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종족주의’가 출간된 이후 가장 많이 듣는 비판 중 하나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친일 매국 책이라는 것이다. 일부 방송 매체들은 마녀 사냥을 하듯이 이 책의 내용을 왜곡해서 음해하고 있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가 민정수석 시절 “구역질 나는 책”이라고 비난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런 영향을 받게 되는 일반 사람들도 이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비난 대열에 합류하여 분노를 표출하곤 한다.
이 와중에 여러 매체에서 이 분야의 전문가가 이 책을 비평해준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중에는 좀 더 논의를 심화시킬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으며, 여전히 이념과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전자로는 주간조선에 실린 이선민 기자의 문제 제기(국사학도 기자가 이영훈 교수에게 묻다)와, 후자의 사례로는 오마이뉴스에 실린 전강수 교수의 비판(‘친일파’ 비판이 억울? 자업자득이다)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이선민 기자는 자신의 글을 “‘반일 종족주의’가 주된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는 좌파 민족주의가 아니라 우파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전강수 교수의 비판은 좌파 민족주의로부터의 반론이라 하겠다.
이 두 비평 모두 경제적 수탈이나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관한 ‘식민지 근대화론’의 설명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한 것으로 본다. 이하 두 비평의 문제점을 거론하면서 필자의 견해를 좀 더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이 두 비평 모두 경제적 수탈이나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관한 ‘식민지 근대화론’의 설명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한 것으로 본다. 이하 두 비평의 문제점을 거론하면서 필자의 견해를 좀 더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 일제시대 때 조선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장면. photo 교학사 교과서
해방 전과 후 성장률 차이는 세계경제의 영향
이선민 기자는 일단 해방 전의 조선경제는 일본 중심의 지역통합 체제에 편입되어 무역이 활성화되고 산업구조도 빠르게 변했으며, 조선인 공장과 회사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고 하는 ‘반일 종족주의’의 서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엄밀한 학문적 성과에 입각해 있는 것인 한 “우리의 통념이나 상식과 다르더라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거나 빠져 있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중 하나는 일제시기의 경제성장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더라도 그 ‘한계’를 드러내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점이다. 교과서로 배웠던 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을 때 젊은 세대가 느끼게 될 당혹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 기자는 경제적 변화에 비해 정치적 또는 사회적 권리가 뒤처져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이 점을 더욱 부각시킬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반일 종족주의’는 해방 후에 비해 해방 전은 경제적 불평등이 매우 높았고, 성장률은 2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점도 일제시기 경제성장의 특징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기자는 이 중에서 특히 해방 전과 후의 경제성장률의 격차에 주목하고 “결국 일제시기에는 한국이 독립했을 때 달성할 수 있었던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일제가 가로막고” 있었으며, “왜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했는지가 경제적 측면에서도 설명”이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주장은 무리가 있다. 두 시기의 경제성장률의 차이는 독립국 여부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세계경제로부터의 영향이 더욱 컸기 때문이다. 1·2차 세계대전 사이 기간은 세계경제 전체가 침체를 면치 못한 반면, 2차 세계대전 이후는 세계사상 가장 성장률이 높았던 예외적인 시기였다. 그렇지만 독립을 해야 하는 이유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나 사회의 모든 방면에서 차고 넘친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는 필자도 이견이 없다.
또 하나는 보다 중요한 논점인데, ‘반일 종족주의’의 논리가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비판되고 있듯이 자칫하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흐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이와 관련해서 이 기자는 이 책이 개항기 애국계몽운동과 그 계보를 잇는 보수 우익의 성장을 그다지 주목하지 않은 점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를 강조해야 그러한 우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애국계몽운동 세력의 노력과 성장이 있었기 때문에 (1)“일제의 식민지 지배에도 불구하고 근대화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을 빼어버리면 결국은 (2)“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일제에 의해)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논리로 귀결될 우려가 있고, 그 경우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비판하기 어려워진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1)과 (2)의 어느 쪽도 근대화의 설명으로서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1)의 경우는 근대적 제도를 전제로 했을 때의 얘기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적 제도의 도입은 당시 고종을 비롯한 위정자들도 이루지 못했지만, 그에 대항해서 자주적 근대화를 꿈꿨던 애국계몽운동 세력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근대제도의 이식과 시행은 일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냉엄한 역사적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조선인은 이렇게 근대제도가 시행된 후 그것을 학습하며 자기 것으로 만들어갔고, 해방 후를 준비할 수 있었다. 이 기자의 인식은 전자(근대적 제도의 이식)를 놓친 채, 후자(조선인의 활동)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일면적이다.
