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국내 증시의 시한폭탄, 국민연금
주식시장 대들보였던 국민연금, 코로나 이후 애물단지로 전락
국내 주식 비율 줄여야 한다면 빈자리 메꿀 대안 마련해야
“관심 없어요.” “계속 해외 투자나 늘리라고 하세요.”
국민연금이 올해 상반기에 역대 최악인 77조원 손실을 기록했다는 성적표가 공개된
지난 8월 말
“어떻게 하면 수익률을 끌어올릴 수 있겠느냐”고 묻는 기자에게
증시 전문가들의 반응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물으니
“국민연금이 먼저 한국 주식시장을 버려놓고 이제 와서 무슨 아쉬운 소리냐.
자업자득이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코로나 사태가 터진 2020년 3월 1400선까지 떨어졌던 코스피지수가
2021년 1월 3000선을 뚫고 올라가는 국면에서
국민연금이 주식을 대량으로 매각해 상승세에 찬물을 끼얹은 일을 꼬집은 말이다.
국민연금이 주축인 연기금은 2020년 12월 24일부터 2021년 3월 12일까지 코스피 시장에서
51거래일이라는 역대 최장 기간 연속 순매도(판 것이 산 것보다 많음) 기록을 세웠다.
작년 1월 파죽지세로 3100선과 3200선을 돌파했던 코스피지수는
연기금의 팔자 공세에 막혀 상승 동력을 잃고 연말에 3000선 밑으로 떨어졌다.
연기금이 팔아치운 금액(순매도액)은 2020년 2조8134억원으로 사상 최고치였는데,
2021년엔 전년의 8.5배인 24조1438억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연기금은 올 들어서도 추석 연휴 전까지 1조1513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순매도 기간이나 규모 모두 전례 없는 것이다.
1988년 국민연금 제도를 도입한 이후 적게는 수천억원부터 많게는 거의 10조원까지
매년 국내 주식을 쓸어 담으며 증시를 떠받치는 ‘큰손’이었던 국민연금이
최근 3년간은 증시 훼방꾼으로 돌변한 것이다.
증권가에서 “국민연금이 아니라 민폐연금”이라거나
“주식시장의 애물단지”라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국민연금과 증권가 사이에 깊게 팬 골은 오래갈 가능성이 높다.
국민연금은 올해 발표한 ‘2023∼2027년 국민연금 기금 운용 중기 자산 배분안’을 통해
지난 5월 말 16.7%였던 국내 주식 비율을 순차적으로 줄여 2027년까지 14%로 축소하겠다
고 밝혔다.
같은 기간 해외 주식 비율은 26.9%에서 40.3%까지 늘린다.
현재 약 900조원에 달하는 국민연금 자산이 늘어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단순 계산하면
향후 5년간 국내 주식을 24조원가량 더 팔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국민연금 측도 국내 주식 비율을 줄이고 해외 투자를 늘리는 데 대해 할 말이 있다.
설립 이후 수익률이 해외 주식은 연평균 14.05%였는데, 국내 주식은 8.71%로 더 낮다.
특히 지난해 수익률은 국내 주식 6.73%, 해외 주식 29.48%로 큰 차이가 났다.
수익률 극대화를 위해 해외 투자 확대가 당연하다는 것이다.
국내 주식 축소에는
저출산 고령화 때문에 국민연금 고갈 시기가 빨라지는 것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유도 있다.
지금은 국민연금 보험료 수입이 지출을 초과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만,
이르면 2030년부터 연금 재정이 적자로 돌아서면
보유 중인 자산을 팔아서 연금을 지급해야 한다.
이때 주식시장이 받을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미리 주식 투자 비율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의 노후 안전판인 국민연금을
안정적이면서도 높은 수익성을 유지하도록 운용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다만 걱정스러운 점은 국내 증시에서 대들보 역할을 해온 국민연금의 빈자리를
누가 메꿀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증시의 3대 투자 주체는 개인과 외국인, 기관인데,
우리나라의 개인과 외국인 비율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다.
결국 다른 기관투자자를 육성하지 않을 경우 국민연금은
한국 증시를 큰 충격에 빠뜨릴 시한폭탄으로 남을 것이다.
