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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당신이야 말로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colorprom 2017. 4. 13. 14:36

당신이야 말로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2014년 7월 29일 화요일


누가복음 15:11~15:32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 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절):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죽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가부장적 질서가 강했던 유대에서는 용인할 수 없는 태도이다.

그 요구를 들어주는 아버지를 유대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장자의 두 몫을 고려할 때 둘째 아들은 재산의 삼분의 일을 받았다.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는 치게 하였는데(15절):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부정한 짐승이다.

둘째 아들은 돼지를 치며, 심지어 돼지가 먹는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유대인의 수치다.


쥐엄(16): 캐럽 나무의 열매. 4-5월경 열매 맺는 콩과의 상록수로 빈민의 주식이나 사료로 사용되었다.


주는 자가 없었다(16절): 그가 멸시의 대상이었고 하찮은 존재로 취급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정해지지 않으려고 돼지를 만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둘째 아들은 돼지가 먹는 음식까지 먹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18절): 하늘은 ‘하나님’의 정중한 표현이다.

자신의 요구와 행동을 하나님 및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28절): 큰아들은 항상 아버지의 곁에 있었지만 아버지를 몰랐다.

그동안 아들이 아닌 종으로 살았다. 이는 바리새인을 의미한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29절):

아버지의 호칭을 불러 인사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위엄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었다.


당신이야 말로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2014년 7월 29일 화요일


둘째 아들은 무례를 저지르고 아버지를 떠나 고생을 했지만,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큰아들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아들이 아닌 으로 살았습니다.

양자의 근본적이 차이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아는가에 있습니다.

아버지를 몰랐던 큰아들은 종으로 살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기쁨에 노여움으로 반응했습니다.

최근 교계 지도자들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부적절하게 발언하여 교회가 사회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저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 발언의 근거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신앙을 누리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관상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아버지의 성품을 알고 있었기에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감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반면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아버지의 성품을 오해하거나 몰랐습니다.

그 많은 시간을 함께 있었지만, 그 시간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신앙의 여정에서도 이런 일이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일에 하루 종일 여러 가지 종교적인 일로 분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 참된 신앙의 증거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핵심은 사귐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자리에는 있지만 하나님 및 지체들과의 인격적인 사귐이 없다면, 그야말로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그렇기에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지체들과도 그리해야 합니다.

우리를 부리는 종이 아닌, 교제하는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용서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2014년 7월 29일 화요일


예수님은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회개하는 모든 자들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또한 첫째 아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회개한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즉 끝까지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해 돌아온 죄인을 기쁘게 맞고

함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비유는 결론이 개방된 채 마무리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우리가 첫째 아들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보라는 의미에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내 경우라면 어떻게 할까요?

즉 만약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우리 공동체에 들어온다면 어떻게 할까요?

쉽지 않겠죠!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진정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이미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구원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고,

가능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겉으로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1 누가 진정으로 잃어버린 아들입니까?(28절)

5 두 아들은 아버지를 각각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1 왜 첫째 아들은 분노하며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일까요?

5 나는 미워하는 친구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며 기도하고 있나요?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 인격적인 교제가 있게 해주십시오.
외적인 행동으로 신앙을 꾸미지 않게 해주십시오.


내가 미워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용서하시고, 기꺼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힘들더라도 그가 하나님의 구원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라며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