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세상]

[독일][베를린 장벽 붕괴 30년]

colorprom 2019. 11. 16. 16:50






장벽 붕괴 때 동독 돈 모은 외교관, 서독 마르크와 1:1 교환 '대박'


조선일보
                         
  •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입력 2019.11.16 03:00

[아무튼, 주말-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일러스트= 안병현
일러스트= 안병현
지난주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열린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에 다녀왔다.

독일은 북한 외교관으로 있을 때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2004년 런던 주재 북한 대사관 참사로 파견돼 런던으로 갈 때는
온 가족이 베를린에 들러 브란덴부르크문베를린 장벽을 돌아보기도 했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대한민국 국민이 돼 다시 가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 1989119은 내가 북한 외무성에 들어간 지 1년쯤 지났을 때였다.
20대 후반 '붉은 외교관(공산당 외교관)'이었던 나는 동독이 '물 먹은 담벽처럼'
(북한 농촌에선 시멘트가 적어 집 지을 때 나무 대에 진흙을 바른 뒤 겉에 시멘트를 약간 바른다.
공사 중 비가 오면 흙이 씻겨 내려 벽이 무너지는 일이 종종 있다)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김일성김정일동독의 실책을 분석하라외무성에 지시했다.
살펴보니 가장 큰 오류는
동독 정권이 사회주의 복지 시스템만 잘 운영되면
주민이 서독 방송을 봐도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현실은 반대였다.
1970년대부터 서독 TV를 봐온 동독 주민은 서독 TV에 비친 물질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에 매혹됐다.

당국의 감시만 있으면 통제가 가능하다고 보고
동서독 주민 사이에 통행과 서신 교환을 허용한 것도 큰 실책이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898헝가리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제한을 풀면서
동독 주민 1만여 명이 한꺼번에 헝가리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한 것이었다.

김씨 일가북한 주민이 중국이나 러시아를 거쳐 대량 탈북하면
휴전선도 물 먹은 담벽처럼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김정일은 자본주의 불순 사상이 북한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창문을 열기 전에 철저히 방충망부터 먼저 쳐야 한다'는 '모기장 이론'을 내놓았다.

독일 통일이 급물살을 타자 베를린에 나가 있던 북한 외교관들
'큰돈은 건국과 망국 때 벌어야 한다'며 한몫 챙기려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서독 정부가 동독 화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관심이 쏠렸다.

일부 언론에선 서독이 동독 화폐 무효화를 선포하고 쿠폰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했고,
전문가들은 현실 가치에 맞춰 교환 비율을 정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동서독 간 공식 환율은 21이었으나
국가 부도 상태에 이른 동독의 화폐는 거의 휴지조각으로 여겨졌다.
암시장에는 41로 교환되고 있었다.

강심장이었던 한 북한 외교관은
'통일이 되면 동독 주민에게도 서독과 꼭 같은 삶을 보장하겠다'는 콜 총리의 말이 실린 신문 1면 기사를
가위로 오려 가슴속에 품고 다녔다.
그는 대사관 동료는 물론이고 북한 회사들에 있던 지인에게도 연락해
수십만마르크를 베를린으로 가져와 암시장에서 동독 마르크를 사들였다.

몇 달 동안 가슴을 졸였는데 화폐 교환 비율이 11로 정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서독 정부는 동독 주재 외교관의 계좌에 있던 동독 마르크를 모두 교환해 줬다.

옆 동료가 일확천금을 얻는 것을 본 대사관 직원들은 다음 작전을 준비했다.
동독 통화 가치가 2배 이상으로 절상되자 동독 주민은 만세를 불렀지만 동독 기업들은 파산에 직면했다.
북한 외교관 여러 명이 매물로 나온 값싼 동독산 초콜릿과 손풍금을 대량 구입해 북한으로 보냈다.
중국제나 소련제만 봐왔던 북한 주민에게 대인기였다.
독일에 출장 갈 때마다 아내와 동료가 초콜릿을 부탁했다.
재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저렴한 상점인 리들(LIDL)이나 알디(ALDI)에서 초콜릿을 샀다.