♠[태평로] 국민연금 개혁, 몸을 던질 사람이 있는가
국민연금 개혁하겠다는 대통령 “초당적 국민 합의 도출 바란다”
누가, 언제, 어떻게 설명은 없어…일하는 사람도, 절박감도 안 보여
국민연금을 만든 건 전두환 정권이었다. 정작 대통령은 뜻이 없었다.
서상목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원장 시절
국민연금 안(案)을 대통령한테 보고했다가 ‘나라 망하게 하려느냐’는 질책만 듣고 물러섰다고 한다.
장기적으로 국민 모두에 이익이 된다 해도,
돈 받을 날은 요원한데 당장 자기 주머니에서 납부금을 떼가는 연금 제도가
정치적으로는 큰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관료들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건강보험이 본궤도에 오른 상황에서 복지국가로 가는 또 다른 한 축인 국민연금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10여 년 전 국민연금 제도를 기안했다가 석유 파동 때문에 접어야 했던
김만제 당시 경제부총리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1986년 유럽 순방 후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대통령에게 국민연금 안을 또 다시 내민 것이다.
취임 후 6년이 지나고서야 유럽 주요국을 순방하며 정통성을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들떠 있던 전 대통령은 “참 질긴 사람들”이라고 웃으며 결재했다.
적립금 910조원이 넘는 세계 유수의 연금은 이렇게 시작됐다.
처음 ‘세금 더 받아내려는 수작’ ‘결국 파산할 것’이라던 부정적 인식은 이제
‘이 좋은 제도를 왜 반대했을까’로 바뀌었다.
정부 관료의 전문성과 치밀한 준비, 반드시 이뤄내겠다는 집념, 리더의 결단이 바탕에 있었다.
지금은 위기에 처한 국민연금을 구해내야 한다.
처음 입안 때 소득 대비 15%까지 올려야 한다고 봤던 보험료는
1998년 9%까지 오른 후 24년째 손도 못 대고 있다.
이대로 34년이 가면 기금이 소진되고,
70년이 지나면 누적 적자가 2경2650조원이 될 거라는 전망이 나오지만,
어떤 정치인, 관료도 인기 없는 일에 총대를 메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는 교육·노동·연금을 3대 개혁 과제로 꺼내들었다.
그러나 교육 개혁은 아무 준비 없이 ‘만 5세 입학’을 던졌다가 사달이 났고,
노동 개혁은 전 정권이 망쳐놓은 원칙을 바로잡겠다는 당위 외에 별로 보이는 게 없다.
휴가를 다녀온 후 오직 국민만 보고 일하겠다며 심기일전을 다짐한 윤 대통령이
지난 19일 연금 개혁 보고를 받은 후 어떤 말을 할지 주목됐다.
윤 대통령은 이날 “(국회에서) 초당적·초정파적 국민 합의를 도출하기 바란다”고 했다.
국민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연금 문제에서
누가, 어떻게 합의하고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게 됐다.
권력투쟁으로 분란에 빠져 있는 여당이? 윤핵관이? 몸 던져 일할 것 같지 않은 장관들이?
목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 식물 같은 대통령의 스태프들이?
국민연금 개혁안을 4가지나 만들어 국회에 던져버린 후 돌아보지도 않았던 문재인 정부 때와
뭐가 다를 것인지 모르겠다는 비판도 나온다.
절박감, 의지, 방법론이 대통령의 말에서도, 각료들의 말에서도 읽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여권에서는 여소야대에, 지지율 30%도 안 되는 정권이 뭘 할 수 있겠느냐는 푸념도 나온다.
그러나 지지율이 낮아서 일을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일을 못해 지지율이 낮은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국민연금 개혁안이 국회 특위에 상정된 후,
정부가 어떤 근거를 제시해 국민과 야당을 설득하고,
여당이 어떤 정치력을 보여주는지에서 이 정권 실력이 드러날 것이다.
국민만 보고 일하겠다고 한 대통령이 ‘정말 나를 바라보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해주고,
‘정치적 안배 없이 일 잘하는 사람을 쓰겠다’며 기용한 사람들이 정말 몸 던져 일하는 모습을
국민들은 갈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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