이에 대해 (2)의 경우는 일제의 ‘지배’ 덕분이 아니라 일제가 이식한 근대적 ‘제도’의 덕분이라고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에 이식한 제도는 곧 식민지 지배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기 때문에 양자를 구별해서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이를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해방 후에 온다. 여기서는 민법을 사례로 들어 설명해 보고자 한다.
해방 전에 ‘조선민사령’이라는 형태로 일본 민법이 거의 그대로 조선에도 시행되었는데, 이것이 해방 후에도 그대로 존속하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1950년대 말 한글로 된 민법이 제정되고 1960년에 시행되기에 이르렀지만 그 내용을 보면 해방 전에 시행된 ‘조선민사령’, 즉 일본의 민법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 점은 국회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때 민법안을 기초한 김병로 선생은 일본의 민법전과 민법학 자체가 프랑스법이나 독일법 등을 그대로 가져와 번역한 것이며, 일본 고유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보인다.
즉 민법에는 재산권의 보호나 계약 또는 영업의 자유, 회사제도와 같은 근대 사회의 원리나 제도가 담겨 있는데, 이는 서구에서 유래한 보편적 가치에 입각해 있다. 해방 후 독립국가가 되어 그때까지 의거해왔던 일본의 민법을 얼마든지 폐기할 수 있었지만 대한민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거기에 보편적 가치를 담겨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북한은 식민지 지배를 청산한답시고 이를 폐기해버렸다. 그 대신에 ‘민주적 법의식’이나 ‘조선인민의 이익’을 앞세우게 되는데, 이는 법을 정치에 종속시켜 법적 안정성이나 예측 가능성을 보장하기 어렵게 하였다. 이것이 그 후 남북한의 발전 경로가 갈라지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때 묻은 아기를 목욕시키고 구정물만 버려야 하는데 북한은 아기도 함께 버린 셈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남한은 비록 때가 묻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결국 아기를 버리지는 않았다. 여기서 아기는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는 근대적 제도를 말하며, 때 묻은 것은 식민지 지배의 일환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말한다.
세계 문명의 발전사를 보면, 특정 지역(근대의 경우 서구)에서 새로운 사상과 제도가 출현하고 그것이 보편성을 가질 경우 다른 지역(비(非)서구)으로 퍼져 나간다. 다른 지역은 이를 수용하면서 기존의 문명이 더 풍부해진다. 한국에서 근대적 제도의 이식과 수용은 불행히도 일제의 식민지 지배라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그 자신이 비서구에 속한 일제를 매개로 하였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개항 이후 우리나라 근현대사는 일제시기도 포함하여 이러한 서구 근대문명의 확산과 수용이라는 큰 틀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 변형된 수탈론에 불과
한편, 전강수 교수는 “일제가 총칼로 조선 농민들의 토지와 쌀을 ‘약탈’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고는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에 수탈이 없었다는 말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이 자행되었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인지 쉽게 와닿지 않는데, 먼저 이 점을 검토하기로 한다. 그가 제시한 사례에 따르면, 일제가 쌀 증산을 위해 수리조합을 만들어 수리시설을 건설했는데 그때 수리조합에 편입된 조선인 농민은 과중한 조합비 부담으로 농지를 상실하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반면 일본인들은 짧은 기간에 대지주로 변신했고, 그들 주도로 쌀 증산과 일본으로의 이출이 이루어졌다. 이를 두고 전 교수는 ‘토지 수탈’ ‘쌀 수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부연 설명과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일제가 1920년대에 추진한 산미증식계획은 쌀 증산을 위해서는 가뭄이나 홍수의 피해를 줄이는 것이 관건이라고 보았고, 이를 위해 수리시설을 확충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거기에는 큰 자금이 소요되므로 총독부는 식산은행 등을 통해 필요한 자금을 융자해서 수리시설을 건설하고, 그 혜택을 보는 농민들이 수리조합을 결성하고 조합비를 거둬 원리금을 상환하게 하는 정책을 취했다. 수리조합에 편입된 농가는 그 혜택을 보지만 조합비를 부담하는 구조다. 그런데 농지의 위치에 따라 수혜의 정도가 다르고 그에 따라 조합비 부담도 차등해야 하는데, 이를 둘러싸고 농민들 간에 이해관계가 충돌하곤 했다. 이를 조정하지 못해 조합 자체가 설립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총독부는 수리조합 설립과 운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자금적 지원뿐만 아니라 제도적인 지원도 하였다.
