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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본종족주의]연구자 3인이 본 '반일종족주의' 3대 쟁점 (조선일보)

colorprom 2019. 9. 2. 15:30




[연구자 3인이 본 '반일종족주의' 3대 쟁점]


일제하 강제동원

"1944년 이전 渡日은 자발적 선택" "현해탄 건너기 전 40% 탈출"


조선일보
                         
             
입력 2019.09.02 03:00

연구자 3인이 본 '반일종족주의' 3대 쟁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 납치했다는 주장은 거짓수입 괜찮고 선택의 자유있었다"
"고노 담화도 '강제 동원' 인정인플레 고려하면 형편없는 수입"


독도 영유권
"조선 지도, 우산도 위치 제각각1905편입 때 항의도 안 해"
"메이지정부 '독도는 조선땅' 확인외교권 박탈당해 항의 못했다"

7월 초 출간된 책 '반일종족주의'는
일제하 강제동원은 '허구'이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성노예로 시달린 게 아니라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는
도발적 주장을 편다.
최근 '반일(反日)'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이 책은 오히려 더 주목받고 있다.
8월 중순부터 연속 3주 교보문고 주간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올랐을 정도다.

'반일종족주의'가 제기한 일제하 강제동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독도 영유권 등 3대 쟁점에 대해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동북아역사재단의 도시환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장,
최운도 독도연구소장 등 전문 연구자들이 지상(紙上) 논쟁을 펼친다.

지난주 '동해 영토 수호 훈련'에 참가한 해군 군함이 독도 인근을 항해하고 있다.
지난주 '동해 영토 수호 훈련'에 참가한 해군 군함이 독도 인근을 항해하고 있다.
'반일종족주의''조선시대에는 독도에 관한 인식이 없었다'
독도 영유권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논란을 빚고 있다. /해군
일제하 징용 등 강제동원

―'반일종족주의'(이하 반일):
일제시대 헌병·순사가 조선인을 강제로 끌고가 임금도 주지 않고 노예처럼 부렸다는 '강제동원'은 허구다.
강제적 성격의 '징용'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 8개월간 실시했을 뿐이고, 인원도 10만명 이하였다.
1939년 9월부터 '모집', 1942년 2월부터 시행한 '관(官) 알선'은 지원자의 자발적 선택이었다.
민족 차별 때문에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임금을 낮게 주고, 더 위험한 작업을 시켰다는 건 역사 왜곡이다.
당시 조선인 청년들에게 일본은 하나의 '로망'이었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강제동원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시절,
일부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피해자 증언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헌병·순사가 조선인을 강제로 끌고간 것처럼 표현한 건 잘못이다.

하지만 헌병·순사가 붙잡아가는 것만 강제동원이 아니다.
일본은 1938년 아시아·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해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했다.
법에 따라 이뤄졌지만 일본도 가입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을 위반한 강제노동이었다.
일본 정부도 2015년 7월 군함도 등 '메이지산업혁명 유산' 23곳을 세계문화유산에 올리는 과정에서
조선인의 강제노동을 인정했다.
사토 구니(佐藤地) 주유네스코 일본 대사는
"일부 시설에 수많은 한국인이 자기 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을 했다"고 밝혔다.
다음 날 일본 외무상이 강제성을 부정했으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임금이 높고 근로 조건이 좋았으면 왜 동원된 조선인들이 현해탄을 건너기 전 40%나 탈출했겠는가.
극히 일부 자료만 가지고 일반화해서 말할 수 있나.

'반일종족주의' 주요 쟁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반일: 헌병과 경찰이 길거리 처녀를 납치하거나 빨래터 아낙네를 연행해 위안소로 끌어갔다는 통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인신매매나 취업 사기는 있었지만, 국가 권력에 의한 강제 연행은 없었다.
위안부들은 철저한 감시를 받으면서 임금도 못 받고 성노예로 일한 게 아니라,
상당한 선택의 자유가 있었고 수입도 괜찮았다.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장:
일본 정부는 1993년 8월 발표한 고노 담화에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했다.
20개월에 걸친 정부 조사로 나온 결과다.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와 관리, 위안부 이송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했다.
위안부 모집은 군(軍)의 요청을 받은 민간 업자가 주도했는데,
감언, 강압 등 피해자 의사에 반해 이뤄진 경우가 많았고, 경우에 따라 관헌 등이 직접 가담했다고 밝혔다.
위안소 생활도 '강제적 상황하에서의 사역 등 참혹했다'고 인정했다.

