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김수영의 담뱃갑
[아무튼, 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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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드니 깜박증으로 애먹는 일이 잦습니다.
약속 날짜를 그 자리에서 휴대폰에 저장해두지 않으면 그 길로 깜깜이가 됩니다.
어릴 땐 전화번호 잘 왼다고 칭찬도 받았는데,
요즘은 스스로 정한 비밀번호도 돌아서면 까먹으니 뇌가 퇴화하는 중일까요.
얼마 전엔 휴대폰이 먹통 된 바람에 종일 ‘멘붕’이었습니다.
병원 예약일, 인터뷰 날짜는 물론 글감으로 끄적여놓은 문장들까지 몽땅 거기 들어 있으니
눈앞이 캄캄해지더군요.
디지털에 대한 배신감에 부르르 떨면서 서랍 깊숙이 방치해두었던 수첩을 다시 꺼냈습니다.
“믿을 건 역시 종이와 볼펜이지” 하면서요.
시인 김수영은 수첩 갖고 다니기도 귀찮아서 담뱃갑 뚜껑에 메모를 했다고 합니다.
담뱃갑이 양복 호주머니 속에 수두룩하게 고이면
찢어서 버리기 전에 혹시나 하고 다시 훑어보았는데,
거기엔 잡지사 원고료 액수와 마감 날짜, 사야 할 책 이름, 아이들 학비 낼 날짜,
외상 술값까지 자질구레한 숫자들이 뺴곡히 적혀 있었다 하지요.
꼬장꼬장한 시인은 꼬깃한 담뱃갑에 불현듯 떠오르는 시어들도 여럿 적어놨다가
창작의 재료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 유명한 시 ‘풀’과 ‘눈’도 그렇게 탄생했겠지요.
그러고 보니 지독히도 가난했던 화가 이중섭도 담뱃갑 속 은박지를 반듯이 편 다음
철필로 꾹꾹 눌러가며 ‘물고기와 아이들’ 같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담뱃갑 일화는 얼마전 민음사에서 출간된 김수영 산문집에 나오는데,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김수영의 서늘한 답이 한동안 뇌리에 머물더군요.
‘시작(詩作)이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란 곧 ‘사랑’이라고요.
20대 대통령 선거 방송을 밤새워 지켜보면서 엉뚱하게도 그 문장을 떠올렸습니다.
위대한 시, 위대한 예술처럼
온몸으로, 뼛국물까지 짜낸 사랑과 집념으로 밀고 나가는 정치가 구현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유례없는 네거티브 선거에 상처투성이 된 이들의 마음을 다독일
용서와 화해의 리더십은 그토록 어려운 걸까.
권좌에 올랐으나 깨알같이 메모해둔 국민과의 약속을 실천하려 애쓰는 지도자를
우리는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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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뉴스레터’엔 김수영의 뮤즈이자 아내였던 김현경 여사의 인터뷰를 배달합니다.
“시 한편 탈고하려면 온갖 까탈을 부리는통에 식구들 피가 말랐다”고 남편을 흉보던 그는
올해 아흔여섯의 고운 할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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