그때 생각이 나 이번에 독일에 갔을 때 '리들'에 들러 초콜릿을 샀다.
아내와 애들에게 주었더니
한국에 와서 세상 좋다는 초콜릿을 다 맛보았는데도 독일 초콜릿이 역시 최고라고 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나는 30년 후면 우리나라도 통일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올해가 만 30년이 되는 해지만 통일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 역사적 과제를 풀 날은 과연 언제 올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15/2019111502394.html



                       

[특파원 리포트] 베를린에서 들은 통일 조언


조선일보
                         
             
입력 2019.11.12 03:14

손진석 파리특파원
손진석 파리특파원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앞두고 베를린 시내의 독일경제연구소(DIW)에서
알렉산더 크리티코스 연구위원을 만났다.
통일 이후 동·서독 격차를 연구해온 학자다.

크리티코스 박사에게 '한국이 통일을 하게 되면 어떤 결정이 가장 중요할 것으로 보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환율"이라고 했다. ·북한 화폐를 몇 대 몇의 비율로 교환할지난제라는 것이다.

"북한 통화 가치를 너무 낮게 잡으면
북한 사람들이 손에 쥐거나 버는 돈이 적어 불만을 품고 죄다 남쪽으로 몰려갈 겁니다.
반면 너무 높게 잡으면
생산성이 낮은데도 고임금을 줘야 하니 북쪽 고용주의 부담이 커지는 부작용이 생길 겁니다.
·서독 마르크화를 거의 11로 교환한 독일이 그런 경험을 했죠.
최적의 교환 지점을 잡아야 할 텐데 그게 쉬울 리 있나요."

북측 돈 가치를 어느 수준으로 수용할지가 정치·사회적으로도 파장을 부를 거라는 얘기다.
크리티코스 박사는 화폐 교환을 예시로
막상 통일을 하면 칼날 위를 걷는 어려운 결정을 수없이 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킨 것이다.

다른 싱크탱크인 할레경제연구소(IWH)의 라인트 그로프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도
같은 맥락의 대화가 흘렀다.
그로프 원장은 동독 기업에 준 보조금 이야기를 꺼냈다.
통일 이후 독일 정부는 동독 국영기업들을 민간에 매각했는데,
민영화 충격을 줄이기 위해 인수자가 고용을 유지하면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했다.
갑작스러운 구조조정으로 서독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양산되지 않도록 버팀목을 설치한 것이다.

그로프 원장은 "당시 상황에 비춰볼 때 필요한 측면이 있었겠지만
동독 기업들이 나랏돈을 받아 안주하면서 경쟁력을 잃었다"며
"그 여파로 아직도 동독에 대기업이 부족해 동·서 격차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한국도 통일을 하면 비슷한 보조금을 지급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준다고 하면 몇 년을, 얼마나 줄지도 정해야 한다.
모두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독일은 통일 충격을 줄이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동독 엑소더스'를 막지 못했다.
동독 인구(베를린 제외)는 통일 당시 1700만명이었지만 올해는 1360만명에 그친다.
남·북한 차이는 동·서독 차이보다 훨씬 크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남북이 합치면 덩치가 커져 극일(克日)의 발판이 된다는 밑그림을 내놓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실제 통일의 순간이 다가와 실행의 차원으로 들어가면
국가의 명운을 좌우할 의사 결정이 얼마나 많이 기다리고 있을지 가늠조차 쉽지 않다.

