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12.28 03:00
[아무튼, 주말-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살아서 장례식, 서길수 교수
![살아서 하는 장례식을 연 서길수 전 서경대 교수가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고구려연구소' 앞 골목길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2009년 정년퇴직 후 강원도 산사에 들어가 3년간 죽음을 공부한 그는 '죽음이란 익은 과일이 떨어지는 것'이라며 '몰라서 두렵지, 이치를 받아들이면 슬프기는커녕 기쁘다'고 했다.](https://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12/27/2019122702419_0.jpg)
희한한 부고(訃告)를 받았다. 이메일 제목이 '살아서 하는 장례식과 출판기념회'였다. 멀쩡히 산 사람을 장사 지낸다고? 고인(故人)도 없고 통곡도 없는 초상집에 초대받은 셈이다. 모시는 글은 이랬다.
"나는 늘 마음에 죽음을 새기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할 유언을 준비하다 생각했습니다. '죽은 뒤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살아서 조문 온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고 가는 게 좋겠다.' 그러려면 장례식을 살아서 해야 했습니다."
서길수(75) 전 서경대 교수는 고구려발해학회(전 고구려연구회) 회장을 지내며 중국의 동북 공정에 맞서 싸운 학자였다. 2009년 정년퇴직하곤 "삶과 죽음에 대해 공부하겠다"며 머리 깎고 3년을 강원도 산사에서 보냈다. 그는 "책을 펴낼 때마다 장례식 겸 출판기념회를 하기로 했다"며 "앞으로 내 장례식을 몇 번 더 치를지 나도 궁금하다"고 했다. "내 죽음을 내가 보며 가게 해달라고 유언했어요. 연명 치료도 하지 말고 가능하면 집에서 세상을 떠나야지요. 숨을 거두면 알리지 말고 빨리 화장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지난 21일 오후 1시 서울 이화여대 근처 한 강연장. 서 교수가 한복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문상객을 맞았다. "제 장례식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중(喪中)인 큰며느리가 밝은 얼굴로 접수를 맡았다. 부의함은 없었다. '고구려의 본디 이름 고구리' '장수왕이 바꾼 나라 이름 고리' 등 신간 두 권을 필요한 사람만 샀다. 한 조문객이 "돌아가신 분에 대해 예를 표하러 왔는데 잘못 온 것 같습니다. 살아계시네요" 하는 바람에 웃음바다가 됐다. 이날 3시간 동안 누구도 울지 않았다.
"나는 늘 마음에 죽음을 새기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할 유언을 준비하다 생각했습니다. '죽은 뒤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살아서 조문 온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고 가는 게 좋겠다.' 그러려면 장례식을 살아서 해야 했습니다."
서길수(75) 전 서경대 교수는 고구려발해학회(전 고구려연구회) 회장을 지내며 중국의 동북 공정에 맞서 싸운 학자였다. 2009년 정년퇴직하곤 "삶과 죽음에 대해 공부하겠다"며 머리 깎고 3년을 강원도 산사에서 보냈다. 그는 "책을 펴낼 때마다 장례식 겸 출판기념회를 하기로 했다"며 "앞으로 내 장례식을 몇 번 더 치를지 나도 궁금하다"고 했다. "내 죽음을 내가 보며 가게 해달라고 유언했어요. 연명 치료도 하지 말고 가능하면 집에서 세상을 떠나야지요. 숨을 거두면 알리지 말고 빨리 화장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지난 21일 오후 1시 서울 이화여대 근처 한 강연장. 서 교수가 한복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문상객을 맞았다. "제 장례식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중(喪中)인 큰며느리가 밝은 얼굴로 접수를 맡았다. 부의함은 없었다. '고구려의 본디 이름 고구리' '장수왕이 바꾼 나라 이름 고리' 등 신간 두 권을 필요한 사람만 샀다. 한 조문객이 "돌아가신 분에 대해 예를 표하러 왔는데 잘못 온 것 같습니다. 살아계시네요" 하는 바람에 웃음바다가 됐다. 이날 3시간 동안 누구도 울지 않았다.
