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0월 전직 아사히신문 기자 오자키 호쓰미(尾崎秀實)가 간첩 혐의로 체포된다.
그는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총리가 자문을 구하는 정책 보좌 그룹의 핵심 인물이었다.
자타 공인 중국 전문가로 내각 촉탁직을 맡아 정부의 대외 정책에 깊숙이 관여했던 오자키 검거 소식에
고노에 총리는 아연실색한다.
오자키는 상하이 특파원 시절 소련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에게 포섭된 이후
언론인 신분을 이용해 정·관계 고위 인사에 접근하며 비밀리에 조르게의 첩보 활동에 협력해 왔다.
아내도 그의 정체를 모를 정도였다.
그는 체포된 후 혐의를 인정했고, 1944년 11월 외환(外患)죄로 사형에 처해진다.
오자키가 골수 공산주의자임에도 내각 자문역에 위촉될 정도로 의심을 받지 않았던 것은
중요한 순간마다 그의 주장이 강경파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온건파들은 조기 강화를 주장했으나 오자키는 오히려 확전을 주장했다.
1940년대 들어서는 대소(對蘇) 개전 포기와 남진 정책, 즉 동남아 전선 확대의 당위성을 강변했다.
오자키는 소련 지도하에 중국, 일본을 공산화하고 아시아 민족이 연대하는 '동아(東亞)협동체'를 구성하여 자본주의 제국에 대항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혼재된 망상에 가까운 이상주의였다.
그는 중일전쟁 개전(開戰)을 대륙 공산화의 호재(好材)로 보았다.
국민당이 항일전에 힘을 소모할수록 공산당 세력 확장에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또한 일본의 남진을 유도하면 소련 침공 위협이 제거되고 미·영과의 적대 관계가 심화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도 판단했다.
1930년대 이후 일본의 무모한 팽창에는 군국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기묘한 동상이몽이 있었다.
일견 물과 기름처럼 보이나
이념에 복무하며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발상의 세력이라는 점에서
양자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