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고세진 서울유니온교회 담임목사, 성경고고학자

colorprom 2022. 7. 12. 13:26

 

 

①/③“다윗에게서 배워라”…

성경고고학자가 본 한국 정치 5가지 문제점

 

[김기훈의 天地人] 고세진 서울유니온교회 담임목사 ①/③

 

입력 2022.07.06 13:49
 
 
이스라엘 다윗 왕은 3000년전에 이스라엘 역사의 최전성기를 만들었다.
한국 정치인들은 다윗의 리더십을 배울만 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사진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절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다윗 왕.

 

그는 목사이자 성경고고학자이다.

이스라엘과 인근 지역의 고대 유물을 직접 발굴하고 연구하며 성경의 말씀을 되새긴다.

남들이 성경 문구 해독에 매달릴 때 그는 역사적 유물도 조사해

보다 객관적이고 입체적인 해석에 주력한다.

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살과 피가 담긴 역사 이야기”라고 말한다.

 

성경고고학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을까?

지금 한국 사회에 가장 시사점을 주는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이스라엘의 옛 이야기에서 한국의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얻기 위해

성경고고학자인 고세진 서울유니온교회 담임목사를 찾았다.

 

인터뷰는 지난 6월 27일 오후 2시 30분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30

한국기독교연합회관 8층 807호의 서울유니온교회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필자가 먼저 도착해 기다리니,

고 목사가 푸른색 양복과 빨간 넥타이 차림에 빨간 백팩을 매고 나타났다.

북쪽 유리창 너머에 장마비를 가득 머금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한국 1호 근동고고학 박사

 

—기독교와의 인연은?

“어렸을 때 어머니의 영향으로 교회를 다녔다.

그리고 고교 시절에 교회의 청소년 담당 목사님이 신학대학을 가라고 강하게 권유해

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신학을 공부하다 보니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스라엘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스라엘 예루살렘대학(Jerusalem University College)으로 가서

히브리어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고고학 과목을 몇과목 듣다가 빠져들었다.

고고학을 전공하겠다고 결심한 뒤 미국 시카고대학교 고고학과에서

이스라엘과 인근 지역을 연구하는 근동고고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 목사우리나라 제 1호 근동고고학 박사이며,

동아시아 사람으로는 시카고대학교에서 최초로 고고학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시카고대학은 고고학 분야에서 어느 정도 수준인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특히 근동과 아프리카 고고학 분야에서 그렇다.”

 

미국 시카고대학교 캠퍼스 일부의 모습./위키피디아

—오랫 동안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한 것 같다.

“39살 때까지는 군 복무를 제외하면 공부만 했다.

한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나오고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10년 동안 유학을 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에는 대학에서 강의하고,

성지인 이스라엘, 요르단, 에티오피아 고고학 현장에서 발굴 작업을 했다.

대학의 경영에도 참여해 이스라엘 예루살렘 대학과 한국 아신대학교에서 총장으로 봉사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대학에서 총장을 지냈다는 말이 특이하게 들린다. 어떤 학교인가?

“미국인들이 1956년에 예루살렘에 세운 대학이다.

이스라엘이 1948년에 독립하고 어수선할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던 미국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 한복판에 이스라엘의 역사학과 지리학과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교를 세웠다.

그래서 이 학교는 신학대학은 아닌데,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나, 지리, 고고학, 히브리어 같은 학문을 배우기 위해 입학한다.

예루살렘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양 국가들이 세운 대학들이 있다.”

 

이스라엘 예수살렘의 시온산 자락에 있는 예루살렘대학 캠퍼스./위키피디아

—서울유니온교회 담임목사를 맡게 된 계기는?

“미국 고든콘웰 신학대학원에서 고고학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코로나 상황이 되면서 학교들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그 와중에 서울유니온교회(Seoul Union Church)에서 담임목사로 초빙했다.

이 교회는 1885년 6월에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워 137년이 된 한반도 최초의 교회이다.

그 의미가 깊어서 수락을 했고, 지금 이 교회를 섬기고 있다.

 

이 교회는 시작할 때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등

해외에서 온 선교사들의 신앙 모임이었기 때문에

그 전통을 따라 지금도 설교와 행정과 상담 등 모든 것을 영어로 한다.

내 나라에서 남의 나라 말로 설교하는 셈이다.”

 

성경고고학 전공 40년

인터뷰 주제인 성경고고학에 대해 본격적인 질문을 시작했다.

 

—고고학과 인연을 맺은지 얼마나 됐나?

“1982년 이스라엘에서 유학할 때 고고학 수업을 들으며

길로(Gilo,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유적)에서 발굴한 것부터 따지면 벌써 40년이나 됐다.”

 

—성경고고학이라는 단어를 처음 듣는 독자도 많을 것 같다. 간단히 소개하면?

“근동에서 고고학이 처음 시작될 때에는

성서고고학 또는 성경고고학(Biblical Archaeology)이라고 했다.

19세기에 태동하여 20세기를 거치면서 확립된 학문이다.

 

처음에는 성경을 연구하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양의 학자들이 주도해

성경에 기록된 사항들을 성경이 기록되었던 땅에서 물증을 찾아 증명하려고 시작했다.

그래서 성경고고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고고학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단순히 어떤 사건의 물증을 찾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배계급이 아닌 일반서민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기후는 어떻게 변화했는지, 어떠한 식물들을 경작하고 어떤 동물들을 가축화했는지,

바다에서는 무엇을 채취했는지, 무슨 무역을 했는지 등

사람들의 삶 전체를 연구과제로 삼게 됐다.

 

그래서 30년 전부터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성경고고학이라는 말 대신에

근동고고학(Near Eastern Archaeology)이라는 용어를 쓰자고 해서

현재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성경고고학 또는 성서고고학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학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 용어의 정당성을 변호하면서

여전히 성경과 이스라엘 고고학 사이의 연관성을 연구하고 있다.”

 

성경고고학의 주요 연구 대상인 이스라엘과 인근 근동 지역.

—시간과 공간 상으로 볼 때 고 목사의 연구 범위는?

“시간대로 보면 근동의 청동기 시대에서 로마시대까지이고,

공간으로 보면 근동(近東) 지역인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란, 터키 일대이다.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도 포함된다.”

 

신학자 vs 성경고고학자

 

—신학자와 성경고고학자는 어떤 차이가 있나?

“둘 사이에는 넓은 간극이 있다.

둘 다 성경을 연구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방법론에서 큰 차이가 있다.”

 

—어떤 차이인가?

“신학자는 성경에서 학문적 이론(理論)을 추구한다.

신학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이론을 정립한다.

예를 들면, 성경은 신에 대해서 무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를 파악한다.

이것을 신론(神論)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누구인가를 찾는 그리스도론,

하나님의 신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성령론,

인간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인간론,

교회는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교회론, 이런 것들을 연구한다.

교회를 건전하게 유지하고 신자들의 삶을 안내하려면 이러한 연구가 필요하다.”

 

오랜 기독교 전통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바티칸.
카톨릭 본부가 있는 이 바티칸의 베드로 광장에서 관광객들이 건축물을 관람하고 있다./위키피디아

 

—성경고고학자는?

“성경을 연구하되, 역사학과 지리학의 관점(historical and geographical view)에서

성경의 사실들과 사건들을 추적한다.

 

고고학 현장에서 성경의 어떤 기록들이 사실인지 물증을 찾거나,

성경에 어떤 사건이나 내용이 스케치처럼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전모를 알 수 없는 사항은 전체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또한 고대 역사기술의 방법이 현대와 같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이 진실이지만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울 때에는

고고학적 자료들을 사용해 역사적인 연대나 일의 흐름을 파악하기도 한다.

 

성경을 연구하되 성경 본문의 역사적 지리적 현실,

또는 성경 속 등장인물이 활동하던 삶의 전모와 현장을 알려고 노력한다.”

 

—고고학자라고 하면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것처럼

유물을 발굴하고 찾아 다니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주로 어떤 발굴 작업에 참여했나?

 

“내가 한 발굴이나 탐사는 이스라엘에 몰려 있다.

예루살렘의 힌놈 골짜기(로마 시대),

예루살렘 북쪽 근처에 있는 길로(철기 시대)와 라맡 라헬(페르시아와 로마 시대),

예루살렘 서쪽으로는 하르 투브(청동기 시대), 팀나(철기 시대),

갈릴리 근처의 벹샨(청동기 시대), 레호브(철기 시대), 야쿠시(청동기 시대),

그리고 지중해 해변의 텔 도르(로마 시대) 발굴을 꼽을 수 있다.

 

또 요르단과 에티오피아에서도 작업을 했다.

