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세상]

[영국]영국 탈북민

colorprom 2019. 11. 18. 15:10



    

"한국선 자식까지 '탈북 딱지'말 안통하는 영국이 낫다"


조선일보
                             
  • 런던=윤형 탐험대원
  • 취재 동행=김명성 기자
    •          
    입력 2019.11.18 03:00

    [청년 미래탐험대 100]

    [49] 뉴몰든 탈북민들의 고백탈북민과 어울려 살고픈 24세 윤형씨

    목숨 걸고 脫北했지만 결국 脫南해외 간 1500명중 절반이 살아
    "한국선 동포보다도 못한 대접, 내 아이도 밑바닥 삶 살까봐 불안
    영국출신이라고 상처 안줘자립할 때까지 믿고 기다려주죠"

    어림잡아 3만5000명이 생명을 걸고 북한을 탈출해 타지에 머물고 있다.

    한국33000, 해외1500이 산다.

    이 가운데 영국 런던 남서쪽 소도시 뉴몰든에 700이 거주한다고 추정된다.


    영국한국을 거쳐온 탈북민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원칙이지만

    이 중 상당수는 한국에 살았단 사실을 숨기고 영국에 난민 자격으로 입국한다.


    이들은 왜 탈북에 이어 탈남(脫南)에 나섰을까. 그것도 말 한마디 안 통하는 영국으로 말이다.

    가까운 한국을 두고 먼 나라 영국으로 간 탈북민들을 만나고 왔다.

    그중 세 명의 이야기를 전한다.



    최중화(53): 1990년대 후반 탈북중국 거쳐 2001년 한국―2009년 영국

    "북에서 군 복무를 하다가 집에 잠시 들렀는데 배급이 끊겨 다들 굶고 있더군요.
    '여기 있으면 어차피 죽는다'란 생각에 무작정 두만강을 탔습니다(건넜습니다).
    한국에 와 철물점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7개월 만에 그만뒀어요.
    이후 염색 공장 등을 전전하다 10년 전 영국으로 왔죠.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이었어요.
    한국에서 저는 밑바닥이었습니다. '이대로면 우리 애들도 바닥이겠다' 싶더군요.
    더 아래로 떨어질까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택배 회사에서 일하다 다리를 다쳐서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어요.
    당장 먹고살기가 어려웠어요.
    지원금을 신청해봤는데 제가 돈을 직전까지 벌었고 재산까지 있어서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 재산이란 게 12년 된 '세피아' 차 한 대였거든요.

    영국은 다르더군요. 소득이 생겨도 탈북 후 5년까지는 지원을 안 끊어요.
    대신 지출을 꼼꼼하게 관리해요. 한 주에 식료품 구입에 얼마를 썼는지 등을 확인해요.
    여기서도 탈북민은 대부분 육신을 놀리는(몸 쓰는) 일을 해요. 큰돈은 못 벌어요.
    영국 정부는 우리가 스스로 먹고살 준비를 하도록, 믿고 기다려준다는 느낌은 들어요."

    2001년 한국으로 탈북했다 8년 만에 영국으로 간 탈북민 최중화(왼쪽)씨와 윤형 탐험대원이 얼마 전 영국 뉴몰든에서 만났다. 최씨는 “영국은 우리가 스스로 먹고살 준비를 하도록 믿고 기다려준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2001년 한국으로 탈북했다 8년 만에 영국으로 간 탈북민 최중화(왼쪽)씨와 윤형 탐험대원이
    얼마 전 영국 뉴몰든에서 만났다.
    최씨는 영국은 우리가 스스로 먹고살 준비를 하도록 믿고 기다려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했다. /김명성 기자

    나는 세상을 뜬 채 지난 7월 발견된 한국의 탈북민 모자(母子)가 떠올랐다.

    이들은 가난으로 굶어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알려졌다.

    동사무소에 생계지원비를 신청했지만

    중국에 가서 이혼 서류를 가져오라는 복지 담당 공무원의 요구를 받았다고 한다.


    혹시 영국이었다면 어땠을까. 마음이 아팠다.

    김성민(40·가명): 2000년대 중반 탈북―2007년 한국―2009년 영국

    "중국으로 탈북해 1년을 지내다가 브로커에게 450만원을 빚지고 한국에 왔어요.

