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은 그들이 아닌 우리 모두입니다 2014년 7월 28일 월요일
누가복음 15:1~15:10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죄인들(1절): 율법의 기준에 미달하는 자, 혹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로,
당시에는 율법을 의도적으로 어기어 죄인으로 규정되는 사람보다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율법 규정을 몰라서 죄인으로 규정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1절):
레위기 규정에 의거하여 유대인들은 부정한 것과 정한 것, 거룩한 것을 구별했다.
부정한 것은 극도로 피해야 할 대상이었고 세리와 죄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유대인들 생각에 ‘하나님나라’에서 자기 자신은 구원의 대상이었고
세리와 죄인들은 처절한 심판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나라’는 세리와 죄인까지 구원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로 말미암은 갈등이 자주 등장한다.
이 비유로 이르시되(3절): 15장에 등장하는 세 비유는 점층법의 구조로 점점 문제가 심화된다.
잃어버리는 것의 비중이 백 개 중 하나에서 열 개 중 하나로, 그리고 절반으로 커진다.
이 비유들의 직접적인 대상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다.
하늘에서는 …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절):
죄인의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은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의 태도(2절)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7절): 풍자적 표현으로서,
바리새인이나 율법교사와 같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회개의 필요를 느끼는 못하는 자들을 말한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8절): 열 드라크마는 이 여인이 결혼할 때 가져온 지참금이었다.
결혼이 깨져도 그 돈은 법률상 여인의 것이다.
드라크마(8): 로마의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헬라의 은화로서, 1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된다.
‘죄인’은 그들이 아닌 우리 모두입니다 2014년 7월 28일 월요일
유대인들에게 세리와 죄인들은 사귈 수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밥상교제를 나누시며 그들을 하나님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 나라가 자기들만의 것이라고 착각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행동은 심히 거슬렸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그 나라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나라에서 가장 멀리 있었습니다.
우리가 곧 선이고 저들은 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라는 것은,
우리는 구원을 얻고 저들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오랫동안 세상 나라가 사용한 방법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제거함으로써 우리의 생존이 정당하게 되기를 추구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세상은 자신들이 설정한 ‘저들’을 가두고 죽였습니다.
이 방법이 맞았다면, 지금 세상은 과거보다 더욱 도덕적이고 살 만한 세상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과 악의 경계선은 우리와 저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저들 모두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들’을 없앤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나라는 우리와 저들 모두에게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나라에 가까운지 세상 나라에 가까운지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저 몇몇 사람들을 은닉하고 제거하는 방식으로 해결한다면 세상 나라가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적으로 교회가 더불어 회개하고 문제를 다룬다면, 그곳에서 하나님나라가 드러납니다.
하늘의 가장 큰 기쁨은 모두가 죄인임을 자각하고 회개하는 순간에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2014년 7월 28일 월요일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본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비난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인들과 식사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비유의 의미는
잃어버린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나라에서 잔치가 열릴 만큼 기쁘고 귀한 일이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 이를 위해 모든 관심과 열정을 쏟고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때문에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토록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아오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기쁨을 충만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지신 관심과 열정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이러한 관심과 열정을 가짐으로써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전도의 방식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을 그리고 죄인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예외없는 사랑 2017년 5월 6일 토요일
예수님의 육성을 통해 직접 오늘 본문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에 대해 잠시 생각해봅니다.
1절에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그 사회에서 소외당한 이들이었습니다.
병들고 가난하며 천한 일을 한다는 이유로 공동체 안에서 철저하게 밀려나고 따돌림당하며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입니다.
공생애 기간 내내 예수님 주변에는 유독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죄인이란 모세의 율법에서 하지 말라고 규정한 것을 범한 사람들로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때로는 생계문제 때문에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 했고,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먹을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율법을 범함으로써 가뜩이나 스스로 위축되어있는 그들에게
율법은 가차없이 죄인의 굴레를 씌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정죄당하고 온갖 냉대와 쓴 소리에 짓눌려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단 한 번도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따뜻한 격려와 위로의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마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도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끝까지 찾아나서는 선한 목자,
잃은 양을 찾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큰 잔치를 베푸시는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회개를 기뻐하시는 주님 (2018년 7월 25일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의 비유'를 들어 '회개한 죄인을 얻은 기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예수님 안(in Jesus Christ)에 있지 않다면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죄인을 예수님은 영접해주십니다.