![초상집 조등](https://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12/27/2019122702419_1.jpg)
"제 장례식에 초대합니다"
장례식이 있기 열흘 전 서울 마포구 '고구리연구소'로 서 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우리가 '고구리'를 '고구려'로 잘못 부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야기는 뒤로 밀어놓고 본론으로 직행했다.
―살아서 하는 장례식이라니, 긴가민가했어요.
"삶에도 사계절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년퇴직할 때 가을이 끝나고 겨울로 들어선 셈이죠. 누구는 '인생은 그때부터'라고 하지만 그러다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하게 돼요. 저는 생사(生死) 문제를 확연히 알고 가고 싶었습니다."
―부고를 접한 주변 반응은.
"130명쯤 들어 있는 단톡방에 '장례식'이라는 단어를 툭 던졌는데 조용~해요. 아무도 대꾸를 안 했습니다. 진짜 죽는 줄 알고. 하하하. 뭐라고 댓글을 달아야 할지 막막했겠지요. 파격이 일단 성공했구나 싶었어요. 궁금하면 조문하러 올 테니까요."
―'장례식 축하드립니다'라는 댓글은 안 붙었나요.
"1주일 지나서야 '명복을 빕니다'와 '극락왕생하십시오'를 받았지요(웃음). 저는 뼛속까지 교육자라 그런 반응을 흥미롭게 관찰합니다. 지금은 이걸 충격으로 받아들이지만 앞으로 여러 번 하면 멈칫거리지 않고 축하할 수 있을 거예요."
―산사에 틀어박혀 3년간 죽음을 공부했다면서요.
"더 올라가면 1992년부터 '관법(觀法) 수행'을 시작했어요. 지금 박 기자와 이야기하는 나를 내가 보는 식입니다. 죽음은 전체 생애에서 마지막 부분이잖아요. 입시 공부, 취직 공부는 얼마나 열심히들 합니까. 정작 가장 중요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뭔가 깨달음을 얻고 하산했나요.
"3년 만에 깨달을 수 있다면 이 세상은 깨달은 사람으로 가득 찰 겁니다. 내 그릇으로는 이승에서 득도할 수 없다는 것은 깨달았지요(웃음). 불교에 회향(回向)이라는 말이 있어요. '함께 나누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남은 생은 정리하고 책을 써 남겨주는 일을 하기로 했지요. 그런데 2014년 봄에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아이코.
"육종암인데 수술받으면 '다리를 절게 될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지요. 왼쪽 허벅지에서 암 덩어리를 도려내보니 18㎝ 크기였어요. 암이라는 진단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나를 관찰했습니다. 수행을 검증할 기회니까요. 현실을 인정하고 큰 업을 하나 떼어낸다 생각하니 후련했어요. 병원에서 사람들은 사실 암 때문에 죽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럼요?
"암 자체보다는 암에 대한 걱정과 고통 때문에 죽어갑니다. 옛날에 읽은 아라비아 우화가 떠올랐지요. 한 청년이 바그다드에 가는데 동행자가 생겼습니다.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업어줬더니 그 동행자가 '나는 사실 바그다드 사람들을 죽이러 가는 페스트균인데 원래는 절반을 없앨 생각이었지만 네가 도와줬으니 3분의 1만 죽이겠다'고 했지요. 약속을 어겼을 때 불러낼 수 있는 주문까지 가르쳐주곤 먼저 가더랍니다. 그런데 청년이 바그다드에 도착해보니 절반이 죽은 거예요. 그 페스트균을 불러내 따지자 한다는 말이 '정확히 3분의 1만 죽였는데 나머지는 놀라서 죽었다'는 거예요(웃음). 사람들은 실제 고통보다 훨씬 더 키워서 고통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육종암은 어떻게 됐나요.
"수술 받고 두어 달 뒤에 문제가 생겼어요. 퉁퉁 부어오른 거예요. 의사도 당황했습니다. 암에 칼을 대면 더 번성할 수 있다는데 그거로구나 싶었지요. MRI를 찍고 결과를 기다리는 1주일이 죽음에 대해 가장 구체적으로 골몰한 시간입니다. 암 환자들이 모이는 사이트에 처음 들어가 봤어요. '사람은 여러 가지 병으로 죽는데 암은 그 죽을병의 하나'라는 글을 읽으니 위안이 되더군요."
