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처음 살아보는 나이 (김경련, 조선일보)

colorprom 2019. 12. 27. 14:42



[일사일언] 처음 살아보는 나이


조선일보
                         
  • 김경련 2019 신춘문예 동시 당선자
             
입력 2019.12.27 03:00

김경련 2019 신춘문예 동시 당선자
김경련 2019 신춘문예 동시 당선자

텔레비전에서 어느 노인이 인터뷰하고 있었다.
'70을 살아보니 어떻습니까?'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답이 걸작이었다.
"나도 처음 살아보는 나이라 잘 모르겠네요."
그렇다. 다섯 살 아이나 70 노인이나 처음 살아보는 나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유독 노인에 대한 편견을 갖곤 한다.
동작이 느리다고 마음마저 느리진 않을진대, 완고함은 신중함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는 건데,
나 역시 젊은 시절에는 노인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았던 적이 더러 있었다.
그런데 오늘 버스에서의 경험은 나의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나를 깨닫게 해 주었다.

출근 시간대가 지나면 버스는 한가하다.
버스에 타고 있던 나는 심심함도 달랠 겸 버스에 오르는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 보고 있었다.
처음 손님은 80세 정도 된 할아버지였다. 몸이 많이 불편한 듯 힘겹게 계단을 올라 겨우 자리에 앉았다.
다음으로 어느 청년이 탔다. 그 청년은 아주 건장한 모습답게 버스 계단을 훌쩍 뛰어올랐다.
그런데 웬일인지 계산기 앞에서 카드를 뗐다 붙였다 얼굴까지 빨개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갑자기 "얼마가 부족하오." 조금 전 거동이 힘들어 보이던 그 할아버지였다.
"4백원이요." 숨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청년이 대답했다.
"내 카드로 하시오." 불편한 팔을 들어 카드를 내밀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그리고 뒤이은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기사님의 한마디, "이번만 봐 드릴 테니 그냥 타세요."

그 청년은 기사님께 목례하고는 다시 할아버지 쪽으로 와서 공손하게 인사하고 뒷자리로 갔다.


처음부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난 한동안 그 훈훈함이 가시질 않았다.

만약 반대의 경우였다면 어땠을까. '노인이라 저렇구나' 하고 방관만 하지는 않았을까.

못나고 부끄러운 내 안의 편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순간이었다.


젊으면 젊은 대로 나이 들면 나이 든 대로 누구나 처음 살아보는 나이,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단 하나, 삶의 훈장과도 같은 주름살이 조금 더 있을 뿐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2/27/20191227001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