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조선식물향명집’이 식민잔재라고?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
1조선박물연구회가 편찬한 식물계의 ‘우리말본’..2000년대 들어 왜색 논란 제기
‘과학 조선 건설의 반가운 소식-경성에 있는 우리 동식물 학자들로 조직된 조선박물연구회에서는 그간 조선 식물의 이름을 수집 정리 중 제일착의 수확으로 최근 ‘조선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이란 국판이 백여 페이지의 훌륭한 책자가 나왔다.’( ‘四氏의 공동업적, 조선식물향명집’, 조선일보 1937년 4월10일)
1937년 4월 낭보가 전해졌다. 조선인 생물학자들이 편찬한 우리말 식물 목록집이 나왔다는 뉴스였다. 정태현, 도봉섭, 이덕봉, 이휘재 4명이 저자였다. 한반도에서 자라는 식물 연구는 일본이나 러시아 같은 외국 학자가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의 조사에도 우리 말 식물 명칭이 포함됐지만, 지방 사정과 언어에 익숙치 않은 외국인들이 현지에서 쓰이는 조선어 명칭을 제대로 알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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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의 한글 정리에 비견
본문 169쪽의 얇은 분량이지만, ‘조선식물향명집’의 반향은 대단했다. 다음날 1면 사설 제목은 ‘과학 조선의 명랑보’ (조선일보 1937년4월11일). 조선이 과학 방면에서 뒤쳐진 현실을 비판한 뒤, ‘최근 조선어연구회의 한글 정리사업의 진보와 최현배 교수의 ‘우리말본’완성으로 한글 정리상 커다란 수확이 있었거니와 이번 조선박물연구회의 ‘조선식물향명집’의 완성은 식물학상의 공헌은 물론, 조선어 정리상에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과학 조선의 명랑보 속출을 기뻐하지 않을 수없다’ 고 썼다. ‘조선식물향명집’이 단순한 분류서가 아니라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과학계의 업적으로 간주한 것이다.
◇조선박물연구회 주도
신문은 1933년 출범한 조선박물연구회가 우리 말로 된 통일된 동식물 표준명칭을 정하기 위해 ‘만 3년간 100여회나 회합, 연구한 결과 공동업적으로 전기 서적을 내놓게 된 것’이라고 소개했다. ‘조선식물향명집’은 한반도에 분포하는 식물 1944종에 대한 학명, 일본명, 조선명을 단순 배열했다. 자생 식물인지, 재배 식물인지 알아 볼 수있도록 표시도 했다.
린네 이후 근대 식물 분류학의 관점에서 조선 식물명을 정리한 연구는 모리 다메조(森 爲三)의 ‘조선식물명휘’(1921)가 있다. 조선에서 자라는 식물 3576종에 대해 라틴 학명, 일본명 및 한자명을 병기하고, 여기에 조선명, 조선식 한자명 및 서식지·용도에 대한 정보를 더한 방대한 분량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통치를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해 진행한 의뢰한 연구였다.
‘조선식물향명집’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식물 이름을 근대 식물 분류학에 따라 재검토하고, ‘조선식물명휘’및 ‘조선삼림식물편’등의 조선명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는 것을 내세웠다. 식물의 표준 명칭을 정하기 위해, 기존 명칭을 재검토하면서 명칭이 없는 식물에 대해 새로운 명칭을 부여하는 것까지 포함했다.