버마(현 미얀마)에서 일한 위안부 피해자(문옥주)의 저금 기록(2만6551엔)을 근거로
수입이 높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잘못이다.
버마의 전시 물가 인플레(1800배) 때문에 실제론 20엔 정도의 가치에 불과하고 송금도 자유롭지 않았다.
그나마 종전으로 휴지 조각이 됐다.

독도 영유권

―반일: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
조선시대 지도엔 우산도 위치가 제각각으로 그려질 만큼 독도에 대한 영토 인식이 없었다.
1905년 일본 시마네현이 독도를 편입했을 때도 대한제국은 이렇다 할 항의도 하지 않았다.

최운도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장:
16세기 지도를 현대 지도와 같은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조선시대 지도를 보면 우산도는 17세기 말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울릉도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우산도에 대한 인식이 구체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동국문헌비고'(1770년) 등에는
"울릉우산은 모두 우산국 땅인데, 우산은 바로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독도)"라고 기록돼 있다.

일본이 1905년 독도를 영토로 편입하자 이 사실을 파악한 울릉 군수가 정부에 보고했다.
참정대신은 지령 3호를 내려 '독도 영지 운운하는 설은 전혀 그 근거가 없다'는 것과,
'다시 조사하여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조선일본에 항의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1877년 메이지 정부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
"울릉도독도일본과는 관계가 없는 곳이고 조선 영토"라고 확인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9/02/2019090200018.html



[논쟁]‘반일 종족주의’에 대한 비판을 비판한다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반일 종족주의’ 저자 nnkim@dongguk.edu


‘반일 종족주의’가 출간된 이후 가장 많이 듣는 비판 중 하나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친일 매국 책이라는 것이다. 일부 방송 매체들은 마녀 사냥을 하듯이 이 책의 내용을 왜곡해서 음해하고 있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가 민정수석 시절 “구역질 나는 책”이라고 비난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런 영향을 받게 되는 일반 사람들도 이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비난 대열에 합류하여 분노를 표출하곤 한다.
   

이 와중에 여러 매체에서 이 분야의 전문가가 이 책을 비평해준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중에는 좀 더 논의를 심화시킬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으며, 여전히 이념과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전자로는 주간조선에 실린 이선민 기자의 문제 제기(국사학도 기자가 이영훈 교수에게 묻다)와, 후자의 사례로는 오마이뉴스에 실린 전강수 교수의 비판(‘친일파’ 비판이 억울? 자업자득이다)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이선민 기자는 자신의 글을 “‘반일 종족주의’가 주된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는 좌파 민족주의가 아니라 우파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전강수 교수의 비판은 좌파 민족주의로부터의 반론이라 하겠다.
   
   이 두 비평 모두 경제적 수탈이나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관한 ‘식민지 근대화론’의 설명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한 것으로 본다. 이하 두 비평의 문제점을 거론하면서 필자의 견해를 좀 더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이 두 비평 모두 경제적 수탈이나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관한 ‘식민지 근대화론’의 설명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한 것으로 본다. 이하 두 비평의 문제점을 거론하면서 필자의 견해를 좀 더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 일제시대 때 조선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장면. photo 교학사 교과서


   해방 전과 후 성장률 차이는 세계경제의 영향
   
   이선민 기자는 일단 해방 전의 조선경제는 일본 중심의 지역통합 체제에 편입되어 무역이 활성화되고 산업구조도 빠르게 변했으며, 조선인 공장과 회사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고 하는 ‘반일 종족주의’의 서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엄밀한 학문적 성과에 입각해 있는 것인 한 “우리의 통념이나 상식과 다르더라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거나 빠져 있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중 하나는 일제시기의 경제성장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더라도 그 ‘한계’를 드러내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점이다. 교과서로 배웠던 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을 때 젊은 세대가 느끼게 될 당혹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 기자는 경제적 변화에 비해 정치적 또는 사회적 권리가 뒤처져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이 점을 더욱 부각시킬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반일 종족주의’는 해방 후에 비해 해방 전은 경제적 불평등이 매우 높았고, 성장률은 2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점도 일제시기 경제성장의 특징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기자는 이 중에서 특히 해방 전과 후의 경제성장률의 격차에 주목하고 “결국 일제시기에는 한국이 독립했을 때 달성할 수 있었던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일제가 가로막고” 있었으며, “왜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했는지가 경제적 측면에서도 설명”이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주장은 무리가 있다. 두 시기의 경제성장률의 차이는 독립국 여부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세계경제로부터의 영향이 더욱 컸기 때문이다. 1·2차 세계대전 사이 기간은 세계경제 전체가 침체를 면치 못한 반면, 2차 세계대전 이후는 세계사상 가장 성장률이 높았던 예외적인 시기였다. 그렇지만 독립을 해야 하는 이유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나 사회의 모든 방면에서 차고 넘친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는 필자도 이견이 없다.
   