요르단에서는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났던 곳이라는 마하나님 지표조사를 했고,

2012년부터는 에티오피아의 북쪽에 있는 악숨(Aksum)에서

‘시바의 여왕 땅’을 연구하고 있다.”

시바 여왕의 초상이 새겨진 돌판(왼쪽).
에티오피아 악숨에 있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른쪽 사진은 젊은 에티오피아 여인의 옆 얼굴. 돌판의 얼굴과 많이 비슷해 보인다./고세진

 

—구체적인 성과가 있다면?

 

“고고학은 한두 해에 큰 성과가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꾸준히 해야 한다.

꾸준히 발굴 작업을 해왔다는 것이 성과라면 성과이다.

세계가 놀랄 결과를 내는 발굴은 드물다.

 

나는 발굴 과정에서 청동기 시대에 가나안 땅 사람들이 어떤 가옥에서 살았고,

어떤 그릇들을 사용했고, 무슨 음식을 먹었으며, 어떤 지역들이 서로 교류했는지를 알아냈다.

 

철기 시대 발굴에서는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연관, 즉 아합 왕이 통치하던 시대의 이스라엘은

레바논과 어떤 물적 교류가 있었는지를 알게 하는 단서들을 얻었다.”

 

—세계를 놀라게 하는 발굴은 언제 나타나나?

 

“끈질긴 노력과 끊임없는 발굴에서 드물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이집트 투탄카문(투탄카멘) 왕의 무덤은

영국인 하워드 카터가 6년을 탐사하여 찾아내고 7년을 발굴해서 빛을 봤다.

이스라엘에서는 헤롯 대왕의 무덤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으나,

에후드 네쩌르 교수가 35년 동안의 끈질긴 탐사 끝에 발견해서 발굴이 시작됐다.

그 덕에 헤롯대왕의 무덤이 햇빛을 보게 됐다.

 

나는 에티오피아의 시바의 여왕 유적지 악숨 발굴 단장을 맡고 있는데,

앞으로 에티오피아서 어떤 놀라운 결과가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런 결과가 없다고 해도

고고학은 과거 인류의 삶을 조명하는 자료들을 풍부히 토해 낸다.

그게 성과이다.”

 

이집트 투탄카문 왕의 무덤에서 나온 황금 마스크.
기원전 1332년부터 기원전 1323년까지 집권했다./위키피디아

 

이스라엘 전성기 만든 다윗

성경고고학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들었다.

성경고고학 중에서 우리 사회에 시사점을 던져 줄 에피소드로 넘어갈 차례이다.

 

—성경에는 수많은 인물과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가운데 현대 한국 사회에 가장 시사점을 주는 인물을 꼽는다면?

 

다윗 왕이다.”

 

다윗 왕의 이름이 처음 발견된 비석. 기원전 870년~기원전 750년 사이에 제작된 유물이다.

—왜 그런가?

“약소국이었던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든 리더십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약소국이었던 이스라엘은 다윗 시절에 가장 번성했다. 이후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통치하다가 죽자 분열되어 망했다. 이 번성과 쇠락, 멸망의 과정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

고 목사가 말을 이어갔다.

“기원전 2000년대 후반에서 로마시대까지 고대 근동세계에서 이스라엘은 약소국 중에서도 약소국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살다가 기원전 14세기 경에 이집트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왔다. 가나안은 지금의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위치한 곳이다. 당시 거기에는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이들 현지 가나안 민족들과 극심한 갈등을 겪으면서 투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13세기에는 발달된 철기문명으로 무장한 해양 민족들이 그리스 쪽에서 이주해 와서 정착하면서 이스라엘 민족과 경쟁했다. 블레셋이라는 민족은 그런 해양 민족들 중의 하나였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의 작은 땅으로 이주한 뒤 토착 민족들을 제압하는 실력을 보여줬으나 블레셋에게는 밀리는 상황에 내몰렸다. 이 때 다윗이라는 왕이 나타나서 전투에서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죽이고 블레셋을 제압했다.”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의 목을 베어 높이 쳐든 다윗 왕./조세핀 폴라드(1899년)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나?

“매우 영특한 왕이었다. 기원전 1010년부터 기원전 970년까지 40년간 통치를 했는데 강대한 나라를 이룩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이 어느 정도 과장된 면이 있다고 해도 그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국토를 이룬 것은 사실이다.”

—어떻게 그런 대업을 성취했나?

“세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 다윗이 정치 무대에 등장했을 때 주변 강대국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힘이 약해져 있었기에 이스라엘이 외부로 힘을 뻗칠 수가 있었다.

둘째, 다윗은 남북으로 갈라졌던 백성의 마음을 순화시켜 하나로 만들었다.

셋째, 자신의 기반을 든든하게 하기 위해서 수도를 남쪽 헤브론에서 북쪽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전진배치 시킨 다음에 이를 기반으로 국토팽창 정책을 수행했다.”

세가지 요인에 대해 하나씩 물어보기로 했다.

다윗 리더십의 성공 비결 ①

: 주변국 약화를 이용하다

—먼저, 다윗이 왕이 됐을 때 주변 국가 상황은 어땠나?

“남쪽의 이집트는 국토의 크기, 경제력, 국민의 수에서 모두 이스라엘보다 월등히 컸다. 북쪽에는 현재의 터키 지역에 히타이트가 있었는데 이스라엘보다 수백 배 컸다. 지금 이라크가 위치한 동북쪽에는 아시리아와 바빌론 두 나라가 있었는데, 국력, 국토 크기, 경제, 국민 수 등 모든 면에서 이스라엘보다 수백배였다.

서쪽으로는 지중해 바다가, 동쪽으로는 아라비아 사막이 있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었다. 주변국 중에 아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사이에 중간 크기의 시리아가 있었다. 지금의 시리아와 같은 명칭을 쓴 국가이다. 그 시리아도 이스라엘보다 몇배나 강했다.”

이스라엘은 다윗 왕 시절에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었다./고세진

—이런 강대국들이 이스라엘의 번영을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묘하게도 다윗이 재임한 기원전 1010~ 기원전 970년 동안에 주변에 있던 이집트, 히타이트, 아시리아, 바빌론 등 전통적 강대국 뿐 아니라 시리아까지 자국의 국내 문제들 때문에 외국으로 전쟁을 하러 나갈 수 없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매우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은 이러한 국제정세를 잘 읽고 활발한 정복 전쟁을 벌여 영토를 확장했다. 역사학자들은 호랑이들이 잠자는 시대에 고양이가 활동했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다윗 리더십의 성공 비결 ②

: 백성 마음을 순화시키다

—두번째 요인으로 다윗의 뛰어난 내정 리더십을 꼽았는데, 어떻게 했나?

“당시 이스라엘은 제사장이 다스리는 신정에서 왕이 다스리는 왕정으로 바뀌는 시대였다. 첫 왕이 사울이었다. 이 사울이 죽고나서 다윗이 등장했다. 다윗이 정권을 잡은 뒤에 백성들 간에 마음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사울 왕을 따르던 사람들은 다윗 왕을 싫어했다. 그 때 다윗이 백성들의 마음을 순화시켰다. 백성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고 안심시켰다.”

—예를 들면?

“사울 왕이 전쟁에 나가서 블레셋 군대와 싸우다가 전사를 했다. 적군에게 몰리니까 도망을 가다가 막판에 적의 포위망을 뚫을 수 없게 되자 자살을 했다. 이스라엘 군인 한 명이 그 현장을 보고는 다윗 왕에게 와서 자신이 사울 왕을 죽였다고 했다. 사울 왕에게 고난을 당했던 다윗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면 공을 세웠으니 상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윗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네가 어찌 자기 나라의 왕을 함부로 죽일 수 있느냐’며 그를 처형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했으나, 다윗은 사울 왕 사후에 그의 가족과 친인척을 포용하는 정책을 썼다./호세 레오나르도(1640년대)

—백성들의 반응은?

“다윗이 사울 왕을 미워하기는 했지만, 그 정적이 죽었다고 할 때 기뻐하지 않고 그 정적을 죽인 사람을 처형한 것에 대해 백성들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 왕은 복수심이나 악랄한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사울 왕을 따르던 사람들 일부가 다윗을 추종하게 됐다.

다윗은 한발 더 나갔다. 사울 왕 가문에 있던 사람을 하나도 불리하게 하거나 처벌하지 않고 편안하게 했다. 사울의 아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주고 신분상의 안전을 확보해 줬다. 백성들이 이것을 보고서 다윗에게 좋은 감정을 갖게 됐다. 결국에는 국민들의 마음 전체가 다윗에게 모아졌다. 그래서 다윗이 이스라엘 민족을 통솔할 수 있게 됐다.”