◇조선어학회와 조선식물향명집
‘조선식물향명집’은 조선어 표준말을 정하려는 우리말 연구의 일환으로 나왔다.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 맟춤법 통일안’을 발표한 데 이어 1936년10월28일 표준어를 정한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했다. ‘향명집’ 저자인 이덕봉은 조선어학회의 표준말 연구 중 식물 명칭에 대한 사정(査定)에 참가했다. ‘조선식물향명집’ 발간은 조선어학회를 위시한 민족주의 운동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이덕봉은 1937년1월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에 ‘향명집’에 실릴 국화과 식물 139종의 기준과 유형, 명칭을 분석한 ‘조선산 식물의 조선명고’를 게재했다. 조선어학회와 조선박물연구회, ‘향명집’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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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간 임업시험장 지킨 정태현
‘향명집’ 주요 저자인 정태현은 총독부 임업시험장 직원, 도봉섭은 경성약전 교수, 이덕봉(배화여고보)·이휘재(중동중)는 생물 교사였다. 정태현(1882~1971)은 당시 식물 연구에 30년 가까이 뼈가 굵은 현장 전문가였다. 1908년 수원 농림학교를 나온 정태현은 대한제국 농상공부 임업사업부 기수로 일했다. 나라를 빼앗긴 뒤 총독부 산림과 고원(雇員)으로 강등됐지만 산림과에 남았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잘 살 수있으며 한을 풀 수있을까”하는 생각에서 식물에 대한 ‘실학’을 계속 배우기로 했다는 것이다.
정태현은 특히 도쿄제대 교수이자 저명한 식물학자로 동년배인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1882-1952) 통역이자 조수로 한반도 전역을 답사하면서 근대 식물분류학을 익혔다. 1921년 기수 지휘를 회복했으나 1933년 다시 촉탁으로 강등됐다. 조선인 연구자로 이뤄진 조선박물연구회에 합류해 ‘조선식물향명집’에 참여한 데는 총독부 체제에서 겪은 차별의 설움도 한몫했을 것이다. 조선일보 1937년 신년호는 ‘향명집’ 출간에 박차를 가하던 정태현을 인터뷰한 뒤 이렇게 마무리했다. ‘당신 한분의 노력으로써 우리 이천삼백만은 우리 땅에서 나는 꽃과 나무와 풀의 조선말이름이라도 알게됩니다!’ (발문망식 이십팔년, 1937년1월1일)
정태현은 42년간 입업시험장을 떠나지 않았다. ‘조선삼림식물도설’(1943)을 편찬했고’ 해방 후에도 조선생물학회 창설을 주도해 1947~1949년 회장을 지냈다. 전남대와 성균관대에서 후학을 길러내면서 우리나라 식물학계 태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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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제대 출신 경성약전 교수 도봉섭
함흥의 부유한 상인 집안 출신인 도봉섭(1904~)은 1930년 도쿄제대 약학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같은 해 도쿄제대를 졸업한 조선인 5명(정치, 법, 독문, 물리, 약학)중 1명이었다. 졸업과 함께 경성약전 교수로 초빙될 만큼 운도 따랐다. 일본 최고대학에서 생약학을 전공한 그에게 조선 약초에 관심이 많던 일본 기업이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도봉섭의 조선 식물 연구를 이끈 이는 총독부 산림과 출신 이시도야 쓰토무(石戶谷勤)였다. 삿포로 농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총독부 산림과 기수로 부임한 이시도야는 정태현과 더불어 식물, 특히 약재 연구에 공을 세웠고 1926년 경성제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도봉섭은 경성약전에 부임하자마자 식물 분류학에 밝은 이시도야의 권유로 식물 채집을 다녔다. 1932년 나온 ‘경성부근식물소지(小誌)’는 두 사람의 합작품이다. 116과 800종 이상의 식물을 과별(科別)로 나열한 후 초심자들이 채집할 때 흥미를 느낄 만한 과들에 대한 구별 요령을 덧붙인 안내서였다.