    여의도에서 음식 배달 뛰고 대리운전 하고 택배 승합차 몰고 '알바'해서 갚아 나갔죠.

    제대로 된 취업, 엄청 하고 싶었죠. 그런데 탈북민은 안 되니까….


    구직 활동 해봤어요? 어렵잖아요. 탈북민은 거의 불가능해요.


    북에 남기고 온 가족도 영국으로 온 이유 중 하나였어요.

    북한한국적국(敵國)으로 알고 있거든요.

    지금 정부가 아무리 그렇게 해도(유화 정책을 펴도) 한·미·일을 엄밀한 적으로 보고 있어요.

    그 나라들로 탈북했다 하면 남은 가족이 너무 힘들게 살아요.

    북에 남은 가족이 한국에서 보낸 돈을 받았다가 걸리면 북한은 '국정원 돈 받은 간첩'이라고 해요.

    즉 사형도 당할 수 있는 거예요.

    남은 가족 걱정이 겹쳐 빠져나왔죠.


    영국에 와선 식당에서 설거지부터 시작해 10년을 지냈네요.

    버스 한번 안 타고 수 시간씩 걸어 다니며 모은 돈으로 푸드트럭을 샀어요.

    추운 날 큰 길가를 걸으며 '저렇게 자가용이 많은데 내 건 없을까' 눈물 났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조금씩 사업을 키웠어요.

    이젠 어느새 번듯한 식당 주인입니다."

    박청(30·가명): 2007년 탈북한국 16개월 거주―2009년 영국

    여전히 어려운 한국의 탈북민 통계 표

    "열아홉에 탈북했어요.

    하나원(탈북민정착 지원 시설) 나와서 취업하려고 애쓰다가 1년 반 만에 포기하고 영국으로 왔어요.

    '인종차별'(그는 계속 '인종차별'이란 표현을 썼다) 문제도 있고….


    처음에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인데 식당 광고 보고 전화를 했어요.

    말투가 다르니까 '(중국) 교포세요?' 그러는 거예요.

    '북한 사람인데요' 하니까 '우리 북한 사람 안 써요!'라고 전화를 확 끊더라고요.

    이태원에 독일인 사장님이 하는 빵집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어요.

    사장님은 오히려 챙겨주는데 한국 직원들이 험한 말을 자주 했어요. 상처를 많이 받았죠.

    '어차피 차별받을 거면 영국에 가자' 하고 마음먹었어요.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영어라도 공짜로 가르치지 않겠나 했어요.


    탈북민을 가장 색안경 끼고 보는 나라가 한국 아닐까도 싶어요.

    여기도 사우스(南)·노스(北) 코리아 구분을 하는 이가 간혹 있지요.

    하지만 한국에 비해 훨씬 덜해요. 남북한 출신이 다 같은 이방인이니까요."


    [미탐100 다녀왔습니다]


    "탈북 청년도 취업·진로문제로 힘든 한국 보통 젊은이"


    언론학을 전공하며 '미디어 눈'이라는 비영리 온라인 미디어를 만들어 활동하는 대학생입니다.

    지난해 한국에 사는 탈북 청년을 취재했습니다.

    탈북민을 만나기 전엔 말투나 외모 뭔가는 다를 거란 편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만난 탈북 청년들은 저처럼 고향(제 고향은 경남 창원입니다)을 떠나

    멀리서 대학 생활을 하며 취업과 진로 문제로 힘들어하는 보통 젊은이였습니다.

    목숨을 건 탈북 후 한국에 왔음에도 머나먼 영국으로 이주한 탈북민들을 영국 뉴몰든에서 만났습니다.

    왜 한국 대신 영국을 택했는지 정착은 어떻게 했는지 아픈 사연을 들었습니다.


    탈북자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더 큰 차별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오랜 분단이 낳은 비극처럼 느껴졌습니다.

    한 탈북민이 "한국은 이주민이라면 싹 다 차별하는 사회"라고 할 땐 좀 부끄러웠습니다.


    뉴몰든에선 한국인, 탈북민, 중국 동포 등이 어우러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하재성 영국 킹스턴시 시의원은 "여긴 통일을 미리 경험할 수 있는 통일촌"이라며 웃었습니다.


    한국이 다름을 좀 더 포용하는 사회가 되도록 저부터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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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18/201911180033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