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독립 지키려… 탱크·비행기·군함까지 밀수했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46]영원한 리더 시몬 페레스 [上]
이스라엘 초대 총리 벤구리온은
네게브 사막의 키부츠를 이끄는 청년 리더 시몬 페레스를 눈여겨보았다.
그는 시몬에게 1년만 도와달라고 청했다.
그랬던 벤구리온은 시몬을 가까이에 20년 잡아두며 그에게 의지했다.
그런 벤구리온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왜 그 청년을 그토록 믿지요?”
그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세 가지 이유가 있지.
그 청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 청년은 다른 사람 흉을 보지 않아.
그리고 그 청년은 내 방에 올 때마다 대부분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고 찾아와.”
그랬다. 시몬 페레스는
70년 정치 인생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진실을 앞세워 정면 돌파했으며,
정적에 대해 네거티브 전략을 펴지 않았고,
평생 새로운 아이디어와 원대한 꿈을 갖고 도전하는 삶을 살았다.
이런 기질은 어렸을 때 형성됐다.
그의 아버지는 가정을 활기차게 이끄는 목재상이었으며
어머니는 문학을 사랑하는 도서관 사서였다.
어머니는 도서관 책을 빌려 와 시몬과 함께 읽으며 토론을 즐겼다.
시몬은 어머니에게 지지 않으려 책을 열심히 읽었으며,
토론에 대비해 책 내용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외할아버지는 공동체 지도자인 랍비였다.
그는 시몬에게 토라와 유대 역사를 가르쳤다.
덕분에 시몬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유대교인이 되었고 유대 민족의 앞날에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그가 살았던 폴란드 변방 유대인 마을에는 가족 같은 공동체 의식이 있었다.
시몬의 어릴 적 꿈은 시인이었다.
1934년 열한 살 시몬이 고향을 떠나 텔아비브로 이주할 때 할아버지와 약속했다.
어떤 경우에도 유대인으로 남겠다고.
몇 년 후에 나치군이 유대인 마을에 쳐들어와
할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을 시나고그에 몰아넣고 산 채로 불태웠다.
시몬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할아버지와 한 약속을 되살렸다.
시몬은 고등학생 때 청소년 운동 단체에 가입했으며
열다섯 살 때 청년 지도자를 양성하는 ‘벤쉐멘 농업학교’의 장학생으로 뽑혀 전학 갔다.
그곳에서 낮에 배우며, 농사지으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밤에는 총 들고 보초 서며 때때로 쳐들어오는 아랍인들에게 맞서 싸웠다.
그곳 마을에서 평생 반려자인 소냐를 만났다.
당시 시몬은 신기술 농사법을 배워
팔레스타인 땅의 60%인 네게브 사막을 농토로 바꾸는 일이 자기 사명이라 여겼다.
그 무렵 학생들은 유대 국가의 정치 체제에 대해 두 파로 나뉘었다. 시몬은
유대 국가를 소련식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스탈린주의자들과 토론하면서
유대 국가는 유대교를 기초로 유대 민족 특유의 정치 체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견해를
설득하곤 했다.
그는 토론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영향력 있는 행동인지를 깨달았다.
시몬은 연설 능력과 조직력을 인정받아 청소년 운동 리더로 부상했다.
이때부터 벤구리온은 시몬을 눈여겨보았다.
1941년 벤쉐멘을 졸업한 후 시몬은 게바 키부츠(집단농장)에 파견되어
농사와 청소년 운동을 이끄는 일을 병행했다.
이후 시몬은 몇몇 동지와 함께 알루못에 새로운 키부츠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시몬은 광야에서 양 떼를 돌보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그조차 그에게는 값진 경험이 되었다.
시몬은 목자 처지가 아닌 양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양 떼와 소통해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는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 시몬은 알루못 키부츠의 책임자가 되어 1945년 소냐와 결혼했다.
당시 벤구리온은 시몬에게 키부츠에서 빠져나와
청소년 운동에 전념하며 자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 방안에 대해 두 파로 나뉘어 있었다.
싸워서라도 옛 영토를 전부 찾아 ‘온전한 이스라엘’을 건국하자는 강경파와,
현실적으로 건국 시도부터 실패하지 않도록
유엔이 추진하는 ‘아랍과 유대 국가 분할 건설’안을 받아들이자는 현실파가 그것이다.
1945년 시몬은 텔아비브에 있는 청소년 운동 본부로 옮겨가
전국 청소년 지부를 돌아다니며
벤구리온과 자신이 주장하는 ‘이스라엘 분할 국가 건국’안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어
전당대회에서 사무총장에 당선되었다.