설립된 수리조합의 수는 1935년에 190개에 이르는데, 이들을 대상으로 사업이 시행되기 전후의 쌀 생산을 비교해보면 평균 2배 가깝게 늘어났다. 조합비를 내는 지주는 늘어난 수입 중에서 40~60%를 조합비로 부담한 것으로 추정되어, 전체적으로는 수리사업의 경제성이 인정된다. 다만 조합에 따라서는 성과에 차이가 커서 쌀의 증수 효과가 예상에 미치지 못해 그 수익으로 조합비를 충당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또 수지를 맞추지 못한 농가 중에는 토지를 팔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전 교수는 이를 두고 ‘토지 수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정책을 평가할 때 그 정책이 의도한 성과를 얼마나 내었는지 또는 그 정책 효과가 어느 계층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단순히 정책의 결과에 일부 부정적 효과가 있었다고 해서 그 정책이 누구를 ‘수탈’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전 교수는 노골적인 ‘약탈’이 없었음을 인정하고 있지만,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이 광범하게 자행되었다고 말한다. ‘약탈’은 없었지만 ‘수탈’은 있었다는 설명도 알기 어렵거니와, 어느 경우든 강제성의 개입을 입증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주장은 수탈론에 입각한 교과서의 서술과 별로 다르지 않은 변형된 수탈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반일 종족주의’는 당시 조선의 농민, 특히 소작농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원인을 “결국 낮은 농업 생산성과 토지에 비한 인구의 과잉과 그로 인한 강고한 지주제의 존속이라는 전통사회 이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으로 설명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전 교수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제정책’에서 문제를 찾지 않고, 조선 내부에서 찾다 보니 일제를 면책해주는 논리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반일 종족주의’가 근거로 제시한 통계자료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다. 과연 그럴까.
지난 100년간 비농업취업자와 농가인구의 연평균 증감률의 추이를 보여주는 오른쪽 <도표>는 이 문제를 음미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 도표에 따르면 해방 전이나 후에도 비농업취업자가 농가인구보다 증가율이 높았다. 이것은 농가인구가 도시의 비농업 부문으로 이동해 갔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전은 물론이고 1960년대까지도 농가인구는 증가율이 0보다 커서 절대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농촌에 경지는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가 계속 늘어나면 어떻게 될까? 경지는 상대적으로 더 귀해지고 사람의 값은 더 떨어지게 된다. 조선시대부터 식민시기까지 지주제가 강고히 유지된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 값이 싸지다 보니 노동력의 투입을 줄이는 기술(예컨대 기계화)이 개발될 이유가 없으며, 전통사회 이래의 저급한 농업기술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고도성장기에는 상황이 크게 바뀐다. 농가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자 농촌에는 일손이 부족해진다. 임금이 올라가니 기계화가 진행되고 노동생산성이 높아지니 농가소득도 높아지게 된 것이다. 그 추동력은 비농업 부문 고용의 빠른 증가에서 왔으며, 경제성장의 혜택이 농촌의 저변에까지 파급된 것이다.
이처럼 장기통계는 해당 시기가 다른 시기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 시기에 대한 이해를 높여준다. 해방 전에 소작농 빈곤의 원인을 전통사회 이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에 의거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에만 특유한 것은 아니고, 빈곤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다른 개도국이 아직도 빠져 있는 함정이기도 하다. 전 교수는 당시 빈곤의 원인을 일제의 식민지 경제정책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지만, 그가 사례로 든 농업정책(산미증식계획)은 수리시설의 확충을 위한 투자를 늘렸고, 생산물인 쌀의 이출을 촉진한 것이다. 현재의 경제학 개념으로 보면, 이들 정책이 소득을 늘리는 데 기여할지언정 왜 빈곤의 원인이 되는지 알기 어렵다.
전 교수는 또한 ‘반일 종족주의’가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을 분명히 강조했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일본은 구 한국 정부의 주권을 강제로 빼앗아 식민지로 지배했다. 한 나라의 주권을 문자 그대로 ‘강탈’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제는 바로 이 점에서 비판과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명확히 밝힌 바 있다. 그렇지만 그 사실이 곧 토지나 식량을 마구잡이로 ‘수탈’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일상생활에서는 민족 간 차별이 무수히 이루어졌겠지만, 차별을 제도로 공식화하지는 않았다. 일제는 조선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완전히 편입해서 일본화하는 동화주의 지배 방식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그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수탈과 악행에는 한없이 관대”한 논리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이를 직시하지 않으면 일제가 조선을 어떻게 지배하려고 했는지를 놓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