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의달 모닝라이브]
‘개혁파’ 아버지 덕에 출세한 시진핑...왜 ‘독재자’ 됐나?
‘시진핑 1인 독재’의 3가지 뿌리
[차이나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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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0월 16일 개막한 제20차 중국공산당(중공) 당대회에서
시진핑(習近平)은 ‘10년 집권후 퇴임’ 원칙을 깼습니다.
총서기 바로 아래 자리인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을
모두 시자쥔(習家軍·시진핑의 부하들)으로 채웠습니다.
‘핵심’이라는 점잖은 표현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는 시대를 역행하는 ‘1인 독재’에 경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0년 전인 2012년 11월15일
18차 중공 당대회에서 시진핑이 총서기에 처음 선출될 때만 해도,
“중국이 민주화로 향해 갈 수도 있겠다”는 실낱같은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아버지인 시중쉰(習仲勳·1913~2002년) 전 부총리가
문화혁명의 피해자로 몰려, 시진핑의 집안은 16년간 풍비박산났습니다.
마오쩌둥 사망 2년 뒤인 1978년 광둥성(廣東省) 제2서기로 복귀한 시중쉰은
이듬해 제1서기로 승진해
홍콩에 인접한 선전(深圳)을 ‘중국 1호 경제특구’로 기획·설계했습니다.
그는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에 동조해 덩샤오핑(鄧小平)의 2선 퇴진을 주장할 만큼
민주화 의지도 갖고 있었습니다.
시중쉰의 몰락과 함께 10대 초반부터 반동분자(反動分子)의 아들로 지목된 시진핑은
7년 간 북서부의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으로 쫓겨났습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으로 시진핑도
“점진적인 정치 민주화에 나설 수 있지 않겠나”고 봤던 것이죠.
시진핑의 정치적 성장도 개혁·개방의 첨병인 푸젠성·저장성·상하이에서 이뤄졌으니까요.
◇개혁·개방 끝내고 ‘1인 독재’
시진핑은 총서기 취임 직후인 2012년 12월 7일부터 선전을 포함한 광둥성 일대를 돌며
“개혁·개방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잠시 멈추거나 후퇴하면 활로는 없다”고 말해
기대에 부응하는 듯 했습니다.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그의 행보를 ‘신남순강화(新南巡講話)’라고 했습니다.
덩샤오핑이 1992년, 88세 노구를 이끌고 선전과 상하이 등 남부 지역을 찾아
개혁·개방을 설파한 ‘남순강화’에 빗댄 것이었죠.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지난달 제20차 중공 당대회에서 3연임에 성공한 시진핑이 민주화는 고사하고
개혁·개방 노선을 지속할 것으로 예상하는 이는 거의 전무(全無)합니다.
아시아소사이어티 회장인 케빈 러드 전 호주 총리는 <포린 어페어(Foreign Affairs)>지 2022년 11/12월호 기고문에서 이렇게 지적했어요.
“시진핑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완전히 끝장냈다. 그는 그 자리에
새로운 형태의 마르크스주의적 국가주의(a new form of Marxist nationalism)를 만들었고,
이것이 중국의 정치·경제·대외정책의 본질과 외형을 결정짓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는
“시진핑이 정치 방면에선 사회 전면의 공산당 통제를 강화하는 레닌주의 좌파,
경제에선 국유기업 중심의 마르크스주의 좌파,
외교에선 ‘늑대 외교’ 같은 공격적인 민족주의 우파 정책을 펴고 있다”고 했습니다.
대학 때부터 중국을 공부하고 중국 현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러드 전 총리는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루커원(陸克文)이라는 중국 이름을 갖고 있는
중국 전문가입니다.
1978년 이후 40여년 지속되어 온 ‘개혁·개방’에 종지부를 찍고
그가 마오쩌둥과 같은 ‘1인 독재’로 되돌아갔다는 얘기인데요.
시진핑은 왜 아버지와 반대로 반(反)민주·독재의 길을 걷고 있는 걸까요?
◇부친 후광으로 잘 나가
시진핑은 1953년 6월 태어났습니다.
