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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세일기] 아내, 아들, 때로는 이발소 아저씨한테… 나도 망신깨나 당했다

colorprom 2020. 4. 25. 15:22


[김형석의 100세일기]

아내, 아들, 때로는 이발소 아저씨한테… 나도 망신깨나 당했다


조선일보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20.04.25 03:00

[아무튼, 주말]

아내, 아들, 때로는 이발소 아저씨한테… 나도 망신깨나 당했다
일러스트= 김영석
'망신(亡身)했다'는 말이 있다.
가장 가까운 뜻은 체면(體面)이 깎였다든지, 서지 못했다는 뜻일 것 같다.

40대 초반에 1년 동안 미국에 체류하다가 귀국했을 때였다.
하루는 아내가 애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오늘은 내가 중대한 사건의 결정을 내려야겠다"고 선언했다.
사건의 내용은 내가 외국에 있는 동안에 박정희 정권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그때까지 쓰던 돈은 무효화하고 새 화폐로 바꾸어 준다는 것이다.

아내는 혹시 내가 숨겨놓거나 잊어버리고 있는 돈이 있을까 싶어 서재의 책갈피들을 뒤져 보았다고 했다.
한 책 케이스에서 거금이 나왔다. 발견하지 못했으면 그 돈이 무용지물이 될 뻔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가정의 경제권 일체를 내가 관할할 테니까 너희들도 동의하느냐"는 제안을 했다.
고의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다음부터는 아내가 주는 용돈을 받아 가면서 살아야 했다.
가장의 권리를 빼앗긴 것이다.

또 한 가지,
아내가 큰아들에게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가 하는 성경 강좌에 나가는데 너도 참석하라"고 권했던 모양이다. 몇 차례 출석했던 아들에게 내가 "도움이 되었느냐"고 물었다. 아들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좋은 말씀을 하시고 그대로 살지 못하면 어떻게 하실래요?"라는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아들도 나오지 않고 나도 권하지 못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내 직업 말입니까? 거짓말 많이 하는 일이지요"라고 했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하나,
유달영 선생이 30년 동안 다닌 이발소 아저씨에게
"30년 사이에 검은 머리를 백발로 만들어놓았는데 미안하지 않으냐?"고 농담을 해
모두 웃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도 한번 흉내를 내보겠다고 작심했다.
20여 년 동안 남산체육관 이발소에 다녔을 때였다.
몇 손님이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 보니까 20여 년이나 아저씨를 믿고 다녔는데
그동안에 검은 머리는 다 어디로 가고 얼굴에는 주름살만 생겼으니까 모두 아저씨 책임 아니세요?
이제 와서 옛날을 돌이켜 달라고 할 수도 없고…"라고 선생 흉내를 재연해 보았다.

모두들 웃었다. 그런데 이발소 아저씨 대답이 더 걸작이었다.
"선생님,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그동안에 제가 얼마나 늙었는지 보이지 않으세요?
선생님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일 겁니다. 나는 선생님 뵈올 때마다 '나만 억울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더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확실히 20년 동안에 아저씨가 나보다 더 늙어 있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건 사실이다. 잘못이 있다면 아저씨보다는 김 선생에게 있다"고 해 또 모두 웃었다.
흉내도 기술이 있어야 한다.
혹 떼러 갔다가 더 붙이고 왔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24/202004240274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