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과거를 뒤집으려는 자들의 두려움
조선일보
입력 2020.06.05 03:16
무더기 과거사위 만드는 속셈은 지난 정권 '불의'로 만들려는 것
김광일 논설위원
포퓰리즘 선거로 현재를 장악한 사람들은 미래가 아닌 과거를 독점하려 든다.
근접 과거사를 손바닥 위 공깃돌처럼 움켜쥔다.
일제강점기, 여순 반란 사건, 제주 4·3, 5·18, 세월호 사고, 한명숙 불법 정치 자금, KAL기 폭파,
백선엽과 현충원, 촛불 때 계엄사 문건, 장자연 사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때론 대법원의 확정 판결도, 국정원 진실위의 최종 결론도 뒤집으려 한다.
재심 청구, 진상 재조사는 기본이고, 친일 파묘(破墓)를 불사한다.
48년을 거슬러 유신 청산 특별법 제정도 시도한다.
조만간 과거 뒤집기 특별법이 여럿 탄생할 것이다.
과거사법 개정안이 지난달 국회를 통과하자
문 대통령은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6·25 민간인 학살을 재조사해야 한다고 했다.
과거 뒤집기는 주류 교체를 했다는 세력이 두려움을 느낄 때 비롯된다.
B급 하류가 A급 엘리트를 몰아낸 뒤 엄습하는 두려움, 정통을 쫓아낸 이단이 갖는 두려움,
촛불 혁명을 이뤘다는 세력의 권위 부재에 대한 두려움을 닮았다.
어떤 정치평론가는
"단순 제도권 교체가 아닌,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해야 권력이 계속된다고 본다"며
과거 뒤집기의 속뜻을 분석했다.
카프카는 "역사란 대개 공무(公務)에 의해 창작된다"고 했고,
흐루쇼프는 "당신들이 싫건 좋건 역사는 우리 측에 있다. 우리는 너희를 파묻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엊그제 민주당 첫 의총에서 이해찬 대표가 제일성(第一聲)으로
"현대사의 왜곡된 것들을 하나씩 바로잡아 가는 책무"를 강조할 줄은 몰랐다.
우후죽순형 과거사위를 만드는 속셈은 한풀이 군중을 앞세워 지난 정권을 불의한 것으로 만드는 데 있다.
남아공과 중남미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1984년 아르헨티나의 실종자진상규명국가위원회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
눙카마스(Nunca mas·절대로 다시는)는 민주화 이행 과정에 앞장서는 역할을 했다.
군벌의 인권범죄에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전제하에
진실 규명, 책임자 처벌, 피해자 배상 같은 3대 원칙으로 정치적 중립과 화해를 지향했다.
한국형 과거사위는 정권에 따라 출렁거리며 핵심 지지층 결집용으로 쓰이기도 했고,
때론 정치 보복 그 자체가 목적이었으며, 거듭된 우려먹기가 특징이 됐다.
3차 조사는 기본이고, 5차 조사도 한다.
조사 자체를 재조사하는 무한 반복이다.
만족을 모르니 정권 부역에도 끝이 없다.
저들은 권력형 연대(連帶)도 독점했다.
정의기억연대, 참여연대, 민변만 언급해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언필칭 솔리다리테 모임은 누가 누구랑 연대하는지 모호하다.
초(超)국경 탈(脫)경계를 지향하는 사해(四海) 연대가 아니라 닫힌 커뮤니티의 끼리끼리 결속이다.
저들은 "진영을 가른 바리케이드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폴란드의 원조 솔리다리테 운동과는 다르다.
바웬사의 자유노조는 언론 자유와 진짜 선거가 핵심 쟁취 목표였다.
소련 탱크의 캐터필러와 폭군 야루젤스키로부터 벗어나려는 연대였다.
켄 폴릿의 책 '영원의 끝'을 보면
"45년 동안 공산주의였는데도 여전히 화장실에 휴지가 없다"는 비참함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폴란드식 연대였다.
한국형 연대는 정권을 감시하는 연대도, 피압박 계층과의 연대도 아니고
어느덧 정권과 한몸인 연대가 됐다.
청와대 참모진, 장·차관, 국회의원까지 상당수가 저들 몫이다.
그러나 정권과 한 몸이 됐을 때 자신들의 세상이 온 것 같을 때 진짜 두려움은 시작된다.
과거사를 뒤집으며 타인의 묘를 파헤칠 때 머잖은 미래의 자신 모습이 어른거리고
검은 그림자 같은 두려움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저들이 노리는 검찰 개혁, 언론 개혁은 결국 내 편 만들기다.
그러나 아무리 내 편이 많아도 여전히 두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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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04/202006040479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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