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일기]
그가 워싱턴DC 부근에 살면서 볼보자동차 기술자로 안정된 생계를 누리고 있을 때였다.
적지 않은 달러를 장만해 평양까지 갔다.
저녁상을 차려 놓고 가족이 둘러앉았다.
막냇동생이 "형님은 이렇게 살기 좋은 인민공화국을 배반하고 왜 적성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으로 갔느냐"고
힐난했다. "찾아오지나 말지. 형이 미국 놈이 됐다고 하면 우리는 앞으로 고생을 어떻게 견디라 합니까?"
그 얘기를 들은 큰동생은
"오늘은 그만하자. 형은 인민군으로 갔다가 포로가 되어 할 수 없이 미국까지 가게 된 거야"라면서
억지 설명을 했다.
안내원의 친절로 미국서 온 일행이 떠날 때는 순안 비행장으로 가족이 배웅을 나왔다.
비행기에 오르면서 어머니 손을 잡았다. 어머니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큰동생은
"형님은 왜 나까지 버리고 갔어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평양에 가 살지는 못해요.
공산당원이 될 자격도 없고요"라고 했다.
막냇동생은 큰형의 손을 잡아주지도 않았다.
D는 후일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하면서
"형님, 비행기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큰동생에게는 죄인이 되고, 막냇동생과는 형제가 아닌 것 같았어요"라고 했다.
어렸을 적에 D가 옛날얘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고래와 코끼리 얘기를 지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토끼가 바다의 고래 꼬리와 산 너머 사는 코끼리 코에 밧줄을 매고 산 위에서 북을 쳤다.
두 거물은 밧줄을 당기기 시작했다.
D가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고 궁금해하며 묻는다.
나는 "아직도 줄 당기기 싸움을 하지. 내일까지는 힘겨루기를 계속하니까
그 얘기가 끝나면 또 다른 옛날얘기를 해 줄게" 하고 달랬던 일이 기억난다.
어렸을 때는 모두가 행복했는데 그 따뜻한 사랑의 끈을 누가 끊어 버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