지종을 말했습니다.

“아기를 돌려달라”며 손이 발이 되도록‘싹싹’ 빌었죠.

백은선사가 아기를 돌려주며 한마디 했습니다. “그런가.”

사람들은 묻습니다.

“깨달은 후에는 어떤 삶을 살게 되나요?”

“깨달음 역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욕망이 아닌가요?”

“깨닫는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이에 대한 답을 ‘풍경1+2’가 던지고 있습니다.

‘깨닫기 전의 백은선사’와 ‘깨달은 후의 백은선사’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죠.

“한 손으로 소리를 내라”는 물음에 백은선사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왜일까요.

‘소리’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죠. 왼손이나 오른손, 한쪽만으로 어떠한 소리도 낼 수가 없었던 거죠.

마치 허공을 향해 맨주먹을 휘두르듯이 말이죠.

그래서 백은선사는 입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수행에 들어갔죠.

‘소리를 내는 이는 누구인가’ ‘소리를 듣는 이는 누구인가.’

백은선사는 ‘손’과 ‘소리’에 대해 수도 없이 물었겠죠.

그러다 아궁이 앞에서 깨친 거죠. 비에 젖은 몸과 비에 젖지 않은 몸을 보면서 말이죠.

그는 뭘 봤을까요. 그렇습니다. 둘이 아님’을 본 거죠.

축축한 몸과 바싹 마른 몸이 한 몸임을 보면서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임을 깨쳤겠죠. 세상의 모든 형상과 그 아래 깔린 공(空)이 둘이 아님을 깨쳤겠죠.


그런 순간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습니다.
그건 ‘나’라는 자아를 온전히 허문 이에게만 다가오죠.
그렇게 ‘나’라는 테두리를 벗은 이는 알게 되죠. ‘테두리조차 없는 온 우주가 나의 테두리구나.’
그때는 ‘소리’가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나의 손바닥, 나의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만 ‘나의 소리’였죠.
그런데 이젠 세상의 모든 소리가 ‘나의 소리’가 됩니다.
바람소리, 빗소리, 새소리, 동네꼬마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내가 내는 ‘나의 소리’가 되는 거죠.
그때는 오른손만 들어도 ‘온갖 소리’가 나겠죠.

백은선사는 그렇게 세상과 한 몸이 된 겁니다. ‘나’와 ‘남’의 경계가 사라졌으니까요.
그러니 생선가게 처녀의 부모가 아기를 데려왔을 때 고개를 끄덕인 거죠.
또 아기를 다시 데려갈 때도 고개를 끄덕인 겁니다.
그 엄청난 끄덕임의 힘, 그게 바로 깨달음의 힘입니다.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예수님은 이런 기도를 하셨죠.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이것이 진정한 ‘끄덕임의 힘’이겠죠.

백성호 기자


[출처: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42> 한 손만으로 소리를 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