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딸..
안현생의 일생
순국 100주년을 맞은 안중근 의사는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두었다.
1902년에 태어난 딸 안현생은 8세 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은 중국으로 아들만 데리고 망명함)
명동성당에서 프랑스인 신부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다
13세 때 일제를 피해 제정 러시아로 망명했다.
이후 16세 때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불문학과 미술을 공부하고
서울로 돌아왔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대구로 피난하는 등 끊임없는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 안현생 여사가 생전 대구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불문학 교수로 3년간 재직했던 자료가 처음발견됐다.
그후 서울 살면서 1960년에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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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중국 대련시에 있는 뤼순 감옥에서 돌아 가셨다.
그후 그 집안은 어떻게 됐을까?
다 뿔뿔히 흩어졌고,,,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장남은 7살에 일본 밀정에 의해 독살됐다는 설이 있다.
부인은 고국 땅을 밟지도 못하고 1946년 중국에서 돌아가셨다.
둘째 아들은 일본 당국에 의해
서울에 마련된 이등박문 사찰에 가서
사죄한다고 했다.(중국 상해에 살았다)
이토의 아들 이토 분기치(일본광업 사장)를 만나기도 했다.
일본 정부의 치밀한 각본대로 연출된 화해극이었다.
당시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은
"조선통치의 위대한 전환사"
"부처의 은혜로 맺은 내선일체"라며 대서특필했다.
언론은 준생이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후에 일본은 영국인 세관장이 살던 고급 주택을 사주는 등
준생을 특별 관리했다.
이로 백범 김구는 아들을 역적이라,,내몰았다,,,
안 의사 가문의 사람들에겐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친일파가 될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황이었고
준생의 경우 일신의 영달을 위해 친일파가 된 경우와는
구분해서 봐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1950년 중국에서 귀국한 준생은
1952년 피란 도중 부산에서 폐결핵으로 숨졌다.
부인 정옥녀씨와 1남2녀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아들 웅호씨는 미국에서 심장병 권위자가 됐다.
도진순 창원대 교수(사학)는 2009년 안 의사 의거 100돌을 기념해 발표한
‘안중근 가문의 백세유방과 망각지대'라는 논문에서
“현재 안중근의 직계후손은 미국에,
동생 정근의 직계는 남한과 미국에,
공근의 직계는 북한과 파나마에 흩어져 있다”며
남과 북, 해외로 흩어진 그의 후손들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은
안 의사 유해 발굴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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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의 자손이 하나같이
힘들게 살았다..
아버지는 독립운동 한다고 집안을 안돌보고,
자손들은 가난하게 살아 공부도 못해 변변한 직업도 없이
허름한 집에서 가난하게 사는 모습이 tv속에서 나온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영웅의 자손은
나라에서 따뜻하게 보살펴 줬으면 하는데,,
그 사람들의 모습보면 안쓰런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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