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일기에 남은 전쟁 이야기

colorprom 2022. 3. 3. 16:23

[일사일언] 일기에 남은 전쟁 이야기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입력 2022.03.03 03:00
 
 

한문 문장을 이해하는 이들에게야 금과옥조 같은 자료겠지만,

박물관 전시에 고서(古書)를 소개하는 것은 꽤 난감한 일이다.

도판 하나 없이 한자만 가득한 데다 손수 쓴 책은 글자조차 알아보기 힘들다.

여간해서는 시선을 끌기 어려운 탓에

“검은 것은 글자, 하얀 것은 종이”라고 푸념하기도 한다.

 

그런데 몇 해 전 국립진주박물관

옛 일기 하나를 소재로 특별전을 개최해 호평을 받았다.

 

서울에 거주했던 양반 오희문(1539~1613)의 일기로,

그는 1591년 외가가 있던 충청도 영동 등을 방문했다가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를 전전하다

1601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일기 제목도 ‘시경’의 한 구절

쇄혜미혜 유리지자(瑣兮尾兮 遊離之子·자잘하며 보잘것없는 이, 떠도는 사람이로다)’

에서 따서 ‘쇄미록’이라 했다.

 

전시는 일기를 한 장 한 장 넘기듯이 이야기를 풀어냈다.

오희문의 삶, 왜란의 경과, 가족과 가문, 가계의 운영, 생산과 놀이, 노비들의 삶까지

‘쇄미록’은 삽화와 도해, 영상이 더해져 대하드라마가 됐다.

 

이 전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전선 밖의 사람들을 주목했다.

굶주리다 병에 걸려 죽은 어미의 시신 앞에서

호미라도 빌릴 수 있으면 땅을 파서 묻을 수 있겠다는 어린 자식들,

가족의 반은 왜적 칼에 죽고 반은 병에 걸려 대여섯 살 손자 하나만 남은 집안,

최근 걸인이 줄어든 이유가 몇 달 사이에 모두 굶어 죽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 등등,

죽은 사람뿐 아니라 산 사람의 삶마저 파괴하는 전쟁의 참상에 관한 대목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좋은 시절에 평소 서로 어울려 젊은이와 어른이 한데 모여 놀면서

술에 취해 떠들던 일을 이제는 다시 하지 못할 것이다.

어찌 슬프고 안타깝지 않겠는가!”

 

오희문의 일기 한 대목으로 시작한 전시는 큐레이터의 글로 마무리됐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셨나요?

오늘은 어떻게 기록될까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오희문은 한양에서 평범한 양반의 삶을 살았겠지요.’

 

코로나 바이러스우크라이나 전쟁 뉴스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요즘,

더는 슬프고 안타까운 일 없이,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모두가 평범한 삶으로 되돌아가기를 기원한다.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