다윗 리더십의 성공 비결 ③

: 수도를 북쪽으로 옮기다

—세번째 요인은?

“다윗은 정권을 쥔 뒤 헤브론에서 7년간 정치를 했다. 그런데 이 도시가 남쪽에 치우쳐 있다. 이에 반해 당시 이스라엘은 국토를 확장하기 위해 북방정책을 쓰고 있었다. 국토를 확장하려면 북쪽으로 가는 것이 좋았다.

남쪽의 네게브 지역은 메마르고 1년에 비가 100mm도 오지 않았으며 지형도 험했다. 거기서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시나이 반도가 있는데, 시나이 반도도 쓸모 없는 땅이었다. 당시의 기술로는 개간할 수 없었다. 서쪽에는 지중해, 동쪽에는 광활한 아라비아 사막이 있었으니 이스라엘의 국토확장 방향은 결국 북쪽 뿐이었다.”

—다윗이 어떤 결단을 내렸나?

“수도를 북쪽으로 전진배치했다. 국토의 중간쯤 되는 예루살렘 땅을 전쟁으로 확보했다. 당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가나안 족속의 일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곳을 정복해서 이스라엘 땅으로 편입해서 수도로 만들었다.

헤브론에는 정치 지도자, 즉 장로들이 있었는데, 지금의 원로원과 같은 곳이다. 다윗이 이스라엘 땅이 아닌 예루살렘을 자기 능력으로 빼앗아 수도를 건설하니, 이후 다윗의 국토확장 정책에 딴지를 거는 장로들이 없었다. 국민적인 힘이 모아졌고 국가정책이 원활하게 수행될 수 있었기에 당시에 매우 강력한 정책을 써서 국토를 확장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예루살렘은 세계 최고 유명도시가 됐고, 다윗은 여러 약점에도 불구하고 성군(聖君)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15 초 후 SKIP
다윗 왕은 국토 확장을 위한 북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수도를 북쪽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사진은 예루살렘 모습.

—어느 정도 영토를 확장했나?

“북쪽의 유프라테스 강에서부터 남쪽의 이집트 입구까지 확장했다.”

—다윗 이전에 비해보면 얼마나 넓어졌나?

“땅이 10배 이상 커졌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준다고 선포한 땅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다. 기원전 14세기에 모세의 뒤를 이은 국가 통수권자였던 여호수아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했다는 땅이다. 구약성경 여호수아서 1장 3절과 4절에 나와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이 야망을 다윗이 주변국을 침공해 이뤘다. 그의 이전에 누구도 못했고, 지금도 이스라엘이 해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 현대 이스라엘은 조상이 꿈꾸고 이뤘던 영토의 10분 1도 안되는 땅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다윗이 해외 원정을 많이 했는데, 여인 밧세바와 간통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든 것도 이러한 영토확장 전쟁 중에 벌어진 일이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 영토. 북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에, 남쪽으로는 이집트에 이른다. 보라색이 원래 영토이고, 주황색은 정복한 땅이다. 회색은 속국이며, 녹색은 동맹국이다.

왕국의 분열

—그 방대한 영토는 이후 어떻게 됐나?

“다윗이 40년 통치 기간 동안 확보한 영토는 그가 서거하고 아들 솔로몬 왕 때까지는 유지됐다. 솔로몬도 기원전 970년에서 기원전 930년까지 40년간 통치를 했다. 이 두 사람의 시대 80년간을 통일왕국 시대라고 부른다. 이스라엘 3000년 역사에서 가장 영광스런 시기였다. 하지만 솔로몬이 죽고 나서 나라가 두쪽으로 갈라지는 바람에 영토가 쪼그라졌다. 실지(失地)한 것이다. 이후 과거의 영광은 지금까지 살아나지 않고 있다.”

다윗 왕의 뒤를 이어 아들 솔로몬 왕이 이스라엘을 통치했으나, 솔로몬 왕의 사후에 이스라엘은 둘로 분열됐다. 사진은 노년의 솔로몬 왕을 그린 모습./구스타브 도레(1866)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사후를 예측해 미리 대비하지 않았나?

“솔로몬이 지혜로운 왕으로 세계 역사에 소문이 나 있지만, 역사를 냉철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그는 백성에게 세금을 너무 많이 부과했다. 또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해서 각종 건축사업을 일으켰다. 예를 들면 백성들을 동원해 예루살렘 성전과 자기의 왕궁, 지방에 있는 도시들과 요새들을 조성했다. 그러니 백성들의 불만이 가득했다.

왕은 재정적으로 풍족하니 호화롭게 살면서 보물도 모으고 외교 사절에게 잔치도 베풀었지만,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아버지 다윗의 후광 덕에 통치는 됐으나 국민들은 행복하지 못했다.”

—백성들의 요구사항은 무엇이었나?

“세금과 무료 부역을 줄여달라고 청원했다. 하지만 솔로몬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솔로몬의 통치 말기인 기원전 935년쯤에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하는 12개 부족 가운데 10개 부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누가 반란을 주도했나?

“반란군의 민심을 이끈 사람은 솔로몬이 임명했던 강제노역담당관 여로보암이었다. 여로보암은 잘 생기고 성실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랐다. 당시 ‘아히야’라는 이스라엘 선지자가 예언을 했다. 앞으로 이 나라가 12개 부족으로 쪼개지는데, 여로보암이 10개 부족을 가질 것이라고. 이 말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 여로보암의 입지를 튼튼하게 했다.

솔로몬은 여로보암이 국내 정치를 어지럽게 했다고 생각해 군대를 동원해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했다. 여로보암은 일개 공무원이었고, 일반 민중으로는 솔로몬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집트로 망명했다. 이집트의 왕 시삭은 여로보암을 환영하고 이집트에 거주하면서 반란군의 힘을 기르도록 도와줬다. 그들은 솔로몬이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

여로보암은 솔로몬 사후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의 지도자가 됐다. 선지자 아히야의 계시를 받고 있는 여로보암(오른쪽)./제라르 호에트(1728년)

—솔로몬이 죽은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나?

“기원전 930년에 솔로몬이 죽자 솔로몬의 아들이 세습을 했다. 그의 이름이 르호보암이다. 10개 부족은 이집트에 있는 여로보암을 불러 들여 지도자로 삼았다. 그 정도로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 왕조에서 떠나 있었다. 그는 대국 이집트를 등에 업고 귀국했다.”

예수의 이름은 예수, 성(姓)은?

고 목사의 설명이 매우 빠른 속도로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와중에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의 이름이 비슷해 헷갈리면서 의문이 하나 생겼다.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름만 있고 성(姓)은 없나? 성까지 붙여 부르면 구별이 더 쉽지 않을까? 고 목사가 대답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당시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이 없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 시대 이후에 세계 각지로 흩어지면서 일부는 유럽에서, 일부는 근동에서, 일부는 아프리카에서 살았다. 그리고 각자가 거주하는 나라의 습성을 받아들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을 갖기 시작한 것은 유럽에 거주하면서 유럽 풍습에 따른 결과다. 현재 이스라엘 사람의 이름을 보면 유럽 성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예컨대 핑클스타인, 마이슬러, 와이즈만 등은 독일식 성을 차용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름만 있을 뿐 성이 없었다. 예수도 이름이며, 성은 없었다. 설교하는 예수의 모습./칼 블록(1877년)

—나사렛 예수는?

“‘나사렛 동네의 예수'라는 뜻이다. 즉, 예수의 이름도 성이 없음을 반영하고 있다.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구별하기 위해 나사렛 지방의 예수라고 불렀다. 유다 벤허는 벤이 히브리어로 아들이므로 허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즉 허의 아들이며, 이름이 유다라는 의미이다. 오사마 빈 라덴도 오사마는 이름이고 빈은 히브리어의 벤과 같으므로 라덴의 아들 오사마라는 뜻이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의 대결

다시 르호보암 이야기로 돌아갔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이 어떻게 대결했나?

“르호보암이 왕에 등극하니 북쪽의 여로보암이 10개 부족을 다시 동원해서 르호보암과 담판을 짓게 됐다. 반란지도자가 왕과 만나 담판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때 회의 장소를 어디로 할 것인가가 문제가 됐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당연히 자기 정부가 있는 예루살렘에서 하기를 원했겠지만, 여로보암은 예루살렘에서 자신들이 있는 세겜으로 오라고 했다. 세겜은 북쪽에 있던 10개 부족의 중심지이다.

