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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 승리하기 위한 조건 /(남편친구 메일)

colorprom 2013. 11. 13. 15:36

악이 승리하기 위한 조건

 

이사야 5:20 Isaiah 5:20
20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0 Woe to those who call evil good and good evil, who put darkness for light and light for darkness, who put bitter for sweet and sweet for bitter.

 

중국의 어느 시골마을 버스 안에서의 일입니다.

예쁘게 생긴 여자를 험악하게 생긴 두 건달이 희롱합니다.

버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모른 체합니다.

급기야 두 건달은 운전사에게 정지할 것을 명하고

말을 듣지 않자 운전사를 칼로 찔러 큰 부상을 입힙니다.

그리고 두 건달은 버스에서 여자를 강제로 끌어내려

버스 옆 풀밭으로 데려가 돌아가며 성폭행합니다.

버스 안에는 건장한 남자도 수 십 명 있었지만

누구 한 사람도 정의롭게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냥 차창너머로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그 광경을 구경만합니다.

왜냐하면 남의 일에 참견했다가 칼이라도 맞을까봐 두려웠겠죠.

그 때, 보다 못한 한 청년이 나서서 건달과 싸웁니다.

건달들은 청년을 칼로 무참히 찌르고 달아납니다.

여자가 울면서 옷을 차려 입습니다.

여자가 버스에 오르자 아무도 말이 없습니다.

창피한건 아는지 여자와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모두가 무관심한척 창밖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운전사는 테러당해서 운전할 수 없고 여자가 헝클어진 상태로 운전석에 앉습니다.
그 때, 피를 흘리며 청년이 차에 타려하자 여자가 소리칩니다.

“왜 남의 일에 참견하시는 겁니까?”

여자는 청년에게 화를 내고 버스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리고 여자가 운전하는 버스는 출발합니다.

청년은 아픈 몸을 이끌고

시골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다 자동차 사고현장을 목격합니다.

교통을 통제하는 경찰관이 말하길

버스가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승객이 모두 사망한 사고라고 합니다.

멀리 낭떠러지를 바라보니 방금 자신이 타고 왔던 그 버스였습니다.
오직 살만한 가치가 있던 그 청년을 버스에 타지 못하게 하고

그 여자는 승객들 모두를 지옥으로 데리고 갔던 셈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사야 5장 20절입니다.

"악을 선하다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고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져 복음을 지켜냈습니다.

죽음까지도 불사하며 당당히 나아가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싸움은 무엇일까요?

이제는 핍박자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게으름무지이기심무관심과 싸워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악을 보면서도 외면하고

뛰어들지 못한 채 방관자가 된 바로 그 입니다.

『앵무새 죽이기』의 큰 줄거리는

대공황 시기 앨라배마주의 한 마을에서

백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한 흑인을 애티커스가 변론하는 것이지만 법정 소설은 아닙니다.

오히려 작가의 분신인 스카웃이 정신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흑인을 변호하는 아버지 애티커스에게 스카웃은 묻습니다.

재판에서 이길 것 같으냐고.

아버지는 답합니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도 해보지 않고

이기려는 노력조차 포기해 버릴 까닭은 없어.

모든 변호사는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건을 맡게 마련이란다.

내겐 이 사건이 바로 그래.

이 사건, 톰 로빈슨 사건 말이다.

아주 중요한 건 인간의 양심과 관계있는 문제야.

스카웃, 내가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난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어.

한국교회에 대한 위기론이 자꾸 나옵니다.

교회 갱신을 소리높여 외치지만

정작 남을 향해서만 변화하라고 하고 자신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악을 보고도 모른 척 합니다.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법조인으로 일하고 있는

이우근 변호사는 이렇게 질타합니다.
‘루터의 95개조는 참회로 시작해 고난으로 끝난다.

한국 개신교의 모토는 무엇인가?

회개와 고난인가, 축복과 형통인가?

뉘우침의 회(悔)만 있고 고침의 개(改)가 없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영혼의 숨결이 종교적 의식(儀式)으로 대체되고

웅장한 성당이 호화로운 예배당으로 바뀐 데 불과하다면,

개신교 역시 또 하나의 형해화(形骸化)한 제도 종교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만약 루터가 이 시대, 이 땅에 살아있다면

95개조가 아니라 아마도 950개조는 써야 하지 않을까?

가톨릭이 아니라 개신교를 상대로 말이다.’


적용하셔야죠.

1. 나치 독일에 대하여 레지스땅스 활동을 한 스테판에셀은

"분노해야 존재하는 것" 이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에게도 시대에 대한 공분(公憤)이 있나요?

2.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악이 승리하기 위한 조건은 단 한 가지다.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삶의 현장에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3. 지난날 우리의 민족, 믿음의 선진들의 순교는

우상과의 싸움, 핍박자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진정한 영적 싸움, 영적 순교는 그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