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일기]
해방 후, 미 군정 때 (美軍政期) 였다.
그런데 누구도 하지에게 그 실수를 지적하거나 충고하는 이가 없었다.
하지는 처음엔 얼굴을 붉히면서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며칠 전 R씨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S에게는 또 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느냐고 지적했더니
항의 없이 수긍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인촌은 "이런 얘기를 해 대단히 죄송하지만 나는 당신과 우리나라를 위해
함께 일하는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진심 어린 자세를 본 하지가 악수를 청했다.
돌아오면서 인촌은 '하지가 내 진정에서 나온 충고를 받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괘씸하게 여긴다면 서로 불행해지지 않겠는가 하는 걱정도 했다.
그다음에는 다시 만나거나 얘기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몇 달 후 어떻게 알았는지 인촌 생일에 기대하지 않은 축하 카드가 왔다. 하지가 보낸 것이었다.
서양인에게는 카드를 주고받는 일이 깊은 우정을 표시하는 관습이다.
그래서 인촌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하지를 대해왔다는 회고담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사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촌이 정당인이면서 그런 책임을 자진해 감당했다는 것은 지나칠 수 없는 애국심의 발로였다.
한국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고,
하지의 선택과 결정이 정치적으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는 정치가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촌은 자신보다 유능하고 존경하는 인물이 있으면 뒤로 물러나 그 사람을 추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장덕수나 송진우는 모두 인촌의 후원으로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해방 직후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이승만 정부 수립에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자세였기 때문에 동아일보, 중앙중고등학교, 고려대학교, 경성방직 모두를 성공적으로 육성해
사회에 도움을 주었다.
후에는 이 박사와 뜻을 달리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