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연말]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윤평중 교수, 조선일보)

colorprom 2019. 12. 27. 16:14


[윤평중 칼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조선일보
                         
  •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입력 2019.12.27 03:17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을 세밑과 새해로 분별하는 건 의미와 소망 입히려는 것
폐허서 세운 한국 현대사… 자기 환멸을 허락하지 않아
세밑 밤하늘의 별빛에서 '우주 속의 나'를 보길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천하에 어둠이 가득하다. 무도한 현실 정치가 미세 먼지 자욱한 세상을 더 숨 막히게 한다.

마음 둘 곳 없는 시민들의 절망 어린 한숨이 깊다.


세밑에는 우리 모두 질주를 멈추고 지난 일을 돌아보며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돌이켜보면 정치뿐 아니라 모든 현실이 항상 난장(亂場)이었다.

인간의 삶과 역사는 난장판을 뚫고 가면서 의미를 새겨나간 고투(苦鬪)의 기록이다.

어두운 시대의 초상은 결코 어둡게 묘사되지 않을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김환기(1913~1974)의 대작(大作) '우주'(Universe)가 홍콩 경매에서 132억원을 기록했다.

한국 미술 경매사상 최고가다.

값을 떠나 이 작품은 광활하고 오묘하다.

하지만 이론물리학이 그리는 우주는 예술가의 상상력을 넘어선다.

과학으로 관측할 수 있는 물질(별과 은하+성간물질)은 우주 전체의 4%에 불과하다.


우주의 대부분은 불가해한 암흑물질(23%)과 암흑에너지(73%)이거니와 정말로 놀라운 건 나의 탄생이다.

이 우주에서 내가 태어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우주가 생겨날 확률, 생명체가 진화할 확률, 지구에서 내가 수태될 확률을 곱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인간은 '이 우주가 왜 있는가?'를 묻는다.

인간의 마음이 우주와 일대일(一對一)로 만나는 경이로운 순간이다.

생각하는 인공지능(AI)이 등장하는 특이점(singularity point)이 멀지 않았다는 속설도 성급하다.

알파고(Alphago)를 목격한 우리 사회에선 미래에 인공지능이 인류를 지배할 것이라고 믿는 이가 많다.

그러나 난 자기성찰공감능력을 지닌 기계의 출현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연산 능력과 추론은 지능의 주요 기능이지만 인간의 마음은 계산 능력으로 환원할 수 없다.


인간은 삶과 우주의 의미에 대해 궁극적 질문을 던지고,

이웃의 고통을 공감하며 연민하는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2019년 대한민국에선 공감과 연민은커녕 생각이 다른 이들을 난폭한 말로 서로 난자(亂刺)했다.

존재의 의미를 탐색해야 할 언어가 흉기가 되어 서로를 베었다.

하늘을 찌른 진영 간 적대와 증오 앞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마음자리가 초토화되었다.

진영 논리가 비판적 사유(思惟)와 상상력을 질식시켰다.

오직 '우리 편' 여부만 따지는 세태 속에서 정치는 전쟁으로 타락하고 정의는 허공에 흩어졌다.

자기성찰과 공감 능력이 사라진 곳에 인간다운 염치와 부끄러움이 남아날 리 없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한국 사회는 벌거벗은 동물의 세계로 추락했다.

말 그대로 헬조선이 되었다.

2020년 전망도 그리 밝아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폐허에서 나라를 세웠고 국가 멸절(滅絶) 직전의 6·25전쟁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열정으로 세계 10대 경제 대국을 일구고 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를 이루었다.

'한국의 기적'은 사실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았던 한국인의 피와 땀이 오늘의 성취를 추동했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는 자기 환멸을 허락하지 않는 역사이며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새해는 함께 살아가는 '마음의 습관' 위에 공동체를 새롭게 정립해야 할 시점이다.

상호 공존소통의 첫걸음은 오류 가능성(fallibility)을 시민정신의 준칙으로 실행하는 데 있다.

모두가 존엄한 우주적 존재임과 동시에

치명적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자성(自省)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권력정치의 향배가 모든 걸 결정하지는 않는다.

시민적 덕성과 인간의 품격을 접목시켜 일상에 뿌리내리는 게 더 중요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나누어 세밑새해로 분별한다.

우리네 삶에다 의미와 소망의 무늬를 입히기 위해서다.

한 해의 끝, 밤하늘의 별빛에서 '우주 속의 나'를 보는 건 절망을 딛고 희망을 확인하는 일이다.

광대무변한 우주와 미미한 인간이 만나는 체험이다.

이것은 신비주의가 아니다. 현대 과학이 뒷받침하는 실존 경험이다.

인간은 잠깐이나마 아수라(阿修羅) 같은 현실을 넘어선 성찰의 순간을 가져야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김환기는 작품 '우주'와 함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걸작을 남겼다.

시인 김광섭(1906~1977)의 시에서 빌려온 제목 자체가 존재 물음에 대한 심원한 응답이다.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모든 분들께 삶의 의미를 소망으로 밝히는 새해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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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2/26/201912260317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