구호나 청사진으로 통일을 완수할 수는 없다.
좀 더 냉철하고 이성적인 준비가 이뤄져야 한다.
베를린 장벽 30주년을 맞아 메르켈 총리가 "완전한 동·서 통합에 50 이상 걸릴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을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11/2019111103589.html



작은 것부터 하나씩 협상 西獨, 때로는 채찍도 들었다


조선일보
                         
             
입력 2019.11.09 03:00

오늘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브란트, 화해 정책뿐 아니라 동독 인권탄압 기록도 축적해
훗날 범죄자 기소할 증거 모아

'베를린, 베를린'
베를린, 베를린|이은정 지음|창비|260쪽|1만6000원

30년 전 오늘(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했다. 장벽을 무너뜨린 독일의 경험은 이제 그들에게 지나간 역사가 됐다. 하지만 분단 해소라는 숙제를 풀지 못한 한반도엔 성공 사례로 연구를 거듭해야 할 현재형 교훈이다. 1984년부터 독일에 머물며 베를린자유대학 교수(한국학)로 재직 중인 저자는 냉전의 치열한 각축장이자 분단의 최전선이었던 베를린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한반도 분단 극복의 실마리 찾기에 도전한다.

베를린을 둘러싼 국제정치는 이 도시를 동독 내 섬으로 고립시키고 동시에 둘로 쪼갰다. 저자는 그러나 분단을 낳은 정치역학보다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시민들이 기울인 노력에 주목한다. 1961년 장벽이 들어서기 직전까지 상대 지역에 있는 직장으로 출근하는 양측 주민이 20만명이나 됐다는 사실을 비중 있게 다루며 베를린은 결코 완전히 분리된 적이 없다고 강조한다. 동·서 베를린에서 상대방 우표를 사용한 편지를 반송하는 우편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양쪽 주민은 상대 지역에 편지를 보낼 때 동·서독 우표를 모두 붙이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우편 전쟁 사태는 당국 간에 서로의 우표를 인정하기로 하면서 종결됐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시민들이 장벽 위에 올라 환호하고 있다.
198911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시민들이 장벽 위에 올라 환호하고 있다. '주의! 당신은 지금 서베를린을 벗어나고 있다'고 쓴 경고문 위에 누군가 '어떻게?'라고 낙서했다. 장벽 뒤로 브란덴부르크 문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1949년 이후 장벽이 들어설 때까지 동독을 탈출한 주민은 300만명에 이른다. 장벽은 물리적으론 서베를린을 둘러쌌지만 목표는 동독 주민을 장벽 밖에 가두는 것이었다. 동독 주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동베를린 일부 주유소는 경찰 차량의 주유를 거부하는 것으로 항의했다. 저자는 19세기 후반부터 조성된 도시 인프라를 둘로 나누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베를린 지하에 거미줄처럼 뻗은 하수도와 서베를린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도중에 동베를린을 통과해야 하는 지하철 노선은 베를린 주민들에게 이 도시가 원래 하나였음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고 썼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교류 옹호론을 펴지는 않는다. 동독이 끝내 장벽 설치를 강행하자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자 훗날 총리가 되어 동독과의 화해 정책을 펴는 빌리 브란트는 시민들에게 동독 국영 철도가 운영하는 도시철도 탑승을 거부하자고 호소했다. "서베를린 주민이 낸 차비가 장벽 건설에 쓰여서는 안 된다"는 브란트의 주장에 시민들이 호응하며 도시철도 이용객 수는 1주일 만에 50만명에서 10만명으로 급감했다. 브란트는 동독 내 모든 인권 탄압과 고문, 협박 사례를 기록해 훗날 통일되면 범죄자를 기소할 증거 자료로 쓰자며 '잘츠기터 중앙인권침해기록보관소' 설립도 주도했다. 이후 동독의 정치범들은 가혹 행위를 당할 위험에 처하면 "잘츠기터에 알리겠다"고 경고했다. 동독인이 장벽을 넘다가 사살되면 총을 쏜 군인의 이름을 곁에 있던 동료 병사가 장벽 너머로 크게 외쳐 기록하게 했다. 저자는 이처럼 브란트가 교류 못지않게 동독인의 인권 신장을 위해 애쓴 사례들을 들며 한국 진보 진영이 "브란트의 신동방 정책 덕분에 독일이 통일됐다는 점만 보려 한다"고 꼬집는다.

