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09.23 03:00 | 수정 2019.09.23 13:17
[하영선 교수]
국제정치적 시각으로 구한말 연구… 새 책 '한국 외교사 바로보기' 내
자력으로 살 수 없었던 대한제국… 열강의 관심 끌어냈어야 하는데 고종은 전략적 사고가 부족했다
21세기는 자주 아닌 共主 시대… 한국은 미국을 최대한 활용해야
긴박하게 돌아가는 한반도 정세를 두고 한 세기 전 구한말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북의 핵(核)무장, 삐걱거리는 한·미 동맹, 일본과의 갈등, 중국의 압박, 골 깊은 진영 대립…. 하영선(72) 서울대 명예교수는 구한말 망국(亡國)의 길로 간 조선의 실패를 국제정치적 시각에서 천착해온 연구자다. 그의 관심은 물론 이런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대한민국의 진로에 있다. 지난주 출간한 '한국 외교사 바로보기'와 '사랑의 세계정치'(한울)는 이런 지적 노력의 결실이다. 구한말의 실패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지난 18일 하 교수를 만났다.
―조선을 망국으로 몰고 간 결정적 패착은 무엇이었나.
"19세기 후반 문명 표준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중화 질서에서 근대 국제 질서로의 전환에 뒤처졌다는 얘기다. 부국강병을 위해 국내 역량을 끌어모으는 데도 실패했다. 설사 국내 세력을 결집해도 한계가 분명했기 때문에 국제 역량의 활용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는데 외세에 이용당하기만 했다."
―고종의 아관파천(1896년)과 친(親) 러 노선이 당시 국제 질서를 잘못 읽은 선택이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아관파천은 고종이 생명까지 위협받는 현실에서 탈출하려는 마지막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런 선택이 구미 열강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것까지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종에겐 일본의 간섭을 막기 위해 외교 역량을 발휘할 만한 전략적 사고가 부족했다.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했을 때 영·러가 한 세기 가까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각축하던 '그레이트 게임'의 일부라는 사실을 파악했을까. 김옥균은 고종이 영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비판했을 정도다."
―고종은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약소국은 '만국공법(萬國公法)'이 보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나.
" '만국공법'(당시 국제법)은 1870년대 들어 조선에 소개됐다. 고종은 1882년 개화 정책을 발표하면서 군사력과 만국공법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당시 지식인들은 힘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에서 만국공법이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다. 고종은 현실적으로 군사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만국공법의 도움이라도 받으려는 비현실적인 시도를 한 것이다."
―결국 망국의 책임은 국제 질서를 제대로 못 읽은 고종의 무능에 있는 것 아닌가.
"고종의 '주권 수호 외교' 노력은 인정한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세계 질서에서 고종은 나약한 실패자였다. 대한제국은 자력으로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립화보다는 열강이 적극적으로 관여하도록 매력 있는 국가로 보여야 했다. 하지만 고종에게 그런 능력은 없었다."
―한 세기 전 실패에서 배워야 할 것은 뭔가.
"21세기 문명 표준의 변화를 읽어내고 대응해야 한다.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글로벌 리더십의 전환이다. 미·중이 벌이고 있는 신아태(新亞太) 질서 건축 경쟁에서 한국이 국면을 정확히 읽고 중진국으로서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해 적극 참여해야 한다. 한·미 동맹의 틀을 유지하면서 중국과 적절히 관계를 맺는 전략이 필요하다. 국내 역량을 총결집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극단적 진영 대립으론 위기를 넘을 수 없다. 자주적(自主的) 세계화, 열린 민족주의 같은 유연한 사고를 갖춘 젊은 세대들이 조기 등판할 필요가 있다."
―반미(反美)·자주·평등 같은 1980년대 낡은 가치관에 사로잡힌 586세대가 청와대를 비롯한 정치·사회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는 비판이 잇따른다.
