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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적'이라는 새 올가미

colorprom 2019. 9. 3. 15:03


    

[기자의 시각] '묵시적'이라는 새 올가미


조선일보
                         
             
입력 2019.09.03 03:12

양은경 법조전문기자
양은경 법조전문기자


지난달 29일 대법원의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순실씨에 대한 전원합의체 선고에서 이 부회장 파기환송에 가려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바로 최순실씨의 강요죄에 대한 판단이다.

대법원은 "최순실씨가 미르·K스포츠재단에 후원금을 요구한 행위 등은 강요죄의 협박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파기환송했다. 강요죄가 되려면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해악이 있을 것'이라는 협박이 있어야 하는데 최씨가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최씨는 박 전 대통령과 공모해 기업에 재단 출연 및 납품 계약, 특정인 채용 등을 강요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번 판결로 기업은 더 이상 '정권의 강압적 요구로 돈을 냈다'고 할 수 없게 됐다. 최씨에게 강요 혐의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반대로 요구받은 기업도 더 이상 강요 피해자가 아니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016년 최순실씨가 18개 기업으로부터 미르·K스포츠재단에 774억원을 모은 사실이 드러났을 때 기업들은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헌납한 것"이라고 했다. 이익을 바라고 뇌물을 준 '범죄자'가 아니라 강요라는 범죄의 '피해자'라는 주장이다. 대부분 기업은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처벌을 피했고 최씨와 박 전 대통령 판결문에도 '강요 피해자'로 적시됐다.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까지 뇌물죄로 기소된 삼성 또한 '강요 피해자' 주장을 펴 왔다.

그런데 대법원이 이 논리를 깼다. 대법원은 "대통령은 정책 수립과 시행을 위해 기업에 이해와 협조를 구할 수 있다"며 "대통령이 사실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기업에 이익 제공을 요구했다고 그 자체로 해악의 고지로 볼 수는 없다"고 했다. 대통령은 요구할 수 있고 기업은 거절할 수 있으며 그에 따른 불이익은 기업 몫이라는 취지다. 이에 따르면 앞으로 정권 요구에 응한 기업은 뇌물죄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게다가 대법원은 "묵시적(默示的) 부정 청탁만 있어도 된다"고 했다. 명시적 청탁이 없더라도 공직자의 결정이 기업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양측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알았다면 처벌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에 적지 않은 판사들이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 명백한 증거가 없더라도 유죄를 판결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익을 목적으로 한 기업의 활동은 거의 모두가 '잠재적' 범죄행위가 될 수 있다. 기업이 정권 요청에 따라 특정 지역에 투자한 경우 이 투자는 기업 승계나 사업 확장 등 기업 현안과 연관돼 '묵시적 청탁'으로 둔갑할 수 있다. 한 부장판사는 "추측과 심증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게 형사 판결인데 대법원이 이를 허용했다"고 했다. 이제 권력의 요구를 거부하거나 현안 없는 기업이 아니면 뇌물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한국에서 사업하기 두렵다"는 기업들 말이 엄살로 느껴지지 않는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9/02/201909020246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