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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 그리스도, 죽음을 넉넉히 뛰어넘은 생명 (마태 1:1~17)(CBS)

colorprom 2015. 3. 2. 12:18

예수 그리스도, 죽음을 넉넉히 뛰어넘은 생명 2015년 3월 2일 월요일

마태복음 1:1~1:17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14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14 대러라

 

 

성경 길라잡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1절):

우리말 성경에서의 순서는 ‘아브라함-다윗-예수’이지만,

헬라어 성경에서의 등장순서는 ‘예수-다윗-아브라함’ 이다.

이는 17절의 ‘아브라함-다윗-예수’의 수미쌍관법을 이룬다.

아브라함과 다윗 언약의 성취로서 예수님을 소개한다.


계보라(1절):

일반적인 족보는 자신이 속한 가문의 장점만을 부각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1장 1절부터 17절까지의 족보는 치부를 그대로 드러냈다.

 

첫째, 등장인물의 죄와 허물을 숨김없이 밝힌다.

이방 여인들인 ‘다말(3절)’, ‘라합(5절)’과 ‘룻(5절)’, ‘우리야의 아내(6절)’는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치부를 드러낸다.

 

둘째, 한 왕조의 흥망성쇠를 정직하게 기술한다. 11, 12절은 왕국의 멸망을 밝혔다.

 

셋째, 죄의 결과로 40대나 이어진 죽음을 묵묵히 드러낸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17절):

완성을 의미하는 ‘14(7의 배수) 곱하기 3’의 구조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수정한 것이다.

한 예로, 유다 왕들의 목록에서 요람과 웃시야 사이만 보더라도 실제로는 세 명이 더 있었다.

 

묵상과 삶

 

세상과 죽음의 권세는 ‘은폐하는 일’에 있습니다.

한 개인과 집단이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시작하는 순간 죄는 그 어둠 속에서 더더욱 강성해집니다.

하나의 거짓이 열 개의 거짓을 부르는 악순환은 사람의 역사에서 그렇게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깊은 어둠이 작은 빛 하나를 이길 수 없습니다.

새벽의 여명이 어둠을 밝히며 등장하듯,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시대에 생명으로, 어둠의 시대에 한 줄기 빛으로 등장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수십 대를 이어온 죽음을, 죄와 허물로 얼룩진 한 개인의 인생을,

반역으로 멸망한 왕조의 수난을 집어삼키고도 남습니다.

그분께서는 남자와 여자, 간음한 자와 창녀, 영웅과 이방인 모두의 구주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권세는 ‘밝히는 일’에 있습니다.

사귐의 단절은 우리시대가 맞이하는 모든 비극의 출발점입니다.

사람 가운데 있어야 사람다울 수 있는데도, 매일 전해지는 뉴스를 통해

사람들과 단절된 인간성이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의 시대를 극복하고, 어둠을 몰아내는 ‘밝히는 일’은 곧 밝은 사귐 안에 머물러있는 것입니다.

 

먼저 스스로 밝은 분이시며,

또한 다른 이들을 밝히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깊이 머물러있어야 합니다.

그분 안에서야 비로소 ‘나의 욕망’과 ‘하나님의 뜻’이 선명하게 구별될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사귐은 곧 예수님 덕분에 이어진 다른 지체들과의 사귐이기도 합니다.

 

어떤 한 가지 일에 실패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잊힐 것이지만,

밝은 사귐에 실패하는 것은 인생 자체를 포기하고 실패하는 것입니다.

밝은 사귐으로 속히 들어오십시오.

 

묵상질문

 

- 한 개인과 공동체의 잘못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 개인과 공동체의 허물을 은폐하려 했을 때 도달했던 결과는 무엇입니까?

- 그와는 반대로 정직하게 밝혔을 때 맞이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기도

 

+ 말씀을 통하여 어둠을 밝히시는 예수님과의 사귐, 지체와의 사귐에 깊이 머물게 해주십시오.
+ 시대의 어둠에 잠식당하지 않고, 시대를 밝히는 빛이 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