1947년 5월 24세에 시몬은
벤구리온의 요청으로 지하 유대인 군대 ‘하가나’에서 복무하는 군인이 되었다.
벤구리온은 시몬에게
이스라엘을 건국하면 필연적으로 아랍 국가들과 전쟁이 일어날 텐데
무기를 최대한 빨리 은밀히 준비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당시 소련은 아랍 국가들에 무기를 팔았으나 서방 국가들은 중동에서 전쟁을 원치 않아
이스라엘에 무기 수출을 금지하고 있었다.
시몬은 유대 국가를 지키는 유일한 길은 금수 조치를 피해
해외에서 무기를 구입해 몰래 들여오는 것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여권을 위조해 비밀리에 전 세계 디아스포라(유대인 공동체)를 돌며
무기상들을 접촉했다.
시몬은 해외에서 무기를 구입, 분해해 몰래 팔레스타인에 보내 다시 조립했다.
무기 구입 자금도 해외 유대인 공동체를 접촉해 마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중 체코슬로바키아와 연결되어 6개월 만에 상당량의 무기를 비축할 수 있었다.
1947년 11월 유엔에서 두 국가 분할 건국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유대인들은 환호했고 아랍인들은 분노에 휩싸였다.
이듬해 5월 14일 영국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자
같은 날 벤구리온은 기습적으로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다.
건국 당시 유대인 인구는 80만명이었다.
예상대로 다음 날 사방에서 시리아,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군대가 쳐들어왔다.
비축해두었던 무기 덕분에 어렵게나마 방어해낼 수 있었으며
전쟁 중에도 무기 수입은 계속되었다.
전쟁이 터지자 유대 이민자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전쟁 시작 무렵 이스라엘 군인은 3만5000명이었으나
이듬해 끝날 무렵 10만 명이 돼 세 배로 불어났다.
새 이민자들이 입대하고
해외 유대인들이 신생 조국을 지키려 많이 자원 입대했기 때문이었다.
1차 전쟁이 끝난 뒤 시몬은
앞으로 큰일을 하려면 미국 가서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벤구리온에게 미국 유학 의사를 밝혔다.
벤구리온은 흔쾌히 허락했다.
시몬은 뉴욕 야간대학에 다니며
낮에는 무기 거래 암시장에 뛰어들어 뒤이을 전쟁에 대비했다.
시몬은 콜롬비아에서 영국제 구축함 두 척을 사들였고,
미국에서 탱크와 비행기를 구입해 분해한 뒤 이스라엘로 보내 재조립했다.
시몬을 돕는 미국 내 유대인들이
캘리포니아 외진 곳에 비행기 비밀 격납고 겸 정비 공장을 만들어 밀수출을 도왔다.
아예 그들은 폐기된 비행기 부품들을 사들여 비행기를 대량으로 제작했다.
시험 비행을 마친 비행기는 다시 분해해 이스라엘로 보내 재조립했다.
어떤 때는 영화 촬영하는 것처럼 위장해 비행기를 이륙시켜 그대로 이스라엘로 날려 보냈다.
이후 시몬과 그들은 야심 찬 계획에 착수했다.
비행기 제작 공장을 아예 이스라엘에 건설하기로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시몬은 공부를 계속하여 하버드 경영대학원까지 마치고 귀국해
1953년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캘리포니아 비행기 제작 회사가
1954년 이스라엘로 옮겨와 베덱항공을 설립해 비행기를 자체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자주 국방의 첫걸음이었다.
1959년 6일 전쟁 때는 프랑스 전투기를 복제해 이스라엘 기술로 만든 전투기들이 출격했다.
그 뒤 베덱항공은 이스라엘 항공우주산업(IAI)으로 확대되어
이스라엘을 위성 강국으로 만들었다.
이후 위성 산업은 미사일 방어 시스템 아이언돔을 탄생시켰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만든 영원한 청년, 시몬 페레스
시몬 페레스는 22세 때 다비드 벤구리온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해
얼추 70년 동안 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그 사이 장관만 10번을 했다.
총리도 70, 80, 90년대 한 차례씩 세 번을 지냈다.
그는 이스라엘을 군사적 강국으로 만들었으며,
군대에 컴퓨터와 위성을 도입해 현대전의 판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국가로 변신시켰다.
이어 이스라엘을 창업 국가로 만들었으며,
일생을 테러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아라파트와 오슬로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199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말년에는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92세까지 8년간 일했다.