회담 장소를 놓고 양측이 기싸움을 벌였는데, 결국 여로보암이 오라는 곳으로 르호보함이 갔다. 르호보암은 자신만만했다. 자신이 왕이니 회의야 어디서 하면 어떻냐고 생각했다. 그래서 홈그라운드를 버리고 정적의 홈그라운드로 들어갔다.”

르호보암 왕은 등극 초기에 매우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자신감이 국가 분열의 한 원인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위스 바젤 시청 벽화에 그려져 있는 르호보암./한스 홀바인(1520년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즉위 직후라서 아직 정권의 기반이 취약할 때였는데 르호보암이 오판을 한 것이다. 정권 초기에 매사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는데 너무 자신만만했다.”

—담판 내용은?

“르호보암은 솔로몬 시대의 대신들과 자신이 등극 후에 임명한 젊은 각료들을 데리고 세겜에 갔다. 거기서 대담판이 벌어진다.

여로보암의 요구사항은 첫째, 세금을 경감하라, 둘째, 부역을 대폭 줄여달라 였다. 르호보암의 아버지인 솔로몬이 세금을 너무 많이 매겨서 감당할 수 없으며, 공사장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이 어려우니 백성들의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르호보암은 듣고 있다가 당장 대답하기는 그러니 3일간 숙고한 뒤 답을 주겠다고 했다. 그는 3일간 세겜에 머물며 대신들과 상의했다.”

르호보암, 자신이 넘쳐 오판하다

—대신들은 뭐라고 했나?

“솔로몬 왕을 모셨던 대신들과 르호보암이 임명한 젊은 각료들의 의견이 달랐다. 솔로몬 시대 대신들은 백성들이 전임 왕 밑에서 너무 많은 무거운 짐을 지고 피폐해졌으니, 새 왕은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 짐을 가볍게 해 주면서 백성을 섬기는 자세를 취하면 그들이 반대를 철회하고 나라가 평안해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반면, 르호보암이 임명한 젊은 각료들은 왕과 함께 번영한 나라에서 자라나서 모든 것을 대가 없이 받아 쓴 사람들이라서 백성들이 세금을 내고 부역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젊은 사람들은 왕이 등극한지 얼마 안되는데 기싸움에서 지면 안되며, 처음부터 그들의 반란 의지를 뭉개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 목사가 말을 이어갔다.

“젊은 각료들은 왕에게 노인 대신들의 말을 무시하고 이렇게 이야기하도록 권했다. ‘나의 새끼 손가락이 나의 아버지 솔로몬의 허리보다 굵다. 그리고 내 아버지가 국민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 무게를 더욱 무겁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아버지가 너희를 채찍으로 때렸다면 나는 독이 있는 전갈로 다스리겠다’. 르호보암은 3일 뒤에 10개 부족 대표를 끌고 나온 여로보암을 만나서 그대로 이야기했다. 늙은 대신들이 지혜롭게 가르쳐준 것은 버리고, 세상물정 모르는 자기 또래의 신참 각료들의 권유를 따른 것이다.”

남쪽(왼쪽)의 그리심 산과 북쪽의 에발 산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세겜 성. 역사적으로 예루살렘보다 더 민족적 뿌리가 있는 곳이어서 국가 대사를 논하는 장소로 사용됐다.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이라는 홈 그라운드를 떠나서 여기서 여로보암과 회담을 하다가 낭패를 당했다./고세진

—여로보암의 반응은?

“여로보암과 그를 따르는 10개 부족 대표들은 ‘너희 조상 다윗과 우리는 아무 관계가 없다. 10개 부족은 각자 있는 장소로 돌아가라. 우리는 다윗의 손자인 르호보암과 영원히 결별한다’고 했다. 르호보암은 수레를 타고 남쪽 예루살렘을 향해 도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스라엘 통일왕국이 두개로 쪼개졌다.

이후 여로보암이 다스리기 시작한 북쪽 왕국을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남쪽 르호보암이 다스린 왕국을 유다라고 했다. 분열왕국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여로보암이 거느린 이스라엘 지역의 인구와 영토가 더 넓었고,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힘이 셌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의 사후 르호보암의 오판으로 남과 북이 분열됐다./위키피디아

—그 후에 어떻게 됐나?

“여로보암과 동맹을 맺은 이집트의 시삭 왕은 르호보암 즉위 5년에 유다 왕국을 침공하며 예루살렘 왕궁과 성전에 있던 보물들을 약탈해 갔다. 기원전 930년에 시작된 분열왕국 시대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209년 뒤인 기원전 721년에 아시리아에 멸망하고, 남왕국 유다가 344넌 뒤인 기원전 586년에 바빌론에게 정복당하면서 끝났다.

이후 이스라엘 나라는 지도에서 사라졌다. 이스라엘 민족이 분열 때문에 국력이 쇠퇴한 상태에서, 다윗 시대에 잠잠하던 주변 강대국들이 다시 힘을 얻어 국제무대에 전면 등장한 결과이다.”

전임 황제들이 시작한 이스라엘 민족의 북왕국 멸망과업을 서기전 721년에 마무리 지었던 아시리아의 황제 사르곤 2세가 신하 앞에서 막대기(홀)을 들고 있다. 이라크의 북쪽지방에 있는 코르사바드에서 발견된 알라바스터(설화석고) 돌판. 높이 3.3 m. 1842년에 프랑스 고고학자 에밀 보타가 발견했다./고세진

—강대국들이 다시 번성하게 된 계기는?

“이집트는 나일강 외에는 메마른 사막이라서 천연자원이 부족했다. 그래서 시나이 반도와 가나안 땅을 착취하는 정책을 썼는데, 여로보암을 지원하면서 힘이 세어진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분할을 계기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 북쪽의 아시리아는 국력이 재정비되면서 왕들이 다른 나라를 병합하는 정책을 썼다. 바빌론도 마찬가지였다. 바빌론과 아시리아가 각축을 했는데, 처음에는 아시리아가 우세했다. 이 때 아시리아가 남진해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먼저 정복했다. 나중에 바빌론이 아시리아를 누르면서 우세하게 되자 남왕국 유다까지 멸망시켰다.”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

—무엇이 문제였다고 보나?

“첫째, 솔로몬과 아들 르호보암이 국민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했다.

둘째, 부담을 느낀 국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어떻게 해달라고 요구할 때 안 들어 준 르호보암의 책임이다.

셋째, 분열왕국이 된 이후부터 주변 국제정세에 대한 제대로 된 판단이 없었다. 내적으로 자기 민족과 나라를 든든하게 가꿀 수 있는 국가관이나 철학도 없었다.”

솔로몬왕은 재임 중에 백성들에게 과한 세금과 노역을 부과한 반면, 자신은 호화로운 생활과 외교행사를 하면서 사후 국가 분열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솔로몬왕이 에티오피아의 시바 여왕을 만나는 모습./고세진

—성경에서는 멸망의 원인을 어떻게 설명하나?

“성경식으로 말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일으켜 나라를 만들게 한 여호와를 배반하고 이방신, 잡신들을 추종했기 때문에 여호와가 벌을 내렸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두 나라가 모두 멸망했다고 한다.”

—고고학자로서의 견해는?

“요즘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엄청난 모략과 선동, 정치적 싸움, 오판이 있었다. 그러한 역학 관계의 결과라고 본다. 모든 역사가 다 그렇다.”

—예를 들면?

“북과 남의 왕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민생 복리를 중시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왕들도 있었다. 특히 외국과의 관계에서 강대국들이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외국 군대의 말발굽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파악해 외교나 군사 대책을 써야 하는데 왕들이 오판을 많이 했다.”

—어떤 오판을 했나?

“남왕국의 경우 북쪽에서 아시리아가 쳐들어오면 남쪽의 이집트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집트는 도와줄 마음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집트는 북왕국을 도와가며 이스라엘 민족을 분열시킨 나라 아닌가? 남왕국은 군사적 힘도 없었다. 군사적 힘을 키우려면 사람과 돈이 있어야 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정책을 쓴 왕들이 별로 없었다. 그게 몰락의 길이었다.

당시 왕들과 제사장들은 맨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고 주문을 외치며 자신들의 부실을 하나님의 이름 아래 감췄다. 지도자의 자질이 문제였다.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선지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말은 수용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은 핍박이나 위협을 받았다.”

고대 이집트 제22대 왕조 창설자 파라오 셰송크 1세(시삭)가 적들을 쳐부수는 장면. 이집트 카르낙에 있는 아문 신전 벽에 조각되어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통일왕국을 정치적 술수로 분열시키고 무력으로 침공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우리도 1980년대 이후에 중국·러시아·북한이 모두 약했던 시기가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중국에 가서 사업하고, 러시아에 차관도 제공하고, 북한에도 지원을 계속하던 시대가 있었다. 이제 그런 시기가 끝났다.