기꺼이 맞아주시고 안아주십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은 그분께 온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눅15:2)
여기서 예수님께 갔던 무리들 중에서
재물과 사회적 지위를 가졌던 바리새인들이 '죄인들'을 차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도 외형적인 모습으로 '죄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려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자신들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는 죄인인 '잃은 양'을 찾으시고 기뻐하십니다.(눅15:7)
그것이 주님의 일관된 원칙이었습니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이며, '마음을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을 돌이킨다는 것은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 목적을 두는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는 행동이 '회개'입니다.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온 죄인은 주님의 식구, 가족이 됩니다.(눅15:2)
회개한 죄인은 주님께 받아들여져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눅15:1)
+ 주님, 날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게 하소서. 아멘.
나는 잃은 양 한 마리 (2019년 3월 30일 토요일)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행동으로 자신의 사랑하심을 나타내십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잃은 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다 잃은 양이 된 것입니까?(눅15:4)
잃은 양은 ‘죄를 지은 사람’ 즉 죄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잃은 양, 죄인을 찾기 위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나사렛의 예수님입니다.
나사렛의 예수님은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치셨습니다.(마27:46)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버리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잃은 양을 찾은 사람은 벗과 이웃을 불러모아 말합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눅15:6)
하나님께서 잃은 양을 찾아오십니다. 잃은 양을 찾아내셔서 매우 크게 기뻐하십니다.
나는 어떤 양입니까?
목자에게 기쁨을 드리는 잃은 양 한 마리입니까?
아니면, 아흔아홉 마리에 속해 안전하게 잘 지내는 양입니까?
이제 질문을 조금 바꿔봅시다.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겠습니까?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회개하는 죄인 한사람'이어야 하겠습니까?
+ 거룩하신 주님,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아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서 (2019년 11월 9일 토요일)
유대 율법에 “악한 사람과는 접촉하지도 말고 율법을 제시하지도 말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죄인으로 규정하는 대상은,
실제 악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가까이 하기 꺼림칙하고, 같이 밥먹기 싫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장애인,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 세리, 한센(문둥)병자 등
오히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죄인’취급을 받고 소외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하필 ‘양’을 비유로 드셨을까요?
구약시대에서 양은 이스라엘사람들, 바로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시편, 이사야, 미가).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와 성도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양이라는 단어에는
‘이스라엘백성들은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모두 양’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흔아홉 마리를 버려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다 아흔아홉 마리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한 마리보다 아흔아홉 마리가 경제적 가치가 더 높긴 합니다.
하지만 이 비유에 경제적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99 마리 양을 ‘회개할 것 없는 의인(7절)’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여기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란, 이미 하늘나라에 속한 존재로서의 의인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라는 말을 우리는, 실존주의적인 표현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주님 앞에 철저히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고, 철저히 주님의 뜻을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 사람이 어쩌면 나 자신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99 마리 안에 속해있습니까? 아니면 잃어버린 양 한 마리입니까?
실존적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며 심각하게 고민해보기 바랍니다.
만일 잃어버린 양 한 마리라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대답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 하나님! 오늘,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기억하는 양, 순종하는 양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2020년 5월 2일 토요일) (1~7)
오늘 묵상한 본문의 말씀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애타게 찾아나서는 목자의 마음은
남아있는 양 아흔아홉 마리를 하찮게 여기거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더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아닙니다.
잃어버린 양이나 남아있는 양이나 목자에게는 모두 소중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첫째, 결코 포기하지 않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목자는 자신이 관리하는 양 무리 중에서 어느 양이든지 길을 잃은 양이 생기면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자 되시는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셔서, 결코 포기하시지않는 분이십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미련 없이 포기합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목자와 같이
서로에 대하여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둘째,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백 마리의 양 중에서 한 마리가 길을 잃어버린 것을 목자는 바로 알아챕니다.
양들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참 목자는 자신의 편안함과 필요에 민감하기보다 양들의 안전과 필요에 민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관심도 없이 자기연민에 빠져 살아가는 이때,
양들을 세밀하게 살피는 목자의 마음으로 측은지심을 가지고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세밀하게 살피시고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주시듯
우리도 그 사랑으로 주변의 이웃들을 돌보고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참 목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세밀하게 살피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시듯,
우리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소서. 아멘.
1 예수님의 행동에 유대인들이 수군거리는 까닭이 무엇입니까?(2절)
5 하나님나라의 기쁨은 무엇입니까?(7, 10절)
1 예수님이 “죄인 한 사람이 돌아온 것을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5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전도의 삶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동체의 문제를 그저 몇몇 사람들에게 전가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늘의 기쁨을 신앙 공동체 안에서 누리게 해주십시오.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
단 한 사람의 영혼까지도 기억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 사랑에 응답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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