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누가 ‘분홍빛 인생’을 망쳤나
입력 2021.08.19 03:00
북한 김정남 살해 사건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영화 ‘암살자들’을 지난 주말 봤다.
“영화에 네가 나오더라”는 동료의 말에 궁금한 마음이 일었다.
당시 필자는 베트남 특파원이었다.
몰래카메라로 여겨 김정남 얼굴에 화학물질을 발랐던 베트남인 도안 티 흐엉이
2년간 수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다는 소식에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는 장면이 영화에 담겼다.
다큐멘터리 영화 '암살자들' 포스터.
김정남 사건은 우리 생애 가장 완벽한 암살이었다. /더쿱
현지 시각 밤 10시. 흐엉은 마치 톱스타 같은 모습이었다.
화려한 옷에 선글라스를 끼고, 분홍색 캐리어를 끌고 나타났다.
그는 취재진에게 “앞으로 배우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공항을 떠난 그를 쫓아 고향 집에 내려갔을 때
“그의 화려한 복귀는 진짜일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노이에서 3시간가량 떨어진 그의 고향에 도착하자,
떠들썩했던 공항과 달리 정적이 맴돌았다.
1급 살해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질 뻔했던 딸이
2년 만에 돌아온 집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필자가 고향집을 찾아간 시간은 새벽 5~6시쯤.
공항에서 연신 “행복하다” “감사하다”고 하던 그는 몇 시간 사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웃들은 “흐엉이 고향 집에 온 지 얼마 안 돼 ‘하노이 친구’를 따라갔다”고 했다.
그의 부모에게 “딸은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범죄를 시킨 북한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처벌받지 않았다”고 하자
“우린 그런 얘기는 모른다”며 답을 피했다.
공안 여럿이 집을 감시하고 있었다.
공안들은 기자에게 “어디서 왔느냐” “왜 여기 있느냐”며 주변을 맴돌았다.
현지 정보원들은 “이웃들이 말한 ‘하노이 친구’는 베트남 공안을 뜻하는 말”이라며
“베트남 당국에서 한동안 그를 격리·감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흐엉의 화려한 복귀는
정치적으로 계산된 시나리오에 따른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도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김정남 죽음의 숨겨진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암살자들'.
북한 공작에 속은 두 여성은 몰래카메라인 줄 알고 참여했다.
지난 2017년 2월 말레이시아에서 김정남 암살 혐의로 체포된
인도네시아 국적 시티 아이샤(왼쪽)와 베트남 국적 도안 티 흐엉. /더쿱
석방 이후 한동안 사라졌던 그의 모습은 영화 말미에서 볼 수 있었다.
흐엉은 “사건 전까지만 해도 세상은 분홍색이라 생각했지만,
이제 진짜 세상은 분홍색이 아니란 걸 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자 그가 공항에 끌고 왔던 분홍색 캐리어가 생각났다.
석방 당시 그의 분홍색 캐리어는 사람을 죽이고도 ‘배우’라는 꿈을 입에 올리는,
그의 철없음을 상징하는 물건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분홍색 캐리어만 고향 집 텅 빈 방 한편에 놓아둔 채 사라졌다.
고향 집을 다시 떠나야 했을 때
그는 배우라는 꿈도,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도
분홍색 캐리어 안에 잠가 놓고 간 것은 아니었을까.
가난했지만 배우의 꿈을 가졌던 여성을 이용해 살인을 저지른 이들은
지금까지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정치적 음모에 휘말린 흐엉의 삶은 어떻게 보상받아야 할까.
20대 여성의 분홍빛 인생을 망친 이들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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