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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직도 무궁무진한 6·25 祕史 -

colorprom 2016. 8. 16. 13:47

[서지문의 뉴스로 책읽기] [9] 아직도 무궁무진한 6·25 祕史

  •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입력 : 2016.08.16 16:03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1950년, 기습 남침을 감행한 인민군이 해일처럼 쳐내려와서
나라의 명맥이 낙동강 하구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때,
성공 확률 5000분의 1이라는 최악 조건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단숨에 전세를 뒤집고 서울을 수복한 것이
오로지 맥아더 장군의 직관과 치밀함과 결단과 지략 덕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고야 그 아슬아슬한 작전의 성공이
맥아더 장군의 병법(兵法)에만 힘입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 성공 뒤에는 인천항 일대의 인민군 기뢰 매설 지도를 비롯한 유엔군의 인천 상륙 가능성에 대비한
인민군의 방어 시설, 병력과 장비, 보급선 등의 정보를 목숨 걸고 캐낸 해군 첩보대의 활약이 있었고,
경북 영덕군 장사에 상륙해서 인민군과 교전을 벌여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진행될 수 있게 한
학도병 부대 772명의 영웅적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있었으니 참 부끄러운 무지(無知)다.
이미지 크게보기
영화 '인천상륙작전' 포스터. /CJ 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런데 이토록 중대한 사실을 기록한 전사(戰史)가 드물어 참으로 안타깝다.
윌리엄 맨체스터가 저술한 맥아더 장군 전기 '미국의 시저'에는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의 전략적 필수성과 성공 가능성에 대해 트루먼 대통령과 미 국방부를 설득하는 데 무진 애를 먹었던 이야기만 있다.
백선엽 장군은 그해 8~9월
낙동강 전선에서 국토의 마지막 한 조각을 지키기 위해 사선(死線)을 무수히 넘나드느라 그랬는지
그의 회고록에는 인천상륙작전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지 않다.