   또 하나는 보다 중요한 논점인데, ‘반일 종족주의’의 논리가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비판되고 있듯이 자칫하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흐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이와 관련해서 이 기자는 이 책이 개항기 애국계몽운동과 그 계보를 잇는 보수 우익의 성장을 그다지 주목하지 않은 점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를 강조해야 그러한 우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애국계몽운동 세력의 노력과 성장이 있었기 때문에 (1)“일제의 식민지 지배에도 불구하고 근대화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을 빼어버리면 결국은 (2)“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일제에 의해)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논리로 귀결될 우려가 있고, 그 경우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비판하기 어려워진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1)과 (2)의 어느 쪽도 근대화의 설명으로서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1)의 경우는 근대적 제도를 전제로 했을 때의 얘기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적 제도의 도입은 당시 고종을 비롯한 위정자들도 이루지 못했지만, 그에 대항해서 자주적 근대화를 꿈꿨던 애국계몽운동 세력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근대제도의 이식과 시행은 일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냉엄한 역사적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조선인은 이렇게 근대제도가 시행된 후 그것을 학습하며 자기 것으로 만들어갔고, 해방 후를 준비할 수 있었다. 이 기자의 인식은 전자(근대적 제도의 이식)를 놓친 채, 후자(조선인의 활동)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일면적이다.
   
   이에 대해 (2)의 경우는 일제의 ‘지배’ 덕분이 아니라 일제가 이식한 근대적 ‘제도’의 덕분이라고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에 이식한 제도는 곧 식민지 지배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기 때문에 양자를 구별해서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이를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해방 후에 온다. 여기서는 민법을 사례로 들어 설명해 보고자 한다.
   
   해방 전에 ‘조선민사령’이라는 형태로 일본 민법이 거의 그대로 조선에도 시행되었는데, 이것이 해방 후에도 그대로 존속하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1950년대 말 한글로 된 민법이 제정되고 1960년에 시행되기에 이르렀지만 그 내용을 보면 해방 전에 시행된 ‘조선민사령’, 즉 일본의 민법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 점은 국회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때 민법안을 기초한 김병로 선생은 일본의 민법전과 민법학 자체가 프랑스법이나 독일법 등을 그대로 가져와 번역한 것이며, 일본 고유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보인다.
   
   즉 민법에는 재산권의 보호나 계약 또는 영업의 자유, 회사제도와 같은 근대 사회의 원리나 제도가 담겨 있는데, 이는 서구에서 유래한 보편적 가치에 입각해 있다. 해방 후 독립국가가 되어 그때까지 의거해왔던 일본의 민법을 얼마든지 폐기할 수 있었지만 대한민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거기에 보편적 가치를 담겨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북한은 식민지 지배를 청산한답시고 이를 폐기해버렸다. 그 대신에 ‘민주적 법의식’이나 ‘조선인민의 이익’을 앞세우게 되는데, 이는 법을 정치에 종속시켜 법적 안정성이나 예측 가능성을 보장하기 어렵게 하였다. 이것이 그 후 남북한의 발전 경로가 갈라지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때 묻은 아기를 목욕시키고 구정물만 버려야 하는데 북한은 아기도 함께 버린 셈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남한은 비록 때가 묻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결국 아기를 버리지는 않았다. 여기서 아기는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는 근대적 제도를 말하며, 때 묻은 것은 식민지 지배의 일환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말한다.
   
