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호텔 지배인은 최고의 포수
조선일보
입력 2020.07.06 03:08
유재덕 웨스틴조선호텔서울 조리팀장
영화 '귀여운 여인'에는 호텔 지배인이 등장한다.
단정하고 품위 있으면서 따뜻한 인간미도 지닌 인물이다.
영화 '러브 인 맨하탄'의 호텔 지배인도 멋진 인물인데, 그에겐 정의로운 면까지 있다.
호텔은 아니지만, '남아있는 나날'에서 앤서니 홉킨스가 연기했던 대저택의 집사는
지배인 캐릭터의 완성처럼 보인다.
호텔 지배인이 영화에 등장할 때면 내 시선은 그 캐릭터에 끌린다.
현실에서 호텔의 총지배인은
호텔의 품위와 격조라는 작품을 서비스라는 조각칼로 다듬어 완성하는 예술가에 가깝다.
해마다 이맘때면 호텔업계에선 치열한 '빙수 대전'이 벌어진다.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다.
빙수 메뉴 하나 개발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퍼붓는지 호텔리어가 아니면 절대 모른다.
엄청난 자료를 모으고, 수십 가지 시제품을 만들었다.
하나하나 품평 뒤 의견을 수렴해 최종 메뉴를 정한다.
이 험난한 과정을 거쳐 2년 전 개발에 성공한 메뉴가 '수박빙수'다.
매년 판매 기록을 갈아 치울 만큼 큰 인기다.
하지만 '수박빙수'는 나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다.
호텔의 메뉴는 하나하나가 전략 상품이다.
빙수 개발에도 엄청난 노력을 들이는데, 고급 요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들은 고객의 반응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
여기서 지배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고객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하고 전달하느냐에 따라 요리의 질이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 일하는 호텔이 야구 경기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마운드 위에 선 마무리 투수다.
경기를 이기려면 좋은 포수가 반드시 필요하다.
투수 퍼포먼스가 아무리 좋아도 포수가 경기 전체를 지배하지 못한다면 이길 수 없다.
믿음도 중요한 요소다.
어떤 공도 다 받아준다는 신뢰가 있어야 투수는 최상의 투구를 할 수 있다.
믿음직스러운 포수가 보내는 사인에 고개를 끄덕이며 승부구를 준비하는 마무리 투수처럼
나는 오늘도 주방으로 신나게 등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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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06/202007060007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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