세계사를 보면 큰 나라는 역시 큰 나라이고, 작은 나라는 작은 나라로 머무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우리 같이 작은 나라는 항상 조심하고 힘을 소진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잘 관리해야 한다. 그 시기에 내실을 잘 다졌어야 하는데, 우리가 너무 벼락부자 행세하며 자만하다가 좋은 시기를 모두 놓친 것이 아닌가 싶다.”

고고학자의 연구법

고세진 목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3000년 전의 오래된 이야기를 어떻게 검증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화제를 잠시 돌려 고고학자의 연구법에 대해 물어봤다.

—성경고고학자들은 어떤 자료를 보나?

“성경 뿐 아니라 성경 밖 문서들을 같이 봐야 한다. 고고학 현장에서 나오는 유물들을 가지고 성경의 문맥과 맞춰봐야 한다. 목회자들은 성경만 본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의 창문이다. 밖은 보이지만 창문 밖의 옆과 위와 아래는 보이지 않는다. 고고학자들은 창문에 바짝 눈을 대고 창문 밖의 아래와 위, 옆도 보려고 노력한다.”

고고학자는 신학자와 달리 현장 발굴을 통해 얻은 역사적 지식을 과거 재구성의 재료로 활용한다. 사진은 에티오피아 발굴 현장에서 작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성경고고학자 고세진 목사./고세진

—성경 밖의 고대 문서들은 어떤 것인가?

“비석이나 궁정의 벽화, 조각품이 많다. 아시리아 왕, 바빌론 왕의 궁정 기록이 아직 남아 있다. 각각 그 나라 고대어로 되어 있다. 고대 이라크인들은 토판에 글씨를 써서 당시 도서관에 보관해뒀는데, 일부는 서양학자들이 발굴해 가져가 대영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다.”

고 목사가 이 대목에서 탄식을 했다.

“고대 이라크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유물들은 1990~1991년 걸프 전 당시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몰락할 때 폭도들이 박물관을 부수고 유물들을 훔쳐가서 많이 사라졌다. 근래에는 이슬람국가(IS)가 이슬람 이전의 모든 종교들을 사이비라고 비판하며 고대 신전이나 장소들을 모두 파괴했다. 시리아나 터키의 북부에서 심각하게 자행된 문화재 테러로 고귀한 역사적 유물들이 많이 사라졌다. 정말 비참하고 애통한 일이다. 이슬람국가는 고고학자들에게 악몽과 같다.”

쉽지 않은 히브리어 번역

—고대 문헌을 해석할 때 히브리어를 알면 많이 도움이 되나?

“고대 히브리어와 현대 히브리어는 같은 부분이 많으나 문법은 좀 다르다. 예를 들어 현대 히브리어는 시제가 과거, 현재, 미래로 나뉘어져 있다. 반면, 고대 히브리어 시제에는 과거완료형, 현재진행형, 미완료형 등도 있어서 과거의 일에 대해서도 동작이 끝나지 않은 경우에는 미완료된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 또 미래에도 동작이 끝난 상황을 묘사할 수 있다. 지금보다 문법이 훨씬 훨씬 발달되어 있다. 그래서 고대 히브리어가 학문이나 철학을 하기에 좋다.

서양 사상, 더 나아가 현대 세계의 지배적 사상을 만들어낸 두 개의 언어, 즉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는 모두 시제가 복잡해 동작을 정밀하게 묘사할 수 있다. 명사에도 격, 단수와 복수, 정관사 여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고대 히브리어 성경을 현대의 한국어나 영어로 번역할 때에는 단어의 의미나 언어구조의 차이 때문에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사진은 기원전 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히브리어 구약성경 사해 사본의 일부./위키피디아

—영어나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보면 창세기 1장 1절에 하나님이 태초(베레시트)에 천지를 창조했다고 되어 있다. 히브리어에는 정관사가 있지만, 구약 성경의 이 구절에는 베레시트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 만약 히브리어에 정관사를 넣으면 베레시트가 아니라 바라시트가 된다. 그런데 안넣은 이유는 태초가 시점을 알 수 없는 옛날이기 때문이다. 무궁무진한 과거를 말한다.

이 때 태초를 영어 성경에는 ‘in the beginning’으로 번역한다. 히브리어 원문에 정관사가 없으니 ‘in beginning’으로 번역해야 하겠지만, 정관사 없이 이렇게 쓰는 것이 영어 문법에 안맞으니 영어 번역에서 정관사를 넣었다. 그래서 영어 번역만 보면 특정한 시작점을 의미하는 것 같이 해석될 수 있다. 한국어의 경우에는 정관사가 없으니 그냥 태초라고 번역했다. 역시 정관사 없이 표현한 히브리어 원문의 어감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언어마다 구조가 달라서 번역 과정에서 원문의 어감을 그대로 전달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학자가 되려면 언어를 잘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성경고고학자인 고세진 서울유니온교회 담임목사의 입에서는 고대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쉬지 않고 술술 흘러나왔다. 그가 강조한 다윗의 정치 리더십과 후대의 리더십 부재는 한국 정치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이야기가 이어졌다.

☞ ②/③편으로 이어 보기

(‘이어 보기’ 아이콘이 작동하지 않으면 검색창에 ‘고세진 고고학’을 입력하세요.)

②/③“답방 없는 평양 정상회담에 국민들 좌절하고 분노”

[김기훈의 天地人] 고세진 서울유니온교회 담임목사 ②/③

입력 2022.07.06 13:49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9월 19일 평양 5·1 경기장에서 열린 '빛나는 조국'을 관람한 뒤 손을 잡고 있다./평양사진공동취재단

☞ ①/③편에서 계속

성경고고학자인 고세진 서울유니온교회 목사와의 대화는 3000년전 다윗의 리더십과 후대의 리더십 부재가 한국 정치에 주는 시사점으로 이어졌다.

한국 정치의 문제점 ①

: 사분오열된 민심

—다윗의 리더십과 이스라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한국 정치가 갖는 문제점은?

“모두 다섯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국민들의 마음이 사분오열되어 있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들은 지역별로, 세대별로, 성별로 나뉘어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 정치인들이 표를 모으기 위해 이를 이용하거나 조장하고 있다. 결국은 나라를 망치는 일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다윗이 백성들의 마음을 순화시키고 안심시켰듯이, 민주당이든 국민의힘이든, 또는 어떤 정치인이든 국민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여야 정치인들이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엮어 내기 위해 정성을 들여야 한다. 국민의 마음을 갈라서 표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정치 지도자들은 국민 전체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하고 국민 전체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 요즘 한국 정치인들은 한쪽에서만 찬성하는 말을 해서 마음이 아프다.”

한국 사회의 민심은 심하게 갈라져 있어서 통합이 시급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2017년 초 서울 헌법재판소 인근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 찬성 집회와 반대 집회의 장소를 안내하는 포스터가 각각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남강호 기자

—현실 정치를 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좋은 정치 이념이 있어도 권력을 쥐어야 실현할 수 있고, 권력을 쥐려면 유권자를 갈라치기 하는 방법이 득표에 유리하다고 한다.

“그런 방식으로 일단 정권을 잡은 뒤에 국민을 통합한 사람이 있나? 그와 반대로 갈등이 점점 심화되지 않았나? 그런 방식을 버리고 국민의 꿈을 실현시키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국민들이 요즘 정치인들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국가의 지도자가 아니라 한 패거리의 지도자가 되기 때문이다.”

—정치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그런 현상이 벌어지지 않았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에 그런 경향이 심했다. 그러나 과연 그 때 미국이 잘 됐는지 곱씹어 봐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에 국제정치 무대에서 미국의 위상이 더 높아졌나? 우리가 그런 길을 따라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정치가는 선거 이전에, 즉 정치에 나서는 순간부터 국민을 섬긴다는 자세로 가야 한다. 그 옛날 3000년 전 왕정시대에도 르호보암의 원로 대신들은 ‘백성을 섬기는 왕’이 되라고 했다. 진심으로 섬긴다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래야 위대한 정치가가 될 수 있다. 정치 지도자 가운데 가끔 돌연변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오랫 동안 정계에서 그런 능력을 검증 받고 잘 섬긴 실적이 있는 사람이 국가지도자가 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윤석열 대통령 같은 돌연변이 정치지도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오랜 경험을 가진 국가 원로와 전문가에게 의견을 물어보면서 가야 한다. 또 국민들을 여러 각도에서 접해 이야기를 경청해야 한다. 날이 선 발언은 삼가는 것이 좋다. 5200만명의 전국민을 상대로 하는 발언 아닌가? 누군가는 상처를 받기 쉽다. 그러니 너무 날 선 발언을 하면 안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 경험이 짧기 때문에 국가 원로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많이 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사진은 윤 대통령이 지난 5월 2일 경기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중앙시장을 찾아 감사 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진기자단

—날 선 발언이라면?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갑자기 대한민국 건국을 인정할 수 없다거나, 김원봉에게 훈장을 주어야 한다거나, 신영복을 존경한다고 말한 것은 모두 날이 시퍼렇게 선 발언이었다. 한두 사람의 한을 풀어주는 행동이 다른 대다수 국민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또 다른 유의점이 있다면?

