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단 한 번의 '역지사지'
조선일보
입력 2020.06.15 03:00
유재덕 웨스틴조선호텔서울 조리팀장
지난 연말 동료들과 회식 후 집으로 돌아갈 때 일이다.
주차장에서 대리운전 기사를 불렀다.
호출 전화를 끊기 무섭게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무리 스마트 시대라지만 세상에 이렇게 빠를 수가!
대리 기사를 기다리던 건 나 혼자였으니, 일단 그에게 차 열쇠를 넘기고 조수석에 앉았다.
출발 직전 그가 가는 곳을 확인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그는 내가 부른 기사가 아니었다.
내가 도착할 무렵 주차장을 빠져나가던 차가 떠올랐다.
워낙 비싼 외제 차라 기억이 또렷했다.
대리 기사는 상황을 금세 이해했다.
외제 차 차주는 기사를 여럿 부른 뒤 먼저 온 기사에게 맡겨 떠난 것이다.
나는 '미안하지만, 내 연락을 받고 달려오는 기사님이 똑같은 일을 당하게 할 순 없지 않으냐'고
했다. 그는 '당연하다'고 답했다.
미안해져서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지만, 그는 극구 사양하고 떠났다.
그때 또 한 사람이 뛰어왔다. 역시 내가 호출한 기사는 아니었다.
상황을 설명해드렸다.
놀라웠던 건, 그 기사들 중 누구도 먼저 자신이 차를 몰게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동료들에게 예의를 지킨 것이다.
'역지사지'할 줄 아는 기사분들과, 여러 명 헛걸음시킨 고급 차 차주.
누가 더 '나은 사람'인가 생각했다.
예약 고객이 나타나지 않아 생기는 음식점의 '노 쇼(no show)' 피해액이
한 해 4조5000억원(2018년 외식업중앙회 조사)이라고 한다.
주된 이유는 '취소할 시간이 없어서'와 '예약한 걸 깜박 잊어서'다.
그건 이해라도 할 수 있다.
여러 음식점에 예약하고는 기분 따라 한 곳으로 간 뒤 취소 전화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본인은 스스로 영리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준비한 식재료를 버려야 하는 음식점은 피눈물을 흘린다.
한편으론 다른 고객의 시간과 기회를 빼앗는 지극히 이기적인 행위다.
'더 나은 인간'이 되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단 한 번의 '역지사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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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15/20200615001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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