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10.01 03:13
봉우리는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우리가 끝내 가야 할 곳은 낮은 데로만 고이는 바다였다
386과 촛불이 훈장 되었을 때 正義는 액세서리가 되었고 우리는 부끄러움마저 잊었다
![김윤덕 문화부장](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09/30/2019093002993_0.jpg)
추석 전야. 동태전을 부치다 너를 떠올린 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 때문이다. '상록수.'
양희은도, 노찾사도 아닌 김민기의 낮은 목소리로 들을 때 상록수는 가장 상록수답다고 너는 말했었다.
나는 김민기가 부르는 '봉우리'를 더 좋아했다.
모두가 손을 들어 가리키던 높고 뾰족한 봉우리.
막상 올라보니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이어진다던 노랫말이
시(詩) 같고 잠언 같아서 좋았다.
언젠가 '잔나비'란 그룹의 잘생긴 청년이 이 노랠 불렀지만,
삶의 굽이를 지나온 자의 고단한 숨소리가 묻어나야 빛나는 곡이었다.
전을 부치며 흥얼거렸다. 김민기처럼 나직하게, 읊조리면서.
중2 딸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와~ 노래 완전 구림. 개못함. 누구 돌아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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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건 닮았다고 우기던 그 집 아들은 잘 컸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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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건 닮았다고 우기던 그 집 아들은 잘 컸는지.
우리 큰애보다 한 살 어렸으니 올해 대학에 갔거나 재수하는 중이겠다.
인성은 1등급, 성적은 9등급을 줄기차게 유지하던 내 아들은
대학은 건너뛰고 산골 학교에 들어가 목공을 연마하는 중이다.
서툰 톱질로 팔뚝에 상처 아물 날 없는 초짜 목수가 언변은 인간문화재급이라,
눈만 마주치면 지구와 기후변화에 대해 장광설을 푼다.
너무 자기주도적으로 키운 탓에, 인생의 중대한 결정은 저 혼자 하고,
"배달의민족에 자장면 시켜 먹어도 되느냐?" 같은 지극히 사소한 것만 부모와 상의한다.
수능 끝난 날, 1년간 세상을 유랑하고 오겠다며 통장을 탈탈 털어가더니
여행 중 만난 목수 집에서 하룻밤 묵은 뒤 평생 나무와 살겠노라 선언했다.
서울서 차로 세 시간. 톱밥과 라면 부스러기 뒹구는 자취방을 걸레질하다 기가 차 울음을 터뜨리니,
목수 아드님 혀를 차셨다.
"독재와도 싸운 386이 이따위 사소한 궁핍에 눈물을? 민주화에 대한 모독 아닌가?"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09/30/2019093002993_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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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386이었다.
어쩌다 386이었다.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지만 최루탄 터지면 제일 먼저 줄행랑치던 겁쟁이 386이었다.
담배 연기 뿌연 서클룸에서 강철서신을 읽고, 사회구성체론을 배우고, 자본론을 뒤적였지만
엥겔스와 엥겔지수는 허구한 날 헷갈렸다.
종교가 왜 아편이냐고 대들던 너는 밉상으로 찍혔고,
발레리나 사진을 강의 노트에 끼워 다니던 신입생은 성(性)을 상품화했다고 혼이 났다.
마돈나처럼 머릴 노랗게 염색하고 나타났을 때 "너도 미제냐"는 호통에 도로 미용실로 뛰어갔던가.
졸업 후 작은 의류 회사에 취직하고도 부채를 느끼며 살았던 건 노동 현장으로 들어간 언니들 때문이었다.
졸업 후 작은 의류 회사에 취직하고도 부채를 느끼며 살았던 건 노동 현장으로 들어간 언니들 때문이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도 되는 걸까.
그래서 유난을 떨었다.
우리 농산물만 먹고, 주식 투자는 죄악시했으며, 결혼기념일엔 와인 대신 막걸리를 마셨다.
더위로 죽을 수 있겠다는 공포에 지난해 에어컨에 굴복했으나,
미세 먼지의 주범인 승용차는 여태 안 사고 버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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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게 위선이고 자위였다는 걸, 텀블러가 일깨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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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게 위선이고 자위였다는 걸, 텀블러가 일깨워주었다.
그가 백팩에 텀블러를 들고 나타났을 때, 난 거울을 본 듯 얼어붙었다.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지가 삶을 결정하는 사회는 끔찍하다"던 그가
"우리 아이가 영어는 좀 잘한다"고 했을 때,
"스펙 쌓기 열풍이 교육의 빈부 격차를 강화한다"던 그가
"내 아이 문제에는 안이하고 불철저했다"며 머리를 조아릴 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나는 얼마나 다른가.
우리는 어쩌면 한통속이었을까.
화염병과 짱돌로 민주화를 얻었으나 풍요 경제의 단맛을 즐기느라 자식 세대의 궁핍은 외면했다.
386은 훈장이었고, 촛불은 과거를 추억하는 놀이터였다.
부끄러움은 잊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척하는 동안 거친 들판에서 외쳤던 우리의 정의는 한낱 액세서리로 전락했다.
그의 손에 들린 텀블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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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 없이 밥만 먹다 간다"고 한 건 임종을 앞둔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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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 없이 밥만 먹다 간다"고 한 건 임종을 앞둔 아버지였다.
술 한잔 드시면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을 부르며 귀가하던 아버지는
그 노래 지은 이가 김민기였다는 걸 아셨을까.
너의 직업을 좋아하지 않지만,
너의 직업을 좋아하지 않지만,
네가 쓰는 한 줄 문장이 해방 이래 둘로 갈라져 싸움만 하는 나라에 화해의 물꼬를 트는 작은 삽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부모를 선택해 태어날 수 없는 아이들이 고루 평등한 배움을 얻도록,
패자(敗者)도 다시 봉우리에 오를 수 있게 손 내밀어 주는 따뜻한 펜이 되어주길 바란다.
내일은 추석 음식 싸서 아들에게 간다.
내일은 추석 음식 싸서 아들에게 간다.
지 아빠 닮아 밥 대신 담배 연기만 흡입할 기세라 다리몽둥일 분질러놓고 올 참이다.
너도 잘 챙겨 먹어라.
시인 김지하 말마따나, 살아보니 밥이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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