“국민이 납득하지 못할 행동을 대통령이 하면 안된다. 예를 들어 서해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에 축구 구경을 간다든지, 서해에서 해수부 직원이 사살됐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아카펠라(반주 없이 부르는 노래) 구경을 갔던 것은 국민들이 이해할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남침하고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중국의 전승절에 참석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대통령의 제 1 임무는 국가를 보위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 아닌가?”

한국 정치의 문제점 ②

: 국토 회복의 꿈을 잊다

—두번째 문제점은?

“국가 정책이 국토 수복에 맞추어져 있지 않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무슨 뜻인가?

“다윗은 조상들이 품었던 영토 회복의 꿈을 갖고 수도를 북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민심을 얻고 전쟁과 외교를 해서 실제로 이뤄냈다. 이에 반해 한국은 반대로 행정수도를 남쪽 세종시로 옮겼다.”

세종특별시에 있는 정부세종청사 전경./뉴스1

—한국 대통령은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민족의 꿈은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이다. 한반도 전체를 통일해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이룩하는 것이다. 우리는 바다 때문에 남쪽이나 동쪽,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없다. 북으로 밖에 안된다. 그 점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북방정책과 닮아 있다. 북방정책이 성공하려면 해양 세력과 연합해 대륙으로 진출해야 한다. 즉 미국, 일본과 손을 잡고 북으로 진출해야 한다. 중국이나 러시아와 손을 잡는 것은 좋은 전략이 아니다.

정치 지도자가 이런 전략을 갖고 있다면 수도를 북쪽으로 옮겨야 한다. 다만 남북 분단 때문에 서울을 북상 한계선이라고 한다면 서울을 어떻게 관리할 것이냐에 집중해야지, 충청도 민심을 잡기 위해 수도를 남쪽으로 옮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공무원 가족이 서울과 세종시에 분산되어 이산가족처럼 살고, 공무원들이 두 도시를 수시로 왔다갔다 해야 하는 바람에 행정 비효율성도 높다. 정치 지도자들이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정당의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비효율성을 초래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행정수도를 서울보다 남쪽인 세종시로 정하면서 국토 확장 의지가 쇠퇴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사진은 노 대통령이 민주당 대선 후보 시절인 2002년 12월 8일 기자회견에서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한 세부 사항을 발표하는 모습./전기병 기자

—장기적으로 보면 행정수도를 어디로 정해야 하나?

“남북이 통일한 뒤에는 행정수도를 평양이나 그 이상의 북쪽으로 옮겨야 고구려의 옛땅까지 수복하려는 우리 각오가 더 단단해지지 않겠나?”

고 목사가 이 대목에서 남북한이 평창올림픽 등 국제 스포츠행사장에서 함께 사용한 한반도 깃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한반도 깃발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반도 깃발을 보면 북쪽 경계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끝난다. 국제적으로 그 곳을 경계선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옛 고구려의 영토를 포함한 깃발을 만들어야 한다. 중국의 눈치를 보면 안된다. 남의 나라 눈치를 보는 것이 우리의 심각한 문제이다. 나라의 크기와 상관 없이 외국과 대등한 입장을 유지하지 못하면 그것은 속국이나 다름 없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해서 고구려 영토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도 고구려 영토를 우리 것이라고 주장해야 나중에 국제법 상으로 인정받을 근거가 생긴다. 나중에 그 시기가 되면 지금 우리가 쓰는 한반도 기가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2000년이 지난 뒤에도 자기나라 땅을 수복했다. 그래서 현재 이스라엘이 존재한다. 우리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1300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고구려를 잊어가고 있지 않은가?”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함께 들고 입장한 한반도 깃발. 한반도 깃발은 국경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한정해 고구려 시대 옛 영토에 대한 수복 의지를 퇴색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오종찬 기자

한국 정치의 문제점 ③

: 북한에 끌려다니는 남북정상회의

—세번째 문제점은?

“정치인들이 남북 협상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확고히 지키지 못하고 북한에 끌려가고 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반대파인 여로보암과 정상회담을 할 때 자기의 홈그라운드인 예루살렘에서 하지 않고 정적의 홈그라운인 세겜에 가서 했다. 취임 초기 나라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만에 빠져 상대의 작전에 휘말림으로써 결국 통일왕국이 쪼개져서 분열왕국이 됐다.

당시 젊은 르호보암은 이집트를 등에 업고 예루살렘 정권에 반대하던 여로보암의 작전을 파악할 수 있는 지혜가 없었다. 르호보암이 전략과 지략에서 져서 여로보암에게 끌려 다닌 것이다.”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북한 지도자인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서울에 온 적이 한 번도 없는데도,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과, 대통령이 되기 전의 박근혜 당대표가 평양에 가서 회담을 했다. 우리의 홈그라운드인 서울에서 해야 하는데 상대방의 홈그라운인 평양에 가서 하니, 오해도 많이 받고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불리한 일들만 벌어지고 있다. 앞으로는 절대로 평양에 가서 회담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지난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오른쪽)을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맞이하고 있다. 이후 남북 정상회담이 평양이나 판문점에서 여러차례 열렸으나, 북한의 서울 답방은 이뤄지지 않았다./조선일보DB

—남북한 정상들이 서로 오고가면 되지 않나?

“서로 오고가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기는 커녕, 현재까지 상황을 보면 한국의 대통령들이 북한에게 빌붙는 식이 되고 말았지 않은가? 경제적 수준이든 국가의 위상이든 모든 측면에서 우리가 유리하므로 우리가 가면 안된다.

문재인 대통령 시절에는 우리측 대표단이 평양에 가서 냉면을 먹다가 북한측 인사로부터 ‘냉면이 목구멍에 넘어가느냐’는 험한 소리까지 들었다. 이게 말이 되나? 이게 국가의 대표들이 당하고 있어도 될 일인가? 국민들을 좌절시키고 분노에 차게 했다. 이런 정권은 국민의 기를 꺽어 국가를 몰락시킨다.”

 

—그러면 남북간 정상회담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나?

“우리가 이미 여러 번 갔으니 앞으로 답방 올 경우 받기만 하면 된다. 북한에 돈도 이미 많이 갖다 주지 않았나? 그런데 왜 우리가 북한에 굴종하는지 모르겠다. 무슨 회담이든 서울에서 하지 않고 평양에 가는 것은 정신적으로 북한에게 굴종하는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국민의 염장을 지르는 대통령이 더는 없기를 바란다. 젊은이들 중에는 이미 통일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한국 정치의 문제점 ④

: 실효성 없는 평화·통일 방안

—한국 정치의 네번째 문제점은?

“실효성 없는 통일과 평화의 환상에 매달리고 있다. 솔로몬 왕 사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분열되면서 북쪽 나라를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남쪽 나라를 유다라고 했다. 두 나라는 각축하면서 서로 도발도 하고, 외교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호 협력하는 단계로 들어간 적도 있다. 결혼동맹이나 군사동맹을 맺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다 허무하게 무너졌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달라.

“남북 두 왕국은 갈등도 하고 전쟁도 했다. 그러다가 대국인 시리아를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 들여서 상대를 군사적으로 흡수하려고 했다. 그런데 주변 강대국은 절대로 주변 약소국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뜻대로 되지 않자 두 나라는 기원전 9세기에 결혼동맹을 맺고 잠깐 평화의 시기를 갖는다. 당시 남쪽 유다 왕국의 여호사밧 왕의 아들 예호람과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아합 왕의 딸 아달리야가 결혼해 두 왕국은 사돈이 됐다. 그런데 아합 왕 때 국력이 신장되어 시리아를 침공했다. 이 때 여호사밧 왕에게 같이 침공하자고 제안하고 여호사밧이 승낙해 함께 전쟁을 했다. 하지만 참패해 전장에서 아합은 전사하고 여호사밧은 간신히 탈출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이스라엘이 분열된 후 남왕국 유다의 여호사밧 왕(왼쪽)과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오른쪽)은 서로 결혼 동맹과 군사 동맹을 맺기도 했으나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서로 싸우다가 국력이 쇠약해져 결국 주변 강대국에 멸망당했다./위키피디아

—그래서 어떻게 됐나?

