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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축 경기도 고양시 지축동은 조선시대 종이를 만들던 마을인 지정리와 싸리나무가 많이 자생하 던 마을인 축리로 되어 있었던바, 일제시대를 접어들면서 양주군 신혈면으로 편입 되었다. 이것이 해방후 고양군으로 편입되면서 지정리의 '지'와 축리의 '축'을 합쳐 지축리로 되었던 것이다.
구 파 발 구파발이란 지명은 조선중기부터 공문서를 전달하기 위한 파발역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지역은 옛부터 경의가도의 덕수원이란 국립여관외에 주막과 대장간이 많았다.
연 신 내 옛날 이곳은 산골 이었지만 한성부의 관할구역으로서 연서역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연서역은 조선초에 영서역이라고 칭하였는데 인조반정때 상단부사 이서가 이곳에 늦게 합류했다하여 영서역이 연서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흔히 이곳을 연신내라고 하는 것은 연서천을 이처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불 광 불광동이란 지명은 이 근처에 바위와 절이 많았는데 그중 부처의 서광이 어린 불광사가 위치함으로 유래되었으며 이곳은 조선왕조때 한성부 관할구역으로 수리봉 산밑에는 산돼지가 많이 내려와 농작물에 피해를 입은 저서현이라는 고개도 있다.
녹 번 녹번이란 지명은 녹번이 고개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곳에서 홍제동으로 가려면 이 고개를 넘게 되는데 이 고개에서 약용으로 쓰이는 자연동인 <산골>이 나오므로 녹반현으로 부르게 되었다. 녹반현은 변음되어 녹번이 고개로 칭하게 되었는데 이 고개가 워낙 높고 험한데다가 숲이 우거져 혼자 넘어 다니기를 꺼렸다고 한다.
홍 제 홍제라는 지명은 고려때부터 이곳에 홍제원이 있었기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홍제원은 서울 근교의 국립여관일뿐 아니라 조선말까지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으로 그 규모가 컸다고 전해온다.
무 악 재 한양천도에 주요역할을 한 무학대사와 관련하여 무악현, 무악재라 칭하였으며 태조 3년 태조가 몸소 이곳에서 한양의 자세를 관찰한후 천도를 결심하였으며 또한 인왕산에 산세가 험준하여 호랑이가 많아 한양으로 입성할때 여러사람이 모여서 재를 넘었다 하여 모아재 라고도 하였다.
독 립 문 독립문역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이 세워져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문은 1897년 서재필 박사의 노력으로 영은문 대신 세운것으로 현재 사적 3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곳을 영천이라 부르게 된것은 악박골 약수가 유명했기 때문에 유래된것이다.
경 복 궁(정부중앙청사) 경복궁은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한후 새왕조를 상징하는 궁전을 1395년 창건했던 초기에는 비교적 소규모였으나 태종, 세종때에 이르러 증축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250년 후인 1869년 고종때 이르러서야 왕권확립 차원에서 오늘날의 규모로 재건립되었다.
안 국 안국동은 조선초부터 이 일대를 안국방(安國坊)으로 정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이곳은 전일에 북촌(北村), 또는 '웃대'로 불리던 '서울 중의 서울'이었다. 조선초 성종때 월산대군의 풍월정이 있었으며, 조선말 고종과 명성황후가 혼례식을 올린 안동별궁이 인근에 있었다.
종로3가 종로는 조선왕조 500년동안 밤에는 인정(人定),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개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鐘樓)가 있어 유래된 것이다. 이거리에는 조선초부터 시전이 있었던 번화가였으 므로 일명 운종가로 칭한 서울의 중심가 였다.
을지로3가 을지로는 우리나라 위인중 한사람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성을 따서 붙인 것이다. 조선왕조때는 구리개로 불리던 이 길은 1914년부터 황금정(黃金町)으로 고친 적도 있다. 옛날 이 길은 종로 만큼 변화하지는 않았으나 관공서와 시전(市廛)이 들어서 있고 가내 수공업이 성한 곳이었다.
충 무 로 충무로는 임진왜란때 명장 충무공 이순신의 시호를 붙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은 건천동 즉 현재의 인현동1가 였으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충무로로 지었다. 이곳은 남촌 또는 아랫대로 불리우던 지역으로 사육신의 힌사람인 박팽년 외에 많은 명사들이 살았다.
동대입구 동대입구역이 위치한 장충동(奬忠洞)은 광무 4년(1900) 을미사변때 순국한 사람들을 위하여 단을 꾸며놓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곳에 설치된 장춘단은 일제가 폐지하고 공원을 조성하였다.
약 수 약수역은 1970년까지 약수동이란 행정구역 명칭이 있었으므로 유래된 것이다. 약수동은 신당 3동 지역에 위장병에 특효가 있는 약수가 있어서 유래된 것이다. 전에는 이곳에서 한남동 으로 가려면 높은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이 고개 이름을 버티고개라 칭했다.