출생 장소가 베이징과 가까운 곳이라는 뜻에서
베이징의 옛이름인 베이핑(北平)의 뒷글자를 따 진핑(近平)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중공 정권 출범에 기여한 시중쉰은 1952년 핵심 요직인 당 중앙선전부장에 임명됐고
1959년부터 부총리로 승진했습니다.
시진핑은 베이징 시내 저택에 살면서
당의 고급 간부 자녀들이 다니는 베이징 81학교(八一學校)에 다녔습니다.
한 마디로 유복한 ‘금수저’였습니다.
하지만 1962년 류즈단(劉志丹) 사건으로 시중쉰이 이듬해 실각(失脚)하면서
집안이 무너졌습니다.
류즈단 사건은 중국 산간 혁명 근거지의 창건자인 류즈단의 생애를 다룬 소설 발간을 계기로
당내에 벌어진 반당(反黨) 활동자 색출·검거 사건을 말합니다.
1966년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졸지에 반당(反黨) 집안 아들이 된 시진핑은
더 모진 핍박과 수모를 겪었습니다.
16세 무렵인 1969년 1월 그는 옌안시 옌촨(延川)현의 산골 마을인
량자허촌(梁家河村)으로 하방(下放·지식인을 노동현장으로 보냄)당했습니다.
빈곤과 비참함을 못 참고 3개월만에 기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도망친 그는
다시 붙잡혀 하수관 매설 같은 육체 노동을 했습니다.
시진핑의 가족은 집과 재산을 뺏겼고
어머니 치신(齊心·1926~ )은 거리로 끌려나와 뭇매와 창피를 당했습니다.
그의 이복(異腹) 맏누나 시허핑(習和平)은 홍위병들의 구타를 견디다 못해 자살했습니다.
문화혁명이 완화된 1974년 가을, 시진핑은 칭화대학 화공과(化工科)에 시험없이
노동자·농민·병사[工農兵] 가운데 추천받아 청강생 신분으로 입학했습니다.
1978년 3월, 시중쉰이 전국정치협상위원회 상임부위원장이 되자,
시진핑은 부모의 후광(後光)과 인맥 도움으로 출세 길을 달립니다.
고비 때마다 최소 세 번 이상입니다.
첫 번째는 시진핑이 1979년 2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겅뱌오(耿飇·1909~2000) 국방장관의 전속 비서로 발탁된 것입니다.
군 경력이 없는 대학을 갓 졸업한 26세 청년에게 막중한 자리가 주어진 것은
‘아주 특별한 예외’입니다.
이는 겅뱌오가 시중쉰과 항일전쟁에서 생사(生死)를 함께 한 노전우(老戰友)여서 이뤄진
특혜였습니다.
겅뱌오는 시진핑이 군의 내부 비밀 문서를 열람할 수 있도록
그의 군적(軍籍) 취득을 도와줬고,
시진핑은 같은 해 3월10일 월봉 52위안을 받는 부연대장급(중령급)으로 임관해
근무했습니다.
“권력은 총구(銃口)에서 나온다”고 마오쩌둥이 말할 만큼,
군(軍)을 중시하는 중공에서 시진핑의 군(軍) 경력은 나중에 큰 정치적 자산이 됐습니다.
비서로 3년 근무한 시진핑은
1982년 3월,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부서기로 부임했습니다.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300㎞ 정도 떨어진 이곳은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조자룡의 고향입니다.
시중쉰의 힘으로 중앙에서도 괜찮은 자리를 맡을 수 있었지만
‘큰 뜻’을 위해 지방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당시 시중쉰은 허베이성의 최고 실력자인 가오양(高揚) 서기(書記)에게
“아들을 잘 챙겨달라”는 뜻을 전했고 어머니 치신은 편지를 보내 부탁했습니다.
가고양은 산시성에서 시중쉰과 항일투쟁을 함께 한 동지였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힘에 편승한 시진핑을 마땅찮게 여긴 가오양은
공식 회의에서 이 사실을 폭로했고,
이로 인해 체면을 구긴 시진핑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습니다.
그럼에도 시진핑은 1985년 6월 푸젠성(福建省) 샤먼(廈門)시 부시장으로 영전했습니다.
