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칼럼] 현 정권보다 지금의 통합당이 더 두렵다
조선일보
입력 2020.06.05 03:20
"보수나 자유 우파라는 말을 싫어한다"는 80세 노인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최보식 선임기자
여당이 압승한 뒤였다.
한 대학교수가 신문에 써오던 칼럼을 중단했다.
정권 홍위병들에게 표적이 될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생기더라고 했다.
선거에서 절대적 지지를 얻어 이제 더 날뛸 텐데 무슨 일을 못 벌이겠느냐는 것이다.
나도 비슷한 심정이다. 다만 현 정권보다 통합당이 더 두렵다.
현 정권이 어떻게 나올지는 예측되기에 마음의 준비라도 한다.
진짜 두려움은 예측되지 않는 두려움이다.
지금 통합당을 보면 예측이 안 된다.
어떤 가치와 노선을 지키려는지 과연 그런 게 있는지 모호하다.
"보수나 자유 우파라는 말을 싫어한다"는 80세 노인 김종인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편안함을 느끼는 모습이 더 두렵다.
통합당 의원들은 공천만 받으면 당선되는 지역구 출신이 거의 전부다.
당내 권력의 눈치를 보는 데 익숙해서일까.
"다소 불만이 있고 과거 가치와 동떨어진 일이 일어난다 해도 너무 시비를 걸지 말아 달라"고 했을 때
다들 찍힐까 입을 다물었다.
어떤 이들이 김종인의 지도 방침에 동의했을 수는 있다.
한 노인이 자신의 생각에 맞춰 정당을 개조하려는데도,
보수 정당의 전통과 정체성에 관계된 중대사인데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다.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잊어버린 것 같다.
공개적으로 그에게 맞선 이는 장제원 의원 한 명뿐이다.
통합당이 아무리 쭈그러들었다 해도 "보수라는 말을 쓰지 말자"는 것에 대한 동의 여부는
저마다 밝혀야 한다.
이는 보수 정당 후보를 찍어준 유권자들에 대한 예의다.
김종인은 '자유 우파'라는 게 보잘것없다는 취지로
"배고픈 사람이 빵집을 지나다 김이 나는 빵을 먹고 싶은데 돈 없어 먹을 수 없다면
그 사람에게 무슨 자유가 있겠나"라고 했다.
빵 사 먹을 돈이 있어야 자유가 있나. 이런 언급은 너무 수준 이하다.
그는 사회 취약 계층에 대한 복지 지원을 말한 것 같은데,
서울시 복지 담당 공무원에게 전화하면 금방 들을 수 있다.
'김은 안 나지만' 빵 문제 같은 기본 생계는 이미 해결돼있다.
단지 비싼 소고기를 못 사 먹을 뿐이다.
그는 '약자와의 동행'이라며 기본소득도 언급하고 있다.
말은 아름답다. 하지만 기본소득 개념조차 모르는 소리다.
약자와 동행하는 것과 전 국민에게 일률적으로 현금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은 연결되지 않는다.
통합당 구성원들이 그와 코드를 맞추기 위해
어떻게 하면 여당보다 더 많이 돈을 퍼부을 수 있는지를 공부하고 있다고 들었다.
공돈을 주면 싫어할 사람은 없다.
현 정부의 재정 부실은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규모다.
코로나 사태가 있기 전부터 역대 최고였다.
그렇다고 재난 지원에 큰돈 쓰는 것을 아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재난지원금이 평소에도 먹기 어려운 소고기를 사 먹는 용도로 쓰인 것이다.
정상적인 보수 정당은 이런 식의 무차별 돈 살포를 비판해야 한다.
그 돈으로 직접 피해를 본 일용직·자영업자, 소상공인, 중소기업 등에 집중 지원하는 게 옳았다.
지금까지 보수 세력은 국가 장래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정권 임기 중에 온갖 인심을 쓰는 돈 잔치를 벌이고 나랏빚을 떠넘기는 짓은 안 하려고 했다.
어떤 용도의 선별 복지를 하고 어떻게 재원을 조달할지를 따졌다.
자신의 허리띠를 졸라매도 자식 세대에게는 막대한 악성 부채를 안 물려주려는 게 보수의 정신이었다.
실제 통합당이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돈 살포를 백날 얘기해본들,
그런 경쟁에서 결코 현 정권을 이길 수는 없다.
문 대통령은 "재난지원금으로 모처럼 소고기를 샀다는 보도에 뭉클했다"고 했는데,
김종인은 고작 '김 나는 빵' 수준에 머물고 있다.
빚을 내 돈 퍼붓는 일은 여당 혼자서도 넘쳐나도록 해왔다.
굳이 여당 아류(亞流)나 2중대까지 필요하지 않다.
이 80세 노인은 통합당 재생 카드로 광주 군 공항 이전과 호남 의대 신설도 내놓았다.
이걸로 호남의 관심을 되찾겠다는 것이다.
통합당이 이런 천진한 발상을 홍보할 때,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의원들을 향해
"잘못된 현대사에서 왜곡된 것을 하나씩 하나씩 바로잡아 가는 막중한 책무가 여러분에게 있다"고 말했다.
현 정권은 KAL 858기 폭파 사건, 제주 4·3 사건 여순 반란 사건 등을 재조사하겠다고 했다.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을 친일파로 공격하고,
국립묘역에서 '친일파 묘'를 파내야 한다고 했다.
해방 이후 현대사를 모두 좌파 시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다.
여당은 광주 5·18에 관해 학문적 이견도 용납하지 않는 처벌법까지 내놓았다.
지금 통합당 구성원은 두 부류다.
심정적으로 여기에 동조하거나, 현대사가 어떻게 수정되든 관심이 없는 쪽이다.
이승만·박정희를 분단과 친일 세력의 원흉이라며 대신 사죄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통합당이 더 두려운 것이다.
보수의 바로 뒤에는 천 길 낭떠러지가 있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04/2020060404797.html
'세상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朋黨정치 화려한 부활 (0) | 2020.06.05 |
---|---|
과거를 뒤집으려는 자들의 두려움 (0) | 2020.06.05 |
상사의 업적은 부하의 능력을 통해 달성된다 (행복한 경영이야기) (0) | 2020.06.05 |
모델 미란다 커 사진의 카펫 줄무늬는 왜 휘었나 (0) | 2020.06.04 |
[정민의 世說新語] [574] 찰풍오술 (察風五術) (0) | 2020.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