금 호 금호동은 옛부터 대장간이 많았으므로 "무수막"또는 한자음으로 수철리( 水鐵里)라고 칭하 던것이 1936년부터 금호동이 되었다. 이곳은 지형관계로 농경지는 별로 없지만 옛부터 주민 들이 대장간, 복숭아 재배, 나루터 일에 종사하는 등 근검절약으로 생활수준이 높았던 곳이다.
옥 수 옥수동은 이곳에 '옥정수'라는 우물이 유명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바위틈에서 나온 이 우물은 그맛이 뛰어나 왕에게 바치기도 했는데 1960년 도로공사때 매몰되었다.
압 구 정 압구정역은 조선조 세조,성종때 권신 한명회가 세상일을 잊기 위해 강가의 갈매기를 벗삼아 지내겠다는 정자 이름이다. 전일의 이곳은 돛단배 떠있는 "동호"와 강북의 원근 풍경 그리고 닥나무가 무성한 저자도 등이 펼쳐져 한 폭의 그림같은 절경이었다고 한다.
신 사 신사동은 1914년 새말(新村)과 사평리(沙平里)의 두 마을을 합칠때 각각 첫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곳은 광주군 언주면에 속해 있을 당시에는 모래 벌판에 "새말" 나루터가 있던 한적한 곳이었으나 1963년에 서울시에 편입된 후 크게 변했다.
잠 원 신사동은 1914년 새말(新村)과 사평리(沙平里)의 두 마을을 합칠때 각각 첫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곳은 광주군 언주면에 속해 있을 당시에는 모래 벌판에 "새말" 나루터가 있던 한적한 곳이었으나 1963년에 서울시에 편입된 후 크게 변했다.
고속터미날 반포동에 고속버스 터미널이 들어선 것은 1976년 9월 1일로 이곳은 서울역과 함께 서울의 관문이 되었습니다. 이곳을 반포동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개울이 구불구불 흐르기 때문에 서릿개 또는 蟠浦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盤浦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교 대(법원, 검찰청) 교대역은 인근에 서울교육대학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이 역이 위치한 서초동은 예전에 서리풀이 무성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남부터미날(예술의 전당) 서초동에 위치한 화물터미널로 인해 화물터미널역으로 되어 있었으나 화물터미널이 이전하고 이전장소에 남부시외버스 터미널이 들어와 남부터미널역으로 개명하였다. 서초동에는 정곡과 왕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정씨와 왕씨가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양 재(서초구청) 양재라는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교통, 우체역할을 하던 양재역이 이곳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이곳을 말죽거리라고 부르는 것은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을 지나 가다 유생들이 팥죽을 급히 쑤어 바치자 말위에 탄채로 팥죽을 들었다는 것으로부터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매 봉 이곳은 본래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이었으나, 1963년 서울시에 편입 되었으며 독구리(지금의 도곡) 마을 사이에 약 95m정도의 매봉산이 위치하고 있다.
도 곡 도곡의 유래는 마을뒤에 매봉산이 둘러있고 물아래쪽 산부리에 돌이 많이 박혀 있어 돌부리라하던 것이 변하여 독구리, 독곡이 되어, 지금의 도곡이라 명명하였다.
대 치 대치동 동명의 유래는 당시 자연부락 7,8개 마을중 큰고개 밑에 있는 한티(또는 한터) 마을을 한자명으로 대치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학 여 울 학여울이란 탄천과 양재천이 만나는 지점인 한강 갈대밭 부근의 옛지명이 대동여지도에는 鶴灘으로 '탄'을 한글로 풀어서 학여울이라 제정하였다.(여울:강이나 바다에서 얕거나 좁아 물살이 빠르고 세찬곳)
대 청 현지 일원동 677번지 일대로서 일제때인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 확정때에 이지역에 있던 대청마을이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일원리와 합병되었던 곳 으로 대청역은 합병되기전 옛고을 지명으로 명명되었다.
일 원 일원 동명의 유래는 옛날 이 마을에 일원이라는 서원이 있었으므로 일원이 변하여 일언이라 한데서 연유하고 또한 이 근처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므로 본동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설 에는 이 마을의 사방이대모산에 가리워져 숨겨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일원동이라 불리어 졌으며 '일원역'은 이러한 유래가 있는 법적 동명을 사용했다.
수 서 이지역의 서쪽에 한강물이흐른다하여 수서리라 하였다하며 예전부터 일원동과 같이 변천 해 왔다. 또한 이곳은 조선 태조의 제7자 무안대군(방번) 내외 및 그 자손들의 묘소와 전주 이씨 장의 공파 묘소 700여기가 있어 궁말 또는궁촌이라 불렀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지방 유형 문화재 제 48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