장례식이 있기 열흘 전 서울 마포구 '고구리연구소'로 서 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우리가 '고구리'를 '고구려'로 잘못 부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야기는 뒤로 밀어놓고 본론으로 직행했다.
―살아서 하는 장례식이라니, 긴가민가했어요.
"삶에도 사계절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년퇴직할 때 가을이 끝나고 겨울로 들어선 셈이죠. 누구는 '인생은 그때부터'라고 하지만 그러다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하게 돼요. 저는 생사(生死) 문제를 확연히 알고 가고 싶었습니다."
―부고를 접한 주변 반응은.
"130명쯤 들어 있는 단톡방에 '장례식'이라는 단어를 툭 던졌는데 조용~해요. 아무도 대꾸를 안 했습니다. 진짜 죽는 줄 알고. 하하하. 뭐라고 댓글을 달아야 할지 막막했겠지요. 파격이 일단 성공했구나 싶었어요. 궁금하면 조문하러 올 테니까요."
―'장례식 축하드립니다'라는 댓글은 안 붙었나요.
"1주일 지나서야 '명복을 빕니다'와 '극락왕생하십시오'를 받았지요(웃음). 저는 뼛속까지 교육자라 그런 반응을 흥미롭게 관찰합니다. 지금은 이걸 충격으로 받아들이지만 앞으로 여러 번 하면 멈칫거리지 않고 축하할 수 있을 거예요."
―산사에 틀어박혀 3년간 죽음을 공부했다면서요.
"더 올라가면 1992년부터 '관법(觀法) 수행'을 시작했어요. 지금 박 기자와 이야기하는 나를 내가 보는 식입니다. 죽음은 전체 생애에서 마지막 부분이잖아요. 입시 공부, 취직 공부는 얼마나 열심히들 합니까. 정작 가장 중요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뭔가 깨달음을 얻고 하산했나요.
"3년 만에 깨달을 수 있다면 이 세상은 깨달은 사람으로 가득 찰 겁니다. 내 그릇으로는 이승에서 득도할 수 없다는 것은 깨달았지요(웃음). 불교에 회향(回向)이라는 말이 있어요. '함께 나누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남은 생은 정리하고 책을 써 남겨주는 일을 하기로 했지요. 그런데 2014년 봄에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아이코.
"육종암인데 수술받으면 '다리를 절게 될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지요. 왼쪽 허벅지에서 암 덩어리를 도려내보니 18㎝ 크기였어요. 암이라는 진단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나를 관찰했습니다. 수행을 검증할 기회니까요. 현실을 인정하고 큰 업을 하나 떼어낸다 생각하니 후련했어요. 병원에서 사람들은 사실 암 때문에 죽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럼요?
"암 자체보다는 암에 대한 걱정과 고통 때문에 죽어갑니다. 옛날에 읽은 아라비아 우화가 떠올랐지요. 한 청년이 바그다드에 가는데 동행자가 생겼습니다.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업어줬더니 그 동행자가 '나는 사실 바그다드 사람들을 죽이러 가는 페스트균인데 원래는 절반을 없앨 생각이었지만 네가 도와줬으니 3분의 1만 죽이겠다'고 했지요. 약속을 어겼을 때 불러낼 수 있는 주문까지 가르쳐주곤 먼저 가더랍니다. 그런데 청년이 바그다드에 도착해보니 절반이 죽은 거예요. 그 페스트균을 불러내 따지자 한다는 말이 '정확히 3분의 1만 죽였는데 나머지는 놀라서 죽었다'는 거예요(웃음). 사람들은 실제 고통보다 훨씬 더 키워서 고통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육종암은 어떻게 됐나요.
"수술 받고 두어 달 뒤에 문제가 생겼어요. 퉁퉁 부어오른 거예요. 의사도 당황했습니다. 암에 칼을 대면 더 번성할 수 있다는데 그거로구나 싶었지요. MRI를 찍고 결과를 기다리는 1주일이 죽음에 대해 가장 구체적으로 골몰한 시간입니다. 암 환자들이 모이는 사이트에 처음 들어가 봤어요. '사람은 여러 가지 병으로 죽는데 암은 그 죽을병의 하나'라는 글을 읽으니 위안이 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