"586세대에겐 연민을 느낀다.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는 인정하지만 이들이 대학 시절을 보낸 1980년대는 반독재·반미투쟁으로 상상력의 공간이 제한됐던 시대다. 자주(自主)·자립(自立)만 외치는 건 19세기적 단선적 사고다. 한 세기 전 일본보다 왜 빨리 부국강병에 나서지 못 했냐고 비판한다. 586세대가 변화하는 국제 질서를 읽어내 생존과 번영을 이루지 못하면 또 후대의 비판을 받을 것이다."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로 70년 한·미 동맹에 균열이 갔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은 한국이 동맹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검토할 것이다. 한·미 동맹은 한반도에서 남북의 군사 충돌을 막고 한국의 경제적 성장을 뒷받침한 지지대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아태 질서가 수립 중인 21세기에 동맹은 더욱 중요하다. 한국은 이 세기가 자주의 시대가 아니라 공주(共主)의 시대라는 걸 명심하고 미국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19세기 후반 문명 표준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중화 질서에서 근대 국제 질서로의 전환에 뒤처졌다는 얘기다. 부국강병을 위해 국내 역량을 끌어모으는 데도 실패했다. 설사 국내 세력을 결집해도 한계가 분명했기 때문에 국제 역량의 활용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는데 외세에 이용당하기만 했다."
―고종의 아관파천(1896년)과 친(親) 러 노선이 당시 국제 질서를 잘못 읽은 선택이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아관파천은 고종이 생명까지 위협받는 현실에서 탈출하려는 마지막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런 선택이 구미 열강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것까지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종에겐 일본의 간섭을 막기 위해 외교 역량을 발휘할 만한 전략적 사고가 부족했다.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했을 때 영·러가 한 세기 가까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각축하던 '그레이트 게임'의 일부라는 사실을 파악했을까. 김옥균은 고종이 영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비판했을 정도다."
―고종은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약소국은 '만국공법(萬國公法)'이 보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나.
" '만국공법'(당시 국제법)은 1870년대 들어 조선에 소개됐다. 고종은 1882년 개화 정책을 발표하면서 군사력과 만국공법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당시 지식인들은 힘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에서 만국공법이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다. 고종은 현실적으로 군사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만국공법의 도움이라도 받으려는 비현실적인 시도를 한 것이다."
―결국 망국의 책임은 국제 질서를 제대로 못 읽은 고종의 무능에 있는 것 아닌가.
"고종의 '주권 수호 외교' 노력은 인정한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세계 질서에서 고종은 나약한 실패자였다. 대한제국은 자력으로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립화보다는 열강이 적극적으로 관여하도록 매력 있는 국가로 보여야 했다. 하지만 고종에게 그런 능력은 없었다."
―한 세기 전 실패에서 배워야 할 것은 뭔가.
"21세기 문명 표준의 변화를 읽어내고 대응해야 한다.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글로벌 리더십의 전환이다. 미·중이 벌이고 있는 신아태(新亞太) 질서 건축 경쟁에서 한국이 국면을 정확히 읽고 중진국으로서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해 적극 참여해야 한다. 한·미 동맹의 틀을 유지하면서 중국과 적절히 관계를 맺는 전략이 필요하다. 국내 역량을 총결집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극단적 진영 대립으론 위기를 넘을 수 없다. 자주적(自主的) 세계화, 열린 민족주의 같은 유연한 사고를 갖춘 젊은 세대들이 조기 등판할 필요가 있다."
―반미(反美)·자주·평등 같은 1980년대 낡은 가치관에 사로잡힌 586세대가 청와대를 비롯한 정치·사회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는 비판이 잇따른다.
"586세대에겐 연민을 느낀다.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는 인정하지만 이들이 대학 시절을 보낸 1980년대는 반독재·반미투쟁으로 상상력의 공간이 제한됐던 시대다. 자주(自主)·자립(自立)만 외치는 건 19세기적 단선적 사고다. 한 세기 전 일본보다 왜 빨리 부국강병에 나서지 못 했냐고 비판한다. 586세대가 변화하는 국제 질서를 읽어내 생존과 번영을 이루지 못하면 또 후대의 비판을 받을 것이다."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로 70년 한·미 동맹에 균열이 갔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은 한국이 동맹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검토할 것이다. 한·미 동맹은 한반도에서 남북의 군사 충돌을 막고 한국의 경제적 성장을 뒷받침한 지지대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아태 질서가 수립 중인 21세기에 동맹은 더욱 중요하다. 한국은 이 세기가 자주의 시대가 아니라 공주(共主)의 시대라는 걸 명심하고 미국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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