93세에 젊은이들을 위해 쓴 회고록 탈고 일주일 뒤에 영면했다.
♠시몬 페레스, 각료 반대에도 원전 도입… 이스라엘 핵기술 보유국 만들었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47] 영원한 리더 시몬 페레스 [下]
시몬 페레스는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침공하기 위해
1955년 체코슬로바키아와 소련으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구입한 사실을 알았다.
무기 조달 책임자인 시몬은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
서방세계의 대이스라엘 무기 수출 금지에 맞서 필사적으로 군사 동맹국을 찾아 나섰다.
그는 당시 알제리와 전쟁 중인 프랑스를 눈여겨보았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지원하는 이집트와 반목 관계였기 때문에
서로 말이 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시몬은 혼자 프랑스로 날아가 집권당 인사들과 야당 대표를 만나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당시 프랑스는 서방세계의 대이스라엘 무기 수출 금지에 합의한 상태라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을 도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몬은 프랑스 수뇌부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비밀리에 프랑스 무기 구입에 성공했다.
이집트가 1956년 7월
프랑스와 영국이 관리하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전격 선언하고 점령해버려 전운이 감돌자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이집트와 2차 중동전쟁을 치러 승리했다.
시몬은 전쟁에서 이기는 게 능사가 아니라
전쟁을 원천적으로 막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절대적 군사 강국이 되어야 했다.
그는 어렵게 프랑스와 원자력 기술 도입 협상에 성공했다.
그러나 막상 이스라엘 각료들이 모두 이 계획이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며 반대해
예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시몬은 혼자서라도 원전을 짓겠다는 각오로
미국에서 공부할 때 쌓은 유대계 인맥들에게 호소하여 일단 건설 자금의 절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과학자들로 팀을 꾸려 일을 밀어붙여
마침내 이스라엘을 원전과 핵기술 보유국으로 만들었다.
1963년 민간자본으로 ‘시몬 페레스 네게브 원자력연구센터’라 불리는 원전을 완공했다.
원전은 강우량이 워낙 모자라 바닷물을 민물로 바꾸어 농사짓고 식수로 쓰는
해수 담수화 공장의 전력 공급원이 되었다.
그 뒤 외형적으로는 핵 보유 여부를 시인도 부인도 않는 ‘핵 모호성’을 유지하며
‘전쟁 억지력’을 확보했다.
시몬은 1963년 바이츠만 연구소가 만든 컴퓨터를 보자
이 놀라운 기계가 군대에 꼭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시몬은 며칠간 달라붙어 컴퓨터 기술자들로부터 작동법과 쓰임새에 대해 배웠다.
컴퓨터 도입에 대해 군부는 반대했다.
장군들은 도대체 컴퓨터로 무얼 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시몬은 컴퓨터를 처음에는 전투준비 향상하는 데 썼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첨단 무기체계를 개발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했다.
1973년 4차 중동전쟁이 끝나자
이제 재래식 무기는 현대전에 더 이상 합당치 않다는 사실을 군부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군에 중앙 컴퓨터 처리부대 ‘맘람’이 창설되었고,
정보부대 ‘8200′은 사이버 보안부대로 특화되었다.
그리고 1979년 영재들을 모아 IT 장교로 탈바꿈시키는 ‘탈피오트’가 창설됐다.
이후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위성들로 운용되는 드론과 무인항공기
그리고 미사일 방어시스템 ‘아이언돔’이 이스라엘 군의 주력 무기체계가 되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스타트업들은 주로 IT와 방산 분야에 근무했던 군인들이
전역 후 창업한 사례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군대의 수준 높은 IT와 방산 기술이 이스라엘 하이테크 산업의 원천이다.
1948년에 건국된 이스라엘은
탄생 자체가 집단농장(키부츠) 중심의 사회주의 국가로 출발했다.
유대인은 고대로부터 ‘능력껏 벌어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쓴다’는 사상을 갖고 살았다.
이는 2000년 이상의 디아스포라 방랑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한 공동체의 생활 수칙이었다.
이러한 사상을 이어받아 설립된 이스라엘의 키부츠는
생산시설의 공유와 배급 생활로 이루어졌다. 공산주의 방식에 가까웠다.
정부 역시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주도자이자 통화정책 결정자였다.
1980년대 들어 세계화 물결 속에 글로벌 경제에 편입되자
더 이상 계획경제가 먹혀들지 않았다.