도봉섭은 경성약전 식물동호회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식물 연구자로 급성장했다. 일본을 불편하게 하는 연구도 있었다. 왕벚나무 자생지가 제주도라고 밝히면서 일본의 벚꽃문화는 조선의 벚나무를 기리는 것이라고까지 단언했다. 벚꽃을 일본의 상징으로 생각해온 일본인들은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또 일본 열도가 울릉도, 제주도와 함께 한반도에서 떨어져나가 생성됐다는 대륙분리설을 주장했다. 일본의 기원이 한반도라는 주장이다. 조선인 연구자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을 보여준 사례로 주목받는 장면이다. 도봉섭은 해방 이후 조선생물학회와 조선약학회 초대회장을 지냈고, 6.25 이후 평양의대 교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도봉섭의 아내는 1930년대 여성화가로 이름난 정찬영(1906~1988)이다.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 첫 여성 특선 작가이기도 한 정찬영은 1939년 둘째아들을 잃은 후, 화가의 길을 접고 남편의 연구를 돕기위한 식물세밀화를 그렸다고 한다.
◇조선어학회와의 고리, 이덕봉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한 이덕봉(1898~1987)은 1933년 조선박물연구회를 경성할 당시 배화여고보 생물교사였다. 일본인이 중심이 된 ‘조선박물학회’에서 활동하던 이덕봉은 훗날 ‘그들을 따라다니다 보니 멋적은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조선박물학회’에 더부살이를 하기 싫었다’고 회고했다. ‘향명집’ 아지트는 휘문고보 숙직실이었다.이학교에 근무하던 문학평론가 겸 불문학자 이헌구가 연락책을 맡았기 때문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숙질실에서 1주일에 2~3번 모여 자기가 아는 식물을 하나씩 내놓고 하나하나 설명을 한 다음 그 식물들의 표준명칭을 우리말로 정하고 부가적으로 지방명이나 異名등도 있을 땐 기록해 나갔다.’ (원로 과학기술자의 증언 5. 이덕봉 박사편 125쪽, ‘과학과 기술’ 125호, 1978) 조선어학회의 표준어 사정 작업에서 식물 분야를 맡아 조선박물연구회를 연결한 주역도 이덕봉이었다. 그는 해방 후 숙명여대, 서울대, 고려대, 중앙대에서 후학들을 길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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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친일 논란’
‘조선식물향명집’의 우리말 식물 명칭은 해방 이후 거의 국가표준식물목록으로 이어졌을 만큼 널리 인정받았으나 최근 뜻밖의 논란에 휘말렸다. ‘향명집’ 표준 명칭 일부가 일본어 명칭에 의존하거나 그대로 번역한 ‘식민 잔재’라는 것이다. 쑥부쟁이, 망초, 개불알꽃, 박쥐나물, 광대나물, 벼룩나물 등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당시 조선인이 실제 사용하는 이름을 가장 우선적으로 삼고 전통 문헌에 나오는 이름으로 보완했다는 저자들의 사정(査定)방침을 떠올리면, ‘친일프레임’으로 접근하는 건 위험하다. ‘조선식물향명집’이 나온 1937년 상반기는 중·일전쟁 직전으로 일제가 본격적인 파시즘 체제로 나아가는 길목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인데 왜 조선말로 식물 이름을 정리하느냐”고 제지했지만 학자들은 “시골에 일본어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교육시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둘러대 화를 면할 수 있었다(이우철 ‘한국 식물명의 유래’)는 회고가 당시 사정을 말해준다. ‘내선일체’로 향하던 일제 치하에서 어렵사리 쌓아간 선대 연구자들의 노고를 섣부른 ‘친일몰이’로 깎아내려도 될까.
◇참고자료
정태현, 도봉섭, 이덕봉, 이휘재 공편, ‘조선식물향명집’, 조선박물연구회, 1937
조민제, 이웅, 최성호, ‘조선식물향명집’ ‘사정요지를 통해 본 식물명의 유래’, 한국과학사학회지 제40권 제3호, 2018
이정, 식민지 조선의 식물연구(1910~1945),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합동과정 박사학위 논문, 2013
이정, 식민지 과학 협력을 위한 중립성의 정치: 일제강점기 조선의 향토적 식물연구,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7권 제1호, 2015
원로 과학기술자의 증언 5. 이덕봉 박사편 125쪽, ‘과학과 기술’ 125호,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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