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너무 늦게 만들어졌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맥아더는 비상한 智力·엄격함·독선으로
수많은 찬사와 비난 동시에 받아… 아시아에 집중한 최초의 軍 전략가
전략적 영감으로 인천 상륙 감행해 꺼져가던 작고 가난한 나라 살려
지력은 독선에 묻혔고 전술적 탁월함은 상명하복 무시로 빛을 잃었다.
엄격함은 주변 사람들을 숨 막히게 했다. 당연히 애칭도 없었다. 그의 아내조차도 그를 장군이라고 불렀다.
종종 앞뒤가 안 맞아서 매일 성경을 읽고 자신을 교황과 함께 이 세상 그리스도 왕국의 수호자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교회에는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찬사와 그 이상의 비난을 한몸에 받은 더글러스 맥아더 이야기다.
미국 역사에 그를 가두면 캐릭터가 제대로 설명이 안 된다.
오만함의 영역에서 그의 국내 경쟁 상대는 조지 워싱턴과 링컨 정도다.
장군들의 전쟁사로 넓혀 보면 나폴레옹이 그와 어깨 높이가 비슷하다.
둘 다 참모가 필요 없는 비상한 두뇌로(나폴레옹은 듣는 척은 했다)
멀리 떨어져서 관찰하는 건 몰라도 밑에서 일하기는 죽기보다 싫은 사람들이다.
집안도 좋았다. 할아버지는 주지사였고 아버지는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필리핀 총독이었다.
그는 나중에 일본 총독이 된다.
일본 패망 한 달 후 일본 국왕이 그를 찾아왔다.
군 작업복 차림의 맥아더는 예복을 갖춰 입은 일왕과 다정하게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맥아더는 일왕보다 키가 45㎝나 컸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신이 꼬맹이처럼 찍힌 그 사진을 보고 무너져내렸다.
맥아더는 그렇게 가학적으로 일본을 지배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일본에 심으려 했던 것은 낯설고 생소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였다(실은 강요에 가까웠지만). '자유와 민주를 기반으로 아시아인의 운명은 아시아인들에게.' 그의 모토였다.
일본 최후의 쇼군(將軍)으로 불렸던 맥아더에 대한 일본인들의 숭배는 거의 광적이었다.
'맥아더 장군님께'로 시작하는 편지와 선물이 한 해에만 44만통이나 쏟아져 들어왔다.
일본 성인의 거의 1%가 자발적으로 그런 일을 했다.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에 벌어진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맥아더도 그런 일본이 싫을 리 없었다. 6·25가 터지기 전까지 5년 동안 그가 도쿄를 떠난 것은 딱 두 번뿐이다. 마닐라와 서울에서 열린 독립기념식에 참석할 때였는데 그나마 당일로 돌아왔다.
대통령 후보가 아쉬웠던 공화당에서는 몇 차례 그를 본국으로 초청했다. 맥아더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단 몇 주일이라도 귀국한다면 미국이 동양을 포기했다는 소문이 태평양 전체에 퍼질 것이다."
이 정도 수준의 자아도취 발언은 유사 이래 맥아더뿐이다. 뭐, 누구나 할 수는 있다. 남들이 웃어서 그렇지.
맥아더에 대한 영화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77년이다. 맥아더 역(役)은 그레고리 펙이 맡았는데
평점도, 흥행도 별로였다. 무엇보다 그레고리 펙은 '휴일'에나 어울리지 '전쟁'에는 맞지 않았다.
아무리 배우가 천의 얼굴이라고 하지만 착착 붙는 역할이라는 게 있다.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역할을 맡은 리엄 니슨은 데뷔작부터가 '엑스칼리버'의 기사 역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보면서 맥아더의 연극적인 대사가 거슬린다는 분들이 있다. 실제 맥아더가 그랬다.
그는 언제나 배우처럼 행동했고 늘 카메라 렌즈를 의식했다. 항상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었다. 설정이었다.
그는 집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선글라스 아닌 안경을 쓴 맥아더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러나 집에서는 거의 안경을 쓰고 지냈다.
말투도 그렇다. 중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였지만 슬픔과 흥분을 말할 때면 높고 가늘게 올라갔다.
연극 대사처럼 드라마를 만들어 가며 말하는 것은 그가 반대자들을 설득할 때 쓰는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영화에도 나온다. 듣다 보면 말려 들어간다).
그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자리가 끝나고야 얘기를 나눈 게 아니라 얘기를 들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맥아더가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가 아니라 브로드웨이나 할리우드에 진출했어도 성공했으리라 믿는다. 이 달변이 안 먹힌 유일한 인물이 이승만이다.
이승만이 주로 이야기했고 맥아더는 예스와 노 할 틈만 겨우 얻었다.
맥아더는 로마를 모델로 만들어진 미국이라는 제국의 집정관이자 총독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집정관과 총독 자리를 자기가 알아서 그냥 했다.
미국 역사상 한 개인에게 이렇게 무한대의 권력이 허용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아시아에 집중했던 최초의 군 전략가였다. 유럽만 중시하던 워싱턴과의 불화는 피할 수 없었다.
현재 미국에 가장 중요한 곳은 아시아다. 안목일까 영감이었을까.
인천 상륙은 영감이었다. 이성적으로는 그런 판단 못 내린다.
그리고 그 영감이 꺼져가던 작고 가난한 나라를 살렸다.
(이 표현은 식상하다. 우리는 더 이상 작지도 가난하지도 않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너무 늦게 만들어졌다.
고마움을 모르는 민족에 좋은 날이 이어졌다는 이야기를 나는 들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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