“이후에 두 나라는 같이 무역을 하기도 했으나 결국 여러가지 문제 때문에 동맹은 깨졌다. 오히려 결혼 동맹의 당사자인 아합의 딸 아달리야가 예루살렘에 살면서 왕비가 되어 온갖 나쁜 짓을 해 남왕국 유다의 정치를 어지럽혔다. 아달리야는 아들 아하시야 왕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예후 장군에게 시해되자, 스스로 유다의 7대 왕으로 즉위하고 다윗의 후손들을 전멸시키려고 대학살을 자행했다.

한동안 남북 왕국이 일시적인 평화를 누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결혼동맹과 군사동맹이 정착하지 못하고 각자가 자신의 길을 가면서 서로 싸우다가 국력을 소진했다. 그리고 둘 다 강대국에게 멸망 당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문재인 대통령(오른쪽에서 두번째)은 2018년 9월 20일 북한 방문 당시 통일을 기원하며 김정일 북한 국무위원장(왼쪽에서 두번째)과 백두산 천지까지 함께 올랐으나, 한반도 평화에 별로 효과가 없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평양사진공동취재단

—한국에 주는 교훈은?

“정치인들이 남북간 합의니, 종전선언이니, 한반도 비핵화니 하는 말들을 남발하지만 전혀 실효성이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백두산까지 갔다 왔지만 돌이켜 보면 무슨 의미가 있나? 평화가 정착됐다는 것은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해수부 공무원이 바다에서 인민군에게 사살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고 목사가 잠시 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북한과의 관계에서 평화라는 환상에 매달리면 안 된다. 북한은 차근차근히 남한을 집어 먹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남한 정치인들이 부추기는 남북 간의 평화무드는 이스라엘 고대 역사에서 보듯이 허황한 것이다. 특히 북한이 적화통일 야욕을 버리지 않는 상황에서 평화무드를 추구하는 것은 고양이 앞에 놓인 생선처럼 우리나라의 종말을 재촉하는 것일 뿐이다.”

한국 정치의 문제점 ⑤

: 정체성 위기

—다섯번째 문제점은?

“한국 사람들은 대학 진학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미국 사람들보다 대학에 많이 가려고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 삶의 통제력과 나라의 미래에 대한 성찰,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세계 상황에 대한 생각이 대단히 허약하다. 부모가 자녀를 데리고 자기나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냥 먹고 사는 것이 지고(至高)의 선(善)이 되고 말았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대화가 안 통하고 세대 차이가 난다고 하는 것도 우리의 정체성, 즉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한국인은 무엇인가 하는 정체성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세계에 공헌하는 나라가 되려면 실리적인 바알 종교보다는 대학에서 배운 대로 사람답게 사는 일에 정신을 쏟아야 한다.”

손에 번개를 든 바알 신. 북왕국 이스라엘은 풍요와 번식의 신 바알을 믿었는데, 이 바람에 인간간의 규범과 정체성을 상실하고 망했다고 학자들은 설명한다./위키피디아

—바알 종교가 무엇인가?

“원래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은 야웨주의(여호와주의)였다. 여호와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분열 후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호와 대신 바알 신을 받아들였다. 여호와주의에는 인간과 인간 간의 엄격한 윤리 체계와 규범이 있었다. 하지만 바알에게는 이러한 규범이 없었다.

바알의 상징은 황소였다. 사람들이 황소에게서 추구한 것은 번영이었다. 번영을 추구하므로 번식이 중요했다. 곡식이 잘 되어 몇 배의 소출이 나고, 짐승이 번식을 잘 해 새끼가 많이 나고, 사람이 자녀를 많이 낳아 가문이 번영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다 보니 성(性)이 중요해졌고, 사람들의 삶이 비윤리적, 비도덕적이 됐다. 윤리 체계가 무너져 서로 신뢰할 수 없는 사회가 됐다.”

—남왕국 유다는 어떻게 됐나?

“야웨주의를 버리지는 않았지만, 야웨주의에 바알과 다른 신들을 섞은 혼합주의로 갔다. 결국 두 나라가 모두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다 강대국들에게 망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쪼갰고, 아시리아는 이스라엘이 약해질 때를 기다리다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 바빌론은 남왕국 유다를 무너뜨렸다.”

우리 정체성 잃지 말아야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뭔가?

“학력 수준이 높은 우리 국민들이 국가의 정체성과 안보 상황에 대해 성찰하고 깨어 있는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북한을 믿으면 안 되는 것은 당연하고, 주변의 강대국이며 남침전쟁을 벌였던 중국과 러시아도 신뢰하면 안된다. 심지어 동맹국인 미국도 너무 믿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국민들이 반대로 가고 있다.”

—미국도 믿으면 안된다니?

“미국도 국내 정치 변화에 따라 한국을 대하는 것이 달라진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에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한국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나는 당시에 미국도 믿으면 안된다는 경고로 받아들였다.’

고 목사의 말이 이어졌다.

“인류 역사상 강대국들은 자기들의 이익에 따라서 작은 나라를 좌지우지하려고 하는 못된 습관이 있다. 미국은 그런 면에서 퍽 나은 나라이고, 현재로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한반도에 대한 영토 야욕이 없기에 우리와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 내에서 이상한 지도자가 나오고 한국 내에서 종북주의 정권이 활약을 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경사로에 놓인 공이 굴러가는 것과 같을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시절에 '미국 우선주의'를 추구하면서 한국과 미국의 동맹관계를 위축시켰다. 대선 후보 시절인 2016년 3월 아리조나주 선거유세에서 연설하는 트럼프 대통령./게이지 스키드모어(위키피디아)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하면?

“첫째, 자유민주주의이다. 먹고 사는 문제에 착념하면서 방관하다가 자유민주주의를 버리고 공산주의나 유물론을 도입하면 안된다. 대학을 나올 정도로 많이 배운 사람들 사이에 자유민주주의의 덕을 보면서 윤리 도덕을 타락하게 하거나 음란한 일이 공공연하게 판치게 해서도 안 된다.

둘째,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는 한반도 통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 통일이 자유민주주의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여러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 틀 안에서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공산주의의 틀 안에서는 그러한 공존이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해방 이후에 미국에 우리의 안보를 맡기고 돈 버는 일에 집중하면서 국가 정체성을 수호하는 일에 무관심해졌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많이 망각했다. 정신이 희미해졌다. 일부 정치인들이 이런 정체성을 훼손하는 행동을 하고 있어서 더더욱 안타깝다. 국민들이 뭐가 옳은지 그른지 잘 판별해 정치인들에게 놀아나지 말아야 한다.”

고세진 목사의 목소리에 열정이 넘쳤다. 현실 정치에 대한 실망과 한국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그를 바쁘게 움직이게 하는 것 같았다. 긴 대화 도중에 고 목사가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했다. 이스라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북한을 공격할 것이라고. 질문이 이어졌다.

성경고고학자인 고세진 서울유니온교회 담임목사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남한이 남북 정상회담에서 주도권을 행사해 서울에서 회담을 해야 제대로 된 통일이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김기훈

③/③“이스라엘, 북핵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즉각 공습할 것”

[김기훈의 天地人] 고세진 서울유니온교회 담임목사 ③/③

 

입력 2022.07.06 13:50
 
 
 
 
 
이스라엘은 북한 핵이 자국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면 공군기를 동원해 폭격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사진은 훈련중인 이스라엘 F-16 전투기./이스라엘 공군

☞ ②/③편에서 계속

성경고고학자인 고세진 서울유니온교회 목사와 이야기를 하던 중 이스라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북한을 공격할 것이라고 고 목사가 말했다. 뜻밖의 이야기에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이스라엘이 북한에 대해 잘 알고 있나?

“내가 1980년대 초에 이스라엘에서 유학을 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가 북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북한이 자체 개발한 스커드 미사일을 이스라엘의 적성국가들인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에 수출하고 있었고, 북한 군사요원들이 이스라엘에 테러를 가하는 단체들과 그러한 나라들에게 협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는 김일성이 통치하던 시대여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김일성에 대해 궁금해하며 학생인 나에게 질문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북한이 1980년대에 중동 국가에 스커드 미사일을 수출하자, 이스라엘은 심각한 안보 위협을 느꼈다. 사진은 북한의 열병식에 등장한 스커드 B 미사일./조선일보DB

—당시 이스라엘이 북한제 미사일 피해를 많이 봤나?

