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장강명]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

colorprom 2022. 9. 27. 17:59

[장강명의 사는 게 뭐길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

 

에피스테메, 시좌… ‘평론가 단어’에 대한 반감 이해는 하지만
‘사흘’ ‘심심(甚深)’ 같은 개념어까지 논란이 되는 현실은 절망스러워
길고 어려운 글 읽기 위해 문해력 키우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지키는 것

 

입력 2022.09.27 03:00
 
 

문예지를 처음 펼쳤을 때는 주눅이 들었다.

평론가들의 글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에피스테메, 시좌(視座) 같은 단어는 어찌어찌 검색해가며 해독했다.

하지만 ‘여기―우리’라든가 ‘(비)존재’처럼

일반적이지 않은, 사전에 없는 표현을 맞닥뜨리면 당혹스러웠다.

그런 단어를 쓰는 이와 읽는 이 모두 너무 똑똑하고 학식이 풍부해 보였다.

 

지금은 문예지를 읽으며 움츠러들지는 않는다. 가끔은 콧방귀를 뀌기도 한다.

그사이 나도 식견이 늘었고, ‘업계 용어, 업계 유행어’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한 개념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어렵더라도 꼭 맞는 단어를 사용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저 똑똑하고 학식이 풍부해 보이기 위해 불필요한 표현을 동원하는 필자도 있다.

 

그림=이철원

그런 허세 한둘을 간파하게 되자 허탈하기도 하고, 화도 났다.

가소롭기도 하고 같잖기도 했다.

뭐야, 이 녀석들. 별것도 아닌 얘기로 잘난 척하고 있었네.

난 또 왜 바보처럼 그 앞에서 몸 사리고 눈치를 봤던 거람.

억울하기도 하고 ‘먹물들’의 세상 전반에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이 자식들 다 사기꾼 아냐?

 

그런 감정이 반엘리트주의, 더 나아가 반지성주의까지 발전할 수도 있었을까.

하지만 나 역시 먹물이었고, 신문사를 다니면서

쉬운 글이 좋은 글이니 무조건 쉽게 쓰라’는 요구의 한계와 위험성에 대해

내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었다.

무엇보다 위에서 말한 주눅을 완전히 극복했다.

허수아비를 상대로 오래 화를 낼 수는 없다.

 

‘명징’과 ‘직조’가 소셜미디어에서 논란이 됐을 때

비판의 표적은 그 단어를 사용한 평론가 한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는, 어려운 말을 쓰는 사람들’ 전체에 대한 반감이 분출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정작 평론가들의 업계에서 명징과 직조가 현학이라기보다는 상투어에 가깝다는 사실은

희극적이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했다.

 

‘사흘’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을 때에는 그냥 절망스러웠다.

 

어려운 단어들은 몰려다니는 경향이 있다.

명징은 직조와 붙어 있을 확률이 크고,

에피스테메와 시좌는 같은 책에 실릴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

사흘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이는 민주주의를 얼마나 이해할까.

민주주의는 복잡한 개념인데. 깊이 이해하려면 어려운 설명을 읽어야 하는데.

 

그래서, 한자 교육이 해법인가?

심할 심(甚), 깊을 심(深)을 알면 ‘심심한 사과’를 오해하지 않을 테니?

한데 요즘 최신 지식은 영 단어에 담겨 오는 것 같지 않은가.

 

지식의 바다에서 잡아야 할 물고기는 너무 많고, 끝없이 늘어난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게 최선이다.

그렇다면 물고기는 왜 잡아야 하나.

문해력을 키워 어려운 글을 읽어야 하는가.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페터 비에리지식을 익혀야 하는 이유에 대해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불빛이 반짝거리는 곳으로 무작정 홀릴 위험이 적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이익 추구의 도구로 이용하려고 할 때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의 교양 수업』, 14쪽)

 

우리는 문명사회에서 산다. 문명은 지식의 구조물이다.

부동산 매매 계약서, 멋진 자동차, 향기로운 커피 아래 민법, 기계공학, 국제 교역처럼

글자로 적은 긴 매뉴얼이 있다.

그 아래에는 헌법, 물리학, 자본주의 같은 더 거대한 매뉴얼이 있다.

문명을 누리고 싶다면 그 매뉴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사용 설명서를 아는 사람이 당연히 더 잘 사용한다.

 

사용 설명서를 모르면 딱 그만큼 남에게 운명을 맡겨야 한다.

다행히 사람들이 서로 믿고 의지하게끔 규약을 정하는 방법까지

누군가 매뉴얼로 만들어주긴 했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선동가, 사이비 종교 교주, 자기가 아는 것 이상으로 멋지게 보이고픈

문학평론가가 존재한다.

 

그들의 도구가 되지 않으려면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긴 글을 읽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개념어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인기를 모으는 재치 있는 신조어에 같은 가치가 담겼다고 할 순 없다.

지식의 구조에서 두 단어가 자리 잡은 위치가 다르다.

가진 힘도 차이 난다.

 

그러니 개념어를 모르는 것과 신조어를 모르는 것이 마찬가지라고,

상대의 단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면 된다고 말하기 어렵다.

듣기는 좋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