6·25 전쟁 연구의 권위자 박명림 연세대 교수'한국 1950, 전쟁과 평화'에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인민군이 사실상 인천을 유엔군 상륙작전 후보지 셋 중의 1위로 예측하고
작전 저지를 위한 만반의 준비에 분투했고,
그 때문에 인천에서 서울까지 불과 40㎞ 거리를 유엔군이 돌파하는 데 13일이나 걸렸음을,
최신 밝혀진 여러 자료를 인용하며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임병래 중위 휘하 해군첩보부대 'X―ray 작전'이나
장사에 상륙해서 인민군과 교전함으로써 유엔군에게 인천에 상륙할 틈을 준 소년 학도병들의 활동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켜 준 호국 영령들에게 그들의 은덕으로 나라와 삶을 받은 후손들이 할 수 있는 보답은 그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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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yung-YulCho(countrym****)2016.08.1804:42:23신고
    정부 수립후 6.25 전에 형성 되었던 우리 군은 일본군 장교 출신들과 기회를 찾으려 모인 오합지졸들로 만들어지고 좌익들의 반란이 일어나는 형편없는 군대였읍니다.
    군인들의 처우는 비참 했는데에도 군대의 명맥이 이여졌던 것을보면
    아무리 그래도 공산주의자들 보다 나았다는것을 반증했읍니다.
    김미영(samfa****)2016.08.1714:49:18신고
    우리 나라를 지키기위해 목숨을 바치신 국군장병들과 학도병들과 유엔군 참전 용사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고세호(ela*)2016.08.1703:55:52신고
    9월 15일 인천 상륙하면 바로 서울로 택시타고 가는게 아닙니다.
    15일은 제1파 상륙일이고 조수 간만 차이 때문에 상륙은 단속적으로 이루어 집니다.
    교두보 확보후 물자와 병력의 양륙에만 최소 3-4일이 소요 됩니다.
    그후 영등포까지는 치열한 시가전이랄게 없으나 한강을 도하하여야 하기에 여기서도 시간이 소요되구요... 한강 도하후에 시내 진입에는 시가전이 펼쳐지기에...
    고세호(ela*)2016.08.1914:11:49신고
    바로 이런 상태에서 그 해 겨울에 강원도 지역에 국군 게릴라 부대를 밀어넣는데
    그것이 바로 백골 병단입니다. 제가 설악 용대기 전몰 기념탑 관람을 권하는 이유가 이때문입니다.
     서울은 수복했어도 인민군의 인력 도주, 보충 루트인 백두대간은 저들 손에 있었습니다.
    고세호(ela*)2016.08.1914:09:54신고
    당시 북괴군은 후방의 예비대조차 거의 없이 모든 자원을 낙동강 방어선에 밀어넣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올인하고 있는데 후방공간을 상륙하여 경부축을 중심으로 한 인력과 물자의 보급을 차단시킨게 인천 상륙작전 입니다.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은 허겁지겁 백두대간을 타고 후퇴하였고...
    아쉬운 것은 이들을 차단하는 대신 바로 평양으로 달려간 것이죠. 전략상 문제가 있는 기동
    고세호(ela*)2016.08.1914:06:07신고
    몰랐던걸 자랑처럼 이야기 한다고 한 이유가 이겁니다. 몰랐다면 반성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면 되는데, 어줍지 않은 지식을 동원해서 현실과 동떨어진 또다른 황당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인천항만은 천연적 지연 지물을 활용하여 북괴군이 나름 강력하게 방비하였으나,
    상륙후에 대한 대비는 그렇질 못하였고 서울중앙청까지 14일 걸린 것은 매우 양호한 빠른 진격입니다
    고세호(ela*2016.08.1914:01:08신고
    적의 저항이 강했다면 물자양륙과 도하에만 각각 4일정도가 소요될 것이고 그리고 나서 일부 시가전 구간을 감안한다면 14일이내에 서울 탈환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물자양륙과 도하에만 각각 4일정도가 소요될 것이고 그리고 나서 일부 시가전 구간을 감안한다면, 적의 저항이 강했다면 14일이내에
    서울 탈환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Hyung-YulCho(countrym****2016.08.1804:10:19신고
    대중들의 말은 막기 힘듭니다 중구난방( 衆口難防).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 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서 점령한 전쟁을 폄하하듯 그짧은 거리를 그렇게 오래 걸렸나는 식으로 비아냥을 부립니다.
    언론의 자유가 있다지만 책임도 못질 말들을 함부로 하는 부류들은 처벌해야 합니다.
    북돼지 앞이라면 숨도 못 쉴 자들의 비겁한 행동들.
    고세호(ela*2016.08.1704:08:41신고

    따라서 14일이면 건제가 유지된 적을 상대로 한 진격이라면 매우 양호한 진격 속도라고 보입니다.
    적의 저항이 강했다면 물자양륙과 도하에만 각각 4일정도가 소요될 것이고 그리고 나서 일부 시가전 구간을 감안한다면 14일이내에 서울 탈환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것과 건제를 유지한 적을 상대로 한 돌파는 속도개념 자체가 다릅니다.
    고세호(ela*)2016.08.1704:03:55신고

    인천상륙작전의 가장 큰 위험은 협소한 수로와 조수간만의 차이였습니다.
     당연히 인민군은 이를 이용하여 항만 방어를 하였고 한국의 특공대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첨병 역할을 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인민군이 그 수준이상의 방어책을 가지지는 못하였지요.
     만약 가졌다면 노르망디 오마하비치를 능가하는 희생이 나올수도 있었습니다.

    고세호(ela*)2016.08.1704:01:43신고

    즉 윗글은 실제 전사나 군사작전상의 상식과는 배치되는 글입니다. 인민군이 상륙저지를 위한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면 상륙 교두보를 분쇄하기 위한 행동이 있어야 했으나 결정적으로 그들은 방어전으로 일관했지요. 즉 상륙전에 본격 대응할 자원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시절이나 지금이나 시가전은 지형지물에 따라서는 하루 몇백미터 진출하는것도 쉽지 않습니다.