저자는 통일로 향하는 길에서 동·서독 사이에 이루어진 여러 성취와 진전들은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는 협상 테이블에 올리지 않고 합의할 수 있는 것부터 합의한다는 '작은 걸음 정책'을 표방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이견에도 불구하고 교류를 확대하자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이산가족 방문은 고사하고 서신 교환조차 훼방하고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쪽은 북한 정권이다. 무비판적인 북한 편들기로 일관한 끝에 평화도 통일도 더 멀어져 버린 현 정부의 패착에서 벗어나려면 원칙을 고수하며 때로 채찍도 들 줄 알았던 브란트식 접근법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서독이 기여한 바를 소개한 책도 함께 읽으면 좋다. 이용준 전 외교부 북핵외교기획단장은 '대한민국의 위험한 선택'에서 서독의 모든 동독 지원은 동독인의 인권 신장에 초점을 두고 이뤄졌다고 말한다.

대담집 '통일의 길, 바로 가고 있는가'에서 이기주 전 독일 대사는 동·서독 간 민간 교류가 동독인들로 하여금 반체제 정서를 불러일으켜 통일의 밑거름이 됐다고 분석한다.

'얄타에서 베를린까지'(윌리엄 스마이저 지음)는 2차대전 패배에서 통일에 이르는 독일 현대사 전 과정을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09/2019110900017.html

"우리보다 왜 난민을 더 우대하나"분노한 동독인들, 극우 지지자로


조선일보
                         

입력 2019.11.05 03:00

[베를린 장벽 붕괴 30]
극우 AfD, 동독지역서 지지율 1
"메르켈은 거꾸로 가고있다" 목청

지난 2일 독일 포르스트의 수퍼마켓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한 노인은
"정부가 난민보다 동독 사람부터 신경 써줘야 하는데 (앙겔라) 메르켈은 거꾸로 하고 있다"며 목청을 키웠다.

·서독 지역 갈등은 2015년 이후 독일에 200만명 안팎의 중동·아프리카 난민이 몰려오기 시작하면서

더 첨예해졌다.

독일 정부는 인도적 차원에서 난민들에게 최소한의 생활 보장을 해주고 있는데,

동독인들은 이런 메르켈 내각에 불만을 표시한다.

이 반발 심리가 난민에 적대적인 극우정당 '독일을위한대안당(AfD)' 지지로 연결되고 있다.

2013년 창당한 AfD는 이듬해 2014년 총선에서 한 석도 얻지 못했지만

난민들이 몰려온 이후 치러진 2017년 총선에서는 원내 3당으로 약진했다.

전통적인 독일 양대 정당인 기민당(200석), 사민당(152석)에 이어 AfD는 91석을 갖고 있다.


동독 지역 지지도는 더 높다.

지난 7월 주간 빌트암존탁의 동독 지역 정당 선호도 조사에서 AfD(23%)가 기민당(22%)을 누르고 1위였다. 올해 브란덴부르크·튀링겐·작센 등 동독 지역 3개 주의 지방선거에서 AfD는 모두 2위에 올랐다.

AfD의 포르스트 지역당 간부인 다비드 코비알카(35)씨는

"통일 이후 소외감을 느낀 동독인들의 분노가 난민 유입을 계기로 끓어오르고 있다"며

"동독인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AfD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김상국 베를린자유대 연구교수는

"개방사회였던 서독과 달리 동독인들은 폐쇄 사회에서 살았고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교육을 받은 탓에

난민에 대한 거부감이 서독인들보다 훨씬 크다"고 했다.

AfD는 여성보다는 남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

뉴욕타임스는 "동독 남성들이 사회주의 체제 시절 '노동자 계급의 영웅'으로 떠받들리다가

통일 이후 갑자기 '자본주의 낙오자'로 몰락하면서 상실감을 맛봤다"며

"이들은 극우 정당에서 동독 시절 향수를 느낀다"고 했다.

AfD 인기는 전 연령대에 퍼져 있다.

지난달 튀링겐주 지방선거에서 AfD는 60세 이상에서만 좌파당에 밀려 2위를 기록했을 뿐,

18~29세, 30~44세, 45~59세 사이에서 모두 득표율 1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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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05/201911050018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