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밤의 세운상가에서 혼자

colorprom 2019. 10. 26. 16:24


밤의 세운상가에서 혼자


조선일보
                         

입력 2019.10.26 03:00

[아무튼, 주말- 魚友야담]

어수웅·주말뉴스부장
어수웅·주말뉴스부장


밤의 세운상가를 찾았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장소는 심야 개방 중인 9층 옥상.
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청계천 세운상가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오래지만, 직접 찾기는 처음이었죠.
왕의 위패를 모신 종묘N서울타워가 야간 조명 아래 빛나고,
쓰러질 듯한 슬레이트 지붕 단층 건물과 날카로운 각도로 솟아오른 고층 빌딩이 뒤섞인 풍경.

60대 장년과 20대 커플이 각자의 탄성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이거 완전히 신세계구먼."
"오빠, 여기서 찍자, 사진."

종로3가와 퇴계로3가를 잇는 세운상가는 서울의 굴곡과 파란을 함께 새긴 곳.
1968년 건설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세계의 기운은 모두 이곳으로 모이라"며 세운(世運)으로 명명했지만, 주지하다시피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은 도시의 슬럼이 됐죠.
1970~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남성들에게는 '두려운 성' 같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탱크도 총도 미사일도 만든다더라, '좋은' 비디오 구하려다 무서운 형들에게 먼지 나도록 맞았다더라….

다시 세운 세운상가'메이커 시티'를 표방하고 있었습니다.
오디오나 전자제품이야 원래 호가 났지만,
경험 많은 인력과 젊은 창업자의 아이디어를 합쳐 창작과 창업의 아지트로 다시 태어나자는 취지랍니다.

문득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은 황정은의 소설 '백의 그림자'가 떠올랐습니다.
작품 속 주인공 은교의 삶의 터전은 철거 직전의 40년 된 도심 전자상가.
아버지의 오디오 수리점에서 사무를 보고 연애를 합니다.
실제로 작가의 부친은 첫해인 1968년부터 세운상가를 지킨 터줏대감.
지금도 빈티지 오디오를 고치며 고객의 추억을 수리합니다.
아버지와 딸이 늘 사이 좋았을 리는 없겠지만, 세대를 가로지르는 공존을 힘들게 읽었습니다.

산업화 세대도, 민주화 세대도 이제 각자의 최우선 임무는 마쳤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이면서 역사상 가장 불안한 세대라는 밀레니얼 세대와의 바통 터치를

우리는 어떻게 완성할 수 있을까요.

세운상가에는 이 세대의 감각으로 꾸민 식당 카페 갤러리가 숨은그림찾기 놀이처럼 숨어 있더군요.

옥상 정원에서 20대 커플은 문득 자신의 스마트폰을 건넸습니다.

"여기서 사진 좀 찍어주세요."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0/25/201910250158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