푸젠성의 1인자인 샹난(項南) 서기가
시중쉰의 후원을 받는 개혁파의 대표 주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샤먼에 도착한 시진핑을 직접 만나 성(省)의 개황을 설명하고 격려하는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이후 시진핑은 닝더(寧德) 서기, 푸저우(福州) 서기, 푸젠성 부서기, 푸젠성 성장으로
18년 가까이 푸젠성에서 근무했습니다.
개혁·개방 활력이 높았던 푸젠성과 광둥성은
출세 지향적 간부들이 가장 선망하는 곳이었죠.
특히 문화혁명에 대한 반성의 기운이 팽배한 1980년대에
항일(抗日)투쟁과 공산혁명의 원로이자, 개혁·개방의 주역인 시중쉰의 존재감은
최고에 달했습니다.
여기에 어머니 치신의 치맛바람까지 작용했으니까요.
시진핑은 그러나 44세때인 1997년 정치 인생의 큰 굴욕을 맛봤습니다.
푸젠성의 2인자인 부서기(副書記)로 있던 그해 15차 공산당 대회에
중앙위원회 후보 위원에 나섰는데, 151명 중 151위 즉 꼴찌로 간신히 뽑힌 겁니다.
관례대로라면 150명만 뽑았는데 시진핑을 밀어넣기 위해 1명 더 뽑았다는 얘기가
지금도 설득력있게 나돕니다.
◇26년 연속 지방 근무...권좌 등극
이는 시진핑이 오랜 지방 근무에도 특별히 내세울만한 실적이 없었다는 방증입니다.
2002년 10월부터 저장성(浙江省) 서기로 일한 시진핑은
5년후 제1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겸 상하이시 당서기로 발탁됐고
이듬해 3월 국가 부주석에 임명됐습니다.
그는 상하이 당서기 시절 장쩌민(江澤民·1926~ )과 주룽지(朱镕基·1928~ )의 파벌인
상하이방(上海幇)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 태자당과 상하이방 양쪽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지지를 받은 시진핑은 2010년 중앙군사위 부주석을 거쳐
2012년 11월 18차 당대회에서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주석을 꿰찼습니다.
2013년 3월17일 국가주석에 공식 선출됨으로써
시진핑은 중국 최고지도자에 등극했습니다.
그가 26년동안 지방에서만 근무하며 인맥을 넓히고
자신에게 올 기회를 끈질기게 기다렸다가 최고 권좌에 오른 것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권력정치술(權力政治術)의 백미(白眉)입니다.
◇왜 아버지와 정반대 ‘공포 정치’?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것은
시진핑은 왜 정치 개혁과 민주화에 전향적이던 아버지
시중쉰의 뜻과 완전히 다른 길을 걷는가 하는 점입니다.
시중쉰의 정치 개혁 성향은 여러 곳에서 드러나는데요.
그는 정치 개혁을 갈망하는 중국 지식인들이 애독한 언론매체 <염황춘추(炎黃春秋)>의
2001년 창간 10주년 기념호에 “염황춘추는 좋은 잡지”라고 직접 격려사를 썼습니다.
1990년 10월 30일 전인대 상무(常務)부위원장으로 있던 시중쉰은
1989년 6월4일 베이징에서 벌어진 천안문(天安門) 사건으로 희생된 학생과 시민들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을 반대자 또는 반동파라고 매도하며
타도해야할 사람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른 의견[異論]도 지키고 중시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개혁·개방도 다른 의견 가운데서 생겨났다.
중국공산당 역사를 보면 다른 의견을 탄압하다가 초래된 사회적 재앙이 엄청났다.”
말년 10년을 광둥성 선전에서 보낸 시중쉰은 그의 개인 비서 장궈잉(張國英)에게
“홍콩의 법률제도를 배워야 한다.
시민의 이익을 중시한다면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지도하는 현상을 차단하고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대죄(大罪)를 막을 수 있다”고 수 차례 말했습니다.
그는
“마오쩌둥 같은 강한 독재자가 다시 출현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면서 최고지도자나 당의 방침과 다른 의견을 내도 처벌받지 않는
‘이론보호법(異論保護法)’ 제정을 염원했습니다.
하지만 시진핑은 시중쉰이 높이 평가한 <염황춘추>를 집권 후 적대시하며 탄압했고,
<염황춘추>는 결국 2016년 자진 정간(停刊)을 결정했습니다.
