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꾼 된 B급 운동권, 이념 없으니 좌파도 아냐”
홍진표 前 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입력 2021.04.29 03:00 | 수정 2021.04.29 03:00
“공부는 안 하고 정치권으로 간 ‘B급’ 운동권이 지금 ’586′이 돼서 정권 핵심부를 장악하고 있어요.
어떻게 그렇게까지 타락했나 생각하다 보면
‘아이고, 나쁜 것들’이라고 욕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정말 아프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한때는 ‘우리’였으니까요.”
나라 돌아가는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과 목소리 모두에 그늘이 깔렸다.
뉴라이트 계열 단체 ‘시대정신’의 상임이사인 홍진표(58) 전 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옛 동지들’에 대한 평가는 냉철했다.
그는 “운동권에서 활동할 당시 공부는 안 하고 ‘공개 활동’에만 집중하던 친구들이
이제는 그냥 ‘정치꾼’이 됐다”며
“586을 종북이니 좌파니 욕해선 안 된다.
이념이란 게 아예 없는데 어떻게 종북이고 좌파일 수 있느냐”고 했다.
홍진표 시대정신 상임이사가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지난달 책 ‘철학이 묻고 과학이 답하다’를 냈다. /김연정 객원기자
‘원조 주사파’ ‘전향한 운동권’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서울대 82학번(자퇴 후 정치학과 83학번 입학)으로 총학생회 간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부장,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간사 등을 지낸
‘주사파 코어(core)’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이른바 ‘변절자’가 됐다.
“지하당에 인생을 전부 걸었어요.
그런데 소련이 붕괴하고, 북한에서 식량난으로 사람이 죽어나가요.
나의 신념, 철학, 이론으로는 이 현실이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틀렸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왔죠.”
1998년 ‘시대정신’이라는 시민단체와 동명의 잡지 발간을 주도했다.
새로운 사회운동을 목표로 북한 민주화 운동을 주장했다.
2004년부터는 같은 ‘운동권 출신’들과 힘을 모아 ‘뉴라이트(new right)’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잘못된 정책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우파에도 변화를 촉구하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며
“하지만 금방 정치집단화(化) 했고, 원래의 목표였던 우파 혁신이라는 건 잊혔다”고 했다.
뉴라이트는 실제 몰락에 가까운 길을 걸었다.
“정치 운동에 경도되다 보니 어느 순간엔 뉴라이트라는 말이 욕처럼 돼버렸다”며 안타까워했다.
격월간지 ‘시대정신’ 편집인을 맡았지만
2016년 대통령 탄핵 사태로 후원이 끊기면서 이듬해 결국 ‘무기한 정간’에 들어갔다.
“다시 발간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솔직히 가능성은 작아요.
탄핵 이후 ‘태극기’ ‘대깨문’ 등 양극단으로 시민 후원이 쏠리게 돼 버렸어요.
시대정신같이 ‘진영’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는 잡지는 후원을 받기 어려워요.”
잡지를 못 내게 되자 할 일도 없어졌다. 그래서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일을 했다.
“80년대 운동권들에게는 가치관의 출발점을 철학에 두고 싶은 욕망이 있었어요.
하지만 소수를 제외하고선 깊이 있게 철학 공부를 한 경우가 없었죠.
그때의 아쉬움으로 철학 공부에 한 2년 몰두했어요.”
그렇게 완성한 책 ‘철학이 묻고 과학이 답하다’를 지난달 출간했다.
‘잘 팔리느냐’고 물으니
“철학 책이 잘나가려면 ‘구라’를 많이 쳐야 하는데 그러지는 못했다”며 웃었다.
“지금은 대깨문, 태극기 같은 ‘선진 대중 정치 운동’이 정치권을 움직이는 시대입니다.”
‘선진'이라고? 고개를 갸웃하니
“시민이 적극적으로 댓글을 달고, 지구당 활동을 하고, 집회에도 나간다.
형식의 측면에서 분명 ‘선진’”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선진 운동이 정치를 속된 말로 ‘개판’을 만들었어요.
정치인들이 다 눈치 보기에만 바빠요.
의미로서의 ‘선진’은 아닌 거죠.”
또다시 정치 발전 논의를 위해 역할 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일단은 역사 공부를 좀 더 해보겠다”고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