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성폭력이 '조개 줍기'란 이들
조선일보
입력 2020.07.18 03:14
허유진 사회부 기자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 줍고 있다."
2003년 초 유시민 당시 개혁국민정당 집행위원은
2002년 대선 때 벌어진 개혁당 당원 MT에서의 성폭력 사건 해결을 요구하는 당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 당내 성폭력이 '조개'였다면 '해일'은 선거였다.
2003년 4월 보궐선거를 앞두고 당내 여성위원회가 지도부의 미진한 조치를 문제 삼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유시민은 이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가 사용한 조개라는 단어는 여성의 성기를 비하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는 2006년 보건복지부 인사청문회에서
"임박해 있는 여러 일정을 제쳐두고 당내의 작은 일로 회의 시간이 소모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해변에서 조개껍데기를 들고 놀고 있는 아이와 같다'고 했는데
왜곡된 것에 대해 속이 상했다"고 해명했다.
어찌 됐든 당내 성폭행은 그에게 '작은 일'인 것이다.
조개 발언 이후 18년이 흘렀다.
지난 10일 오후 9시쯤 유시민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빈소를 찾았다.
박 전 시장은 서울시 직원을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당했다.
유시민은 취재진에게 "그만하세요!"라고 외친 뒤 빈소를 빠져나갔다.
죽음 앞에서는 성추행에 관한 진실을 추적하는 일을 그만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이날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박 전 시장의 성추행에 당 차원의 대응이 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자식 같으니"라며 눈을 흘겼다.
"7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을 함께한 친구"라고 박 전 시장을 회상한 이 대표는
큰소리로 "그런 걸 이 자리에서 예의라고 합니까! 최소한도 가릴 게 있고!"라고 외쳤다.
80년대 운동권 내부에서 성폭행과 성차별은 대의를 위한 희생으로 여겨지곤 했다.
남성들이 화염병을 들고 앞장서 싸울 동안 여성들은 빨래하고 청소했다.
40년이 지났지만 성추행은
박 전 시장이 이룩한 시민운동 업적에 비하면 사소한 일로 치부되는 듯하다.
빈소를 찾은 여권 인사들은 하나같이 박 전 시장을
"맑은 분"이자 "자기 자신에게 가혹한 분"으로 회상했다.
피해자에게는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폭로 이틀 만에 발표한
'권력형 성폭력 대응 3대 원칙'도 지키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피해자 중심주의와 불관용 원칙을 어긴 것이다.
당·정·청의 미진한 대응이 이어지자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은 특히 여성층에 서 크게 떨어졌다.
여권은 여론 눈치를 살피며 피해자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사과하는 순간에도 피해자는 '피해 호소인'으로 전락했다.
민주당·청와대·국가인권위원회가 이 표현을 썼다.
이낙연 대표는 "피해 고소인"이라고 했다.
18년 전 조개 줍기라고 했던 이들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들에게 성추행은 대의에 가릴 수 있는 '작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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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18/20200718000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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