그는 당내에서 다른 의견을 드러내는 사람을 ‘반당 분자’로 투옥시켰고
언론·표현의 자유를 완전 박탈하는 ‘홍콩국가보안법’을 강행통과시켰습니다.
아버지의 신념과 정반대로 ‘공포정치’, ‘강압 정치’를 줄곧 밀어부치고 있는 것입니다.
케빈 러드 전 총리는 시진핑에 대해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중국민족 부흥 이 세 가지를
진정으로 믿고 있다”고 했습니다.
시진핑은 어떻게 아버지 시중쉰과 대척점에 섰을까요?
◇①지옥 추락하며 다진 ‘권력 의지’
첫 번째 이유는 청소년기에 권력의 단맛과 쓴맛을 처절하게 체험한 그가
‘권력 의지’의 화신(化身)이 됐다는 분석입니다.
시진핑은 유소년기에 특권층의 삶을 누렸습니다.
일례로 그가 다닌 ‘베이징 81학교’는
목욕탕과 수영장, 위생소, 아이스크림 판매점과 동물원을 갖춘 초호화시설이었습니다.
집에는 경비원, 요리사, 가정부와 잡역부가 있었고,
매년 여름이면 시진핑의 가족은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휴가를 보내며
햇빛과 모래 사장을 즐겼습니다.
그 무렵 대약진운동으로 2000만명 이상이 아사(餓死)한 것과 무관한
‘천상(天上) 인간’의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몰락으로 시진핑은 ‘인간 지옥(地獄)’으로 떨어졌습니다.
푸젠성 푸저우시 당서기 시절인 1996년 4월
<중국기검감찰보(中國紀檢監察報)>와의 인터뷰에서 한 시진핑의 말입니다.
“나는 일반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괴로운 일을 직접 겪었다.
문화혁명 중 4차례 감옥에 끌려갔고
반동학생으로 내몰려 10차례 크고작은 비판대회에 끌려 나와 비판당했다.
배가 너무 고파 구걸한 적도 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는 온 몸이 이로 뒤덮혔다.”
혹독한 노동에 지쳐 15세 때부터 담배를 피웠고,
너무 굶주려 고기를 날 것으로 먹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 무렵 시진핑은 본능적으로 정계 투신과 출세욕이 가득찬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시진핑에 관한 최초의 전기(傳記)인 <시진핑전(習近平傳)>을 쓴
홍콩의 중국 전문가 우밍(吳鳴)은 이렇게 밝혔습니다.
“시진핑은 우역곡절을 겪으면서 공산주의청년단[共青團] 가입을 위해 8번 신청서를 냈다.
책임자를 동굴로 초청해 계란튀김을 접대했다.
공산당 당원이 되려고 연속으로 10번 신청서를 냈고
1974년 21살에 마침내 공산당에 입당했다.”
◇②마오쩌둥과 평생 ‘일심동체’
두 번째는 시진핑이 하방 생활 때부터 지금까지 마오쩌둥을 시종일관 긍정하면서
평생 일심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개혁·개방 이후 역사에서 그 이전의 역사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개혁·개방 이전 역사도 그 이후 역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마오쩌둥의 공(功)을 부정해서는 안 되며,
과도한 마오쩌둥 비판도 안 된다는 엄명(嚴命)입니다.
지지(時事)통신 베이징특파원으로 두차례 10년간 근무한
시로야마 히데미(城山英巳) 훗카이도대 대학원 교수는
1973년 초 시중쉰과의 재회를 결정적 순간으로 꼽습니다.
시진핑이 1996년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8년 만에 가족을 만난 아버지는 자리에 앉자말자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나와 내 동생을 구분하지도 못했다.
나는 내 고뇌를 말하면 동정(同情)을 얻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뜻밖의 말을 했다.
‘농촌으로 하방은 좋은 것이다.
나의 구금에 얽매이지 말고 내가 구금에 풀려나오는 것도 기다리지 말아라.’
나는 아버지에게 ‘빨리 돌아오세요’라고 말하지 않고
‘농촌에서 대중과 하나가 되겠다’는 각오를 더욱 굳혔다.”
시로야마 교수는 이렇게 분석합니다.
“이 순간 시진핑은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혁명과 중국공산당의 일부가 됐다.