시몬이 총리가 되던 해인 1984년 인플레이션이 무려 400%까지 치솟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경제 체제와 체질을 전면 개혁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선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가 대규모 차관을 이끌어냈다.
이후 사회주의에 자본주의를 접목시키기 위해 시장경제를 도입해
대규모 구조조정 계획을 수립했다.
특히 노동당 당수인 시몬은 자신의 지지 기반인 노동자들에게
임금 동결 등 큰 고통 분담을 요구했다.
노사 양측의 반발이 컸다.
시몬은 노동조합, 고용주연합, 경제학자들과 재무장관을 불러 모아
‘노사정 위원회’를 만들어 협상을 계속했다.
시몬은 정부가 먼저 뼈를 깎는 솔선수범을 보여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해 ‘24시간 끝장 토론’으로 각 부처 예산을 삭감한
‘경제 회생계획’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물러서지 않았다.
시몬은 이들과 2주간 협상 끝에 마침내 노사정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후 1985년 말 인플레이션은 기적처럼 1.5%로 떨어졌다.
지도자의 집념과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
역사적 업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인구 934만, 경상도 크기의, 석유도 자원도 거의 없는 나라다.
그러기에 눈을 밖으로 돌려 세계 시장을 겨냥한 창업이 매우 중요했다.
시몬은 이스라엘을 창업 천국으로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군대의 IT와 방산 기술을 활용해 특유의 ‘군산학’ 연계 모델을 만들어냈다.
그 뒤 시몬은 이스라엘에 벤처 캐피털 제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1992년 외무장관 시절
주요국들을 방문하여 투자 유치 특히 벤처투자 유치에 열을 올려
세계 유명 벤처펀드들이 이스라엘에 사무소를 열기 시작했다.
이듬해 정부의 창업지원 프로그램 ‘요즈마 펀드’가 만들어졌다.
이른바 ‘Fund of funds’(모태펀드)다.
요즈마 펀드가 외국 벤처펀드들에 투자하고
이들이 이스라엘 벤처기업들에 투자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실질적인 투자 금액을 10배 이상으로 늘렸다.
이로써 벤처 캐피털 황무지였던 이스라엘에 벤처 캐피털 혁명을 일으켰다.
정부는 ‘청년들이여 도전하라, 책임은 정부가 진다’는 자세로 창업을 지원했다.
2007년 대통령에 선출된 시몬은 재임 8년 동안
젊은이들에게 창의와 상상력을 갖고 창업에 도전하도록 꿈을 심어주었다.
그 결과 대학 졸업생 40%가 창업에 도전해 1인당 창업 비율이 세계 1위이다.
7000개가 넘는 스타트업이 활동 중이며 기업가치 1조원이 넘는 유니콘만 30개다.
글로벌 대기업 400여 개사의 R&D센터가 들어와 스타트업을 사냥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스타트업 100여 개가 나스닥에 상장되어 미국, 중국에 이어 3위이다.
글로벌 대기업 하나 없이 1인당 GDP가 5만5000달러(IMF 2022)가 넘는 강소국이 되었다.
시몬은 “인생의 참된 교훈은,
삶은 너무나 짧기 때문에 비관주의나 환멸이나 분노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생은 그처럼 짧은 것이니 그것을 가시로 보지 말고 꽃인 양 바라보라.
거기에는 맛과 향기와 형태가 있다.
나는 삶이 언제나 나를 혹독하게 다룬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감사할 뿐 불평하지 않는다”
는 말을 남겼다.
그는 많은 위대한 업적들을 남겼음에도
“유일하게 후회하는 것은 더 큰 꿈을 꾸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년에 회고했다.
아라파트와 오슬로 평화협정을 체결하다
1993년 당시 이스라엘 외무장관이었던 시몬 페레스는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악관 경내에서 ‘팔레스타인 잠정 자치 확대에 관한 원칙 선언’에 서명했다.
서명식에는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
왼쪽 두 번째는 이츠하크 라빈 당시 이스라엘 총리가 함께했다.
강경 매파였던 시몬 페레스가 핵기술을 보유한 이후 궁극적으로 원한 것은 평화였다.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를 포함한 아랍권과의 협상을 통해
영구히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이었다.
시몬은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1993년 오슬로 협정을 이끌어내어 평화를 정착시키고
이듬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국내 극우파에 의해 라빈 총리가 암살당하고
시몬 역시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은 비록 극우파에 의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포함한 아랍권이 다시 적대관계로 바뀌었지만,
중동 지역의 영원한 평화를 추구했던 시몬 페레스의 정신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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