“내가 이스라엘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때인 1990년대에 이라크는 이스라엘에 스커드 미사일을 퍼 부었다. 모슬렘들에게도 성지인 예루살렘을 제외하고, 이스라엘의 가장 크고 번화한 도시인 텔 아비브와 갈릴리 지방에 스커드 미사일이 떨어졌다. 밤이나 낮에 대피 사이렌이 울렸다. 우리는 방독면을 쓰고 뛰어다녔다.’

—이스라엘 고위층들을 만나게 된 계기는?

“그 때 나는 학교의 직책상 대학교수들이나 총장들이 모이는 회합에 가끔 참석을 했고, 에제르 와이즈만 이스라엘 대통령이 주재하는 모임에도 여러 번 참석했다. 그리고 대통령의 수석비서관과 각별하게 친해졌다. 이스라엘 주재 한국대사관이 주관하는 모임에도 자주 갔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군 장성, 정치인, 정보부 직원들과 대화를 할 때가 있었다. 사석에서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 공군이 북한의 평양을 공습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

최강의 이스라엘 공군

—이스라엘 공군이 그렇게 강한가?

“이스라엘 공군은 세계 최강 수준이다. 레이다에 걸리지 않고 저공비행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평양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최근에도 그런 사례가 있었다.”

이스라엘 공군력은 매우 강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사진은 이스라엘 공군의 F-16I '수파' 전투기./위키피디아

—어떤 사례인가?

“얼마 전에 이스라엘 공군이 수단에 있는 군수품 공장을 공습했다. 이란이 이 시설을 소유하고, 여기에서 군수품을 제조하여 이란으로 가져간다는 의심을 이스라엘이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란의 핵시설을 이스라엘 공군이 공습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이란에 주기 위한 것이라고도 했다. 무려 1820km를 저공비행하여 공습임무를 하고 돌아갔다. 이스라엘 공군의 실력은 대단하다.”

이스라엘의 핵무기

—북한은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이 북한을 공격하려면 전력이 비슷해야 하는데, 이스라엘도 핵무기를 갖고 있나?

“내가 이스라엘에 있을 때 이스라엘이 생산하는 핵무기에 대한 이야기도 피상적 수준이긴 하나 직접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핵무기 생산에 대해서는 언제나 공식적으로 부인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스라엘에 사찰을 와도 시설을 보여주거나 내용을 브리핑하지 않고 딱 잡아 뗀다. 이스라엘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도 가입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국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북한이 핵 위협을 하더라도 대등한 입장에서 군사전략을 시행할 수 있다. 사진은 1945년 미국이 시행한 첫 핵실험에서 폭발 직후 발생한 버섯 구름./미국 에너지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핵무기에 대해 뭐라고 말했나?

“그들이 저녁 식사 모임 같은데서 자기들끼리, 주변의 아랍 국가들이 핵을 개발하면 그 시설을 이스라엘 공군으로 때린다거나 이스라엘에 적대하는 국가에게는 핵무기를 한 개씩 선사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다. 그들에게 핵무기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물었으나 그들은 항상 웃으며, ‘뭘 그런 걸 알려고 하느냐’며 가볍게 넘겼다. 그러나 그들과의 대화에서 1990년대에 핵무기를 300개 정도 가지고 있다는 유추를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회에서 필요하면 북한을 공격하겠다는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나?

“북한의 스커드 미사일이 이라크와 시리아에 수출되어 위협이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걸프전으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제거되면서 위험이 일단 사라졌다. 그것이 더 발전했다면 이스라엘은 북한을 공격했을 것이다. 지금은 북한을 공격할 명분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만약 북한이 개발한 핵이 자기들을 향한다고 판단이 되면 여지없이 때릴 것이다. 그리고 얼마든지 때릴 만한 군사 능력도 보유하고 있다.”

휴민트로 북한 정보 수집

—북한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 갖고 있나?

“내가 이스라엘에 살 당시 이스라엘 장성이나 모사드 직원이 나에게 들려 준 것은 이스라엘이 북한에 대해 방대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있고, 김일성의 출신과 집권 과정, 김정일의 정치 행태, 북괴군의 동향, 북한에 대한 한국의 대응 태세 따위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12 초 후 SKIP

내가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수집하느냐고 물었더니, 처음에는 대답을 안했으나, 나중에는 여러나라의 외교 라인은 물론이고, 놀랍게도 휴민트(인적네트워크를 활용한 정보수집)를 사용한다고 했다.”

—어떤 정보원들인가?

“물어봤으나 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나중에 누군가가 나에게 북한에 관계된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어떤 적당한 사람들을 키우고 있다고 했다. 중요한 점은 이스라엘이 북한을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성국가로 간주하고 북한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적성국가로 분류한 나라에 대해서는 절대로 어영부영 넘어가지 않는다는 철칙을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이스라엘이 북한에 대해 신뢰할 만한 정보들을 축적하고 있다고 본다.”

이스라엘 해외정보국 '모사드'의 인장.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린다는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스라엘의 정보수집 기관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대략 세 부서로 되어 있다. 국내정보국 신베트(Shin Bet)는 국내정보를 담당하는 부서이다. 히브리어로 ‘정보부’라는 말의 첫 두 글자(신, 베트)를 따서 신베트라는 약칭으로 부른다. 신베트의 모토는 ‘보이지 않는 방패’(마겐 베로 예라예)이다. 즉 드러나지 않게 국내정보 활동을 하여 국가를 보호한다는 뜻이다.

두번째는 이스라엘 국방정보부이다. 히브리어로 ‘아가프 하모디인’이라고 하는데, 약자로 ‘아만 (Aman)’이라고 부른다. 이 부서는 다른 두 부서와 대등한 위상을 가지고 있으며, 군사와 전투, 전쟁에 관련한 정보들을 다룬다.

세번째는 모사드(Mossad)로 알려져 있는 해외정보국이다. 해외정보 수집, 은밀한 공작, 테러대응 공작, 심지어는 테러 공작이 주요 임무이다.”

국민들이 깨어 있어야

시계를 보니 오후 6시 20분을 향해 간다. 성경고고학자인 고세진 목사와 대화를 시작한 지 벌써 4시간이나 됐다.

고 목사는 인터뷰 하는 동안 성경, 이스라엘, 중동의 역사, 고대 정치인들의 지혜와 모략, 고고학 발굴법, 히브리어 구조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막힘 없이 술술 답변을 했다. 성경의 구절보다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객관적 설명이 많았다. 예수나 석가모니, 공자보다 훨씬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단서를 찾아 당시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그려내는 작업의 중요성과 어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장마 기간이었는데도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지을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성경과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질문을 했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국가는 그릇이다. 그릇 안에 어떤 음식을 담거나 비우거나 다시 담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릇이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에 그렇다. 그릇이 망가지면 어떤 음식도 담을 수 없다. 국가라는 그릇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국민과 정치인들의 절대의무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그릇을 깨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 안에서 우리가 좋은 음식을 즐기면서 그릇이 깨지는 것을 모른 체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모두가 더 이상 먹을 음식이 없어서 굶어 죽게 된다.

고고학에서 보면 망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 어느 정도 길게 생존하다 망하느냐는 시간 문제만 있을 뿐이다. 북한이라고 하는 정치단체는 한국을 전복하기 위해 한반도 침략전쟁 이래 72년을 한 번도 변하지 않고 정복전략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이 북한에게 망한다면 얼마나 단명한 나라가 되겠나? 정치지도자들은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명 보호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국민은 정치인 가운데 국가에 해가 되는 소리가 무엇인지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국가에 해가 되는 사람을 공직에 앉도록 선출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개선하려면 국민들이 깨어 있으면서 투표권을 제대로 행사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제20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인 지난 5월 9일 충북 청주시 대성중학교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고 있는 모습./뉴스1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요즘 역점을 두고 있는 일을 물었더니, 미국인 아내와 함께 고아들을 돕고 있다고 했다. 고 목사 부부는 한국에서 고아 둘을 입양해서 길렀는데 둘 다 잘 자라서 결혼했다. 그러자 아내는 바로 보육원들을 찾아 지금까지 8년째 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라이프 투게더 (Life Together)라는 봉사단체를 만들어서, 18세가 되면 보육원을 나와야 하는 청소년들, 사회적 적응력이 약해서 악의 수렁텅이에 빠지기 쉬운 고아들을 상대로 상담을 해주고, 영어나 음악을 가르쳐주며, 미래 설계에 대해서 이야기도 나누며 돕고 있다. 고 목사는 “보육원을 퇴소한 청소년들을 국가가 돕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며 “국가의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종교가 돌봐야 한다”고 말했다.

 
근동고고학자(성경고고학자)인 고세진 서울유니온교회 담임목사가 지난 6월 27일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현대 한국 정치에 주는 시사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김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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