마오쩌둥을 부정(否定)하거나 비판한다는 생각은 그에게 털끝만큼도 없었다.
마오쩌둥이 그의 전부였다.
그는 당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려면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시진핑은 1970년부터 량자허촌에서 농민들이 쓰는 방언(方言)을 같이 쓰며
농민들에 녹아들었고 농삿일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밤에 그의 토굴(土窟)에 찾아온 촌민들에게 그는
<삼국지>, <수호지>와 베이징과 중난하이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려줬습니다.
시진핑은 최대 고난기였던 문화혁명과 7년의 하방 기간을
가장 큰 성공 체험으로 자랑하며 미화(美化)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런 행태에 대해, 13세 이후 제대로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시진핑이
문화혁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없이 마오쩌둥과 문화혁명을 무조건 수용한 결과라는
관측도 있습니다.
◇③권력 싸움 패한 부친을 ‘반면교사’로
세 번째는 중국공산당 권력 투쟁에서 패배해온 아버지 시중쉰에 대한
반작용(反作用)이라는 분석입니다.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 저우언라이 총리의 측근으로서 권력 주변부에 있었던 시중쉰은
70년대 후반 당 중앙에 복귀한 후에는
점진적 민주화를 주장한 후야오방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했습니다.
공산당 주류인 정통 이념파[紅]와 거리를 두었던 것이죠.
1987년 후야오방이 덩샤오핑의 2선 퇴진을 주장할 때도, 시중쉰은 후야오방 편에 섰습니다.
그해 1월 후야오방이 총서기에서 해임당하자, 시중쉰은 혼자 이 결정에 공개 반발했습니다.
이듬해 공산당 정치국원에서 탈락하고 전인대 부위원장으로 좌천된 시중쉰은,
1989년 후야오방의 사망 이후 그에 대한 추모 시위가 천안문 유혈사태로 번지자
모든 관직을 박탈당했습니다.
시중쉰은 2002년 사망할 때까지 10년간 광둥성 선전(深圳)에서 은거했습니다.
시진핑은 부총리에서 하룻밤 새 죄인으로 몰려 20년 가까이 밑바닥 생활을 하고
말년에는 정계에서 축출된 아버지를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는 당내 권력투쟁에서 패배를 거듭한 아버지의 인생 행로를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
거꾸로 나간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시진핑은 부모의 인맥과 후광에 힘입어 당 상층부에 진입했습니다.
그러나 청년기 독특한 경험과 아버지의 험로(險路)를 목도한 시진핑은
아버지 사후(死後) 20년 만에 마오쩌둥 이후 가장 강력한 독재자가 되는
역설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30년 집권 야망...’대만 침공’ 가능성
키 180cm, 몸무게 100kg에 육박하는 거구(巨軀)의 시진핑은
앞으로 얼마나 오래 집권할까요?
아버지 시중쉰이 89세까지 살았고 어머니 치신은 올해 96세인 것을 감안하면,
시진핑도 90세까지는 건강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69세인 그가 20년 더 권좌에 있어 30년 집권을 채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시진핑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중국 경제 부진은 그에게 부담입니다.
마오쩌둥, 덩샤오핑 보다 카리스마와 실적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이를 돌파하는 카드로 ‘대만 침공’이 거론됩니다.
시진핑이 예찬하는 ‘빈부격차 없고 혁명 열기로 충만한 옌안시대’처럼,
대중을 열광시키고 단합시키는 데는 전쟁만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5년 후인 2027년은 마침 그의 총서기 4연임(連任) 여부를 결정지울 뿐 더러
중국 인민해방군 창군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참고한 자료
吳鳴 지음·송삼현 옮김, 시진핑 평전 (서울, 2009),
峯村健司 지음·박선영 옮김, 13억분의 1의 남자 (서울, 2015),
城山英巳, “習近平の假面を剝ぐ” (文藝春秋, 2022년 11월호),
Cai Xia, “The Weakness of Xi Jinping” (Foreign Affairs, Sep./October 2022),
Kevin Rudd, “The World According to Xi Jinping” (Foreign Affairs, Nov./December 2022),
Kevin Rudd, “The Return of Red China” (Foreign Affairs, Nov. 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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