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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世說新語] [569] 주영렴수 (晝永簾垂)

colorprom 2020. 4. 30. 14:41

[정민의 世說新語] [569] 주영렴수 (晝永簾垂)


조선일보
                         
  •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20.04.29 21:30 | 수정 2020.04.30 00:38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연암 박지원은 개성 시절,
그곳 선비 양인수(梁仁叟)의 거처에 주영렴수재(晝永簾垂齋)란 당호를 붙여주고 '주영렴수재기'를 지었다.

주영렴수(晝永簾垂)는 송나라 소옹(邵雍)의 '늦봄에 읊다(暮春吟)'에
"봄 깊어 낮은 긴데 주렴을 드리운 곳, 뜨락엔 바람 없이 꽃이 홀로 날린다
(春深晝永簾垂地, 庭院無風花自飛)"고 한 데서 따왔다.

그의 네 칸짜리 초당은 중국식 둥근 창에 격자무늬 교창(交窓)까지 둔 예쁜 집이다.
남쪽에서 실어온 대나무 사립에, 설리목(雪梨木)이 10여 그루, 살구나무와 복숭아나무가 있다.
뜨락엔 흰 돌을 깔았다.
끌어온 냇물이 섬돌 밑을 지나 네모진 연못이 된다.
이것이 이 집의 외양이다.

방 안에는 오궤(烏几)와 금(琴), 검과 향로, 술병, 다조(茶竈), 바둑판, 서화 두루마리들이 있다.
하나같이 값비싸고 품위 있는 것들이다.

주인은 게을러 낮닭이 울어야 일과를 시작한다.
칼을 뽑아 매만지다가 거문고도 몇 곡조 뚱땅거린다.
답답해 술 한잔을 마신다.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신다.
서화 구경을 하다가 바둑판을 꺼내 기보를 펴놓고 몇 판 둔다.
한참 하다 졸리면 벌렁 누워 다시 잔다.
이것은 그의 일과다.

그는 시간 죽이기의 절정 고수다.
손님이 찾아와 한참을 불러야 그는 부스스 일어난다.
아직도 해가 지려면 한참 멀었다.
글은 이게 전부다.
쓰다 달다 말이 없다.
이 손님이 바로 연암이다.

찾아보니 양인수는 이름이 양현교(梁顯敎·1752~?)다.
1780년 생원시에 합격한 수재였다.
생원시는 시험 과목이 사서오경이다.
그런 그의 방에 책이 한 권도 없다.
성균관에 가서 대과를 준비하고 있어야 할 그가 왜 이러고 있나?

그는 망한 고려의 수도 개성 출신이었다.
그 낙인 때문에 과거에 급제해도 그다음이 없었다.
경제력도 있고, 공부도 잘해 과거에 급제한 그는
자발적 자가 격리자가 되어 세상과 단절한 채 시간 죽이는 일을 연구한다.

연암의 속뜻은 이렇다.
"국가가 인재를 뽑아 이렇게 방치하는 것이 옳은가?
그를 게으르다고 비난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가?
나는 그의 고인 물 같은 시간이 눈물겹다. 그래서 분노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29/202004290405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