    고세호(ela*)2016.08.1702:44:30신고
    이번 여름에도 강원도로 휴가들 가셨겠지요. 군번도 없이 유격대를 만들어 일부 정규군을 섞어서 북한의 후방으로 전쟁 초기에 특공 침투했던 백골 병단이 있습니다.
     전적비가 진부령과 미시령이 갈라지는 곳에 있습니다. 바로 용대리 황태 마을이지요.
     한번들 들리셔서 백골병단 전사들의 기막힌 전쟁사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고세호(ela*)2016.08.1703:50:27신고
    참고로 이렇게 전해 내려오는 전사도 전공 도둑질로 인해서 훼손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장본인들은 외면한 *성 지구 전적비등은 한마디로 소설이고...
    타지역 장교라는 이유로 전공을 훼손... 김일성 승용차 노획의 경우 정작 장본인은 외면 받고
    이를 조작한 가짜 영웅이 방송 출연을 하기도 하지요. 그것도 조선티비에 말입니다.

    고세호(ela*2016.08.1703:49:23신고
    군번도 없이 인민군 후방으로 투입되었기에 이들은 그 후에 병역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재징집되기도 했습니다. 작전중 길원팔과 함께 포획한 인민군 여군을 풀어준건지 탈출한건지 그로인해 역습을 받기도 했었다고 하고... 길원팔등을 체포하여 채명신중령에게 인계한 분이 쓴 회고록 전집을 밤을 새워 읽던 기억이 나네요. 이런 기록들이 외면 받고 사라져가고 있는게 현실이지요

    고세호(ela*)2016.08.1702:41:29신고
    모르는게 무슨 자랑처럼 들리네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내용인데, 기득권의 꼭데기에 있는 사람이 이런 이야길 입으로는 창피하다면서 지식 자랑하듯이 써놓은 글은 참.....
    고세호(ela*)2016.08.1914:19:40신고
    제한된 시간에 막대한 물자를 양륙하고 몇만명의 인력을 상륙시키는 기술적인 어려움 또한 큰 문제였습니다. 육상의 상륙전 대비병력은 고려사항에서도 맨 끝정도였지요. 서울 점령 역시 한강도하 상륙및 장비 물자 양륙과정을 거쳐야 했고... 본격적인 전투는 시가전 이었죠. 상륙전 전투병력 실 숫자는 육상군(당시 북괴군)해서 압도적이기 어렵습니다. 저격수 하나에도 진격이..
    고세호(ela*2016.08.1914:16:04신고
    사실 저글 쓴 것 보면 종북 냄새가 나는 자들의 글에 세뇌된 세계가 보입니다. 슬쩍 몰랐다면서 끼어들어서는 방비를 열심히 했으나 세계 최강인 미국에 어쩔수 없이 밀렸다면서 김일성을 신격화 하는 논리에 매몰된 자들의 논리를 인용하는 그런 느낌마져 듭니다.
    인천 상륙작전은 자연 장애물과 인공장애물, 그리고 해안포를 극복하는게 관건이었고
    Hyung-YulCho(countrym****)2016.08.1804:00:33신고
    이글은 쓰신 주제가 오락가락하여 독자들이 오해 하신것 같읍니다
    다시 마음정리 하시고 쓰시면 좋은 내용이 될것입니다.


    곽성철(skus****)2016.08.1623:25:23신고
    미국등 다른나라들은 적과싸우다 죽은 자국군인들을 한명이라도 잊지않고 기록하고 시신을찾아 가족에게돌려주고 후세에 알리는데 우리나라는 변변한 기록도없고 그들에대한 예우도없다.
    지금도 군대에서 부상당하면 제대로된 치료는물론 보상금도 인색하게준다.
    이런 조건속에 누가 목숨걸고 조국을 위해 싸우겠나? 제발 군비리라도 없었으면 좋겠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