   세계 문명의 발전사를 보면, 특정 지역(근대의 경우 서구)에서 새로운 사상과 제도가 출현하고 그것이 보편성을 가질 경우 다른 지역(비(非)서구)으로 퍼져 나간다. 다른 지역은 이를 수용하면서 기존의 문명이 더 풍부해진다. 한국에서 근대적 제도의 이식과 수용은 불행히도 일제의 식민지 지배라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그 자신이 비서구에 속한 일제를 매개로 하였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개항 이후 우리나라 근현대사는 일제시기도 포함하여 이러한 서구 근대문명의 확산과 수용이라는 큰 틀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 변형된 수탈론에 불과
   
   한편, 전강수 교수는 “일제가 총칼로 조선 농민들의 토지와 쌀을 ‘약탈’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고는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에 수탈이 없었다는 말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이 자행되었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인지 쉽게 와닿지 않는데, 먼저 이 점을 검토하기로 한다. 그가 제시한 사례에 따르면, 일제가 쌀 증산을 위해 수리조합을 만들어 수리시설을 건설했는데 그때 수리조합에 편입된 조선인 농민은 과중한 조합비 부담으로 농지를 상실하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반면 일본인들은 짧은 기간에 대지주로 변신했고, 그들 주도로 쌀 증산과 일본으로의 이출이 이루어졌다. 이를 두고 전 교수는 ‘토지 수탈’ ‘쌀 수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부연 설명과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일제가 1920년대에 추진한 산미증식계획은 쌀 증산을 위해서는 가뭄이나 홍수의 피해를 줄이는 것이 관건이라고 보았고, 이를 위해 수리시설을 확충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거기에는 큰 자금이 소요되므로 총독부는 식산은행 등을 통해 필요한 자금을 융자해서 수리시설을 건설하고, 그 혜택을 보는 농민들이 수리조합을 결성하고 조합비를 거둬 원리금을 상환하게 하는 정책을 취했다. 수리조합에 편입된 농가는 그 혜택을 보지만 조합비를 부담하는 구조다. 그런데 농지의 위치에 따라 수혜의 정도가 다르고 그에 따라 조합비 부담도 차등해야 하는데, 이를 둘러싸고 농민들 간에 이해관계가 충돌하곤 했다. 이를 조정하지 못해 조합 자체가 설립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총독부는 수리조합 설립과 운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자금적 지원뿐만 아니라 제도적인 지원도 하였다.
   
   설립된 수리조합의 수는 1935년에 190개에 이르는데, 이들을 대상으로 사업이 시행되기 전후의 쌀 생산을 비교해보면 평균 2배 가깝게 늘어났다. 조합비를 내는 지주는 늘어난 수입 중에서 40~60%를 조합비로 부담한 것으로 추정되어, 전체적으로는 수리사업의 경제성이 인정된다. 다만 조합에 따라서는 성과에 차이가 커서 쌀의 증수 효과가 예상에 미치지 못해 그 수익으로 조합비를 충당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또 수지를 맞추지 못한 농가 중에는 토지를 팔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전 교수는 이를 두고 ‘토지 수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정책을 평가할 때 그 정책이 의도한 성과를 얼마나 내었는지 또는 그 정책 효과가 어느 계층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단순히 정책의 결과에 일부 부정적 효과가 있었다고 해서 그 정책이 누구를 ‘수탈’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전 교수는 노골적인 ‘약탈’이 없었음을 인정하고 있지만,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이 광범하게 자행되었다고 말한다. ‘약탈’은 없었지만 ‘수탈’은 있었다는 설명도 알기 어렵거니와, 어느 경우든 강제성의 개입을 입증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주장은 수탈론에 입각한 교과서의 서술과 별로 다르지 않은 변형된 수탈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반일 종족주의’는 당시 조선의 농민, 특히 소작농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원인을 “결국 낮은 농업 생산성과 토지에 비한 인구의 과잉과 그로 인한 강고한 지주제의 존속이라는 전통사회 이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으로 설명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전 교수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제정책’에서 문제를 찾지 않고, 조선 내부에서 찾다 보니 일제를 면책해주는 논리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반일 종족주의’가 근거로 제시한 통계자료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다. 과연 그럴까.


지난 100년간 비농업취업자와 농가인구의 연평균 증감률의 추이를 보여주는 오른쪽 <도표>는 이 문제를 음미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 도표에 따르면 해방 전이나 후에도 비농업취업자가 농가인구보다 증가율이 높았다. 이것은 농가인구가 도시의 비농업 부문으로 이동해 갔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전은 물론이고 1960년대까지도 농가인구는 증가율이 0보다 커서 절대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농촌에 경지는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가 계속 늘어나면 어떻게 될까? 경지는 상대적으로 더 귀해지고 사람의 값은 더 떨어지게 된다. 조선시대부터 식민시기까지 지주제가 강고히 유지된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 값이 싸지다 보니 노동력의 투입을 줄이는 기술(예컨대 기계화)이 개발될 이유가 없으며, 전통사회 이래의 저급한 농업기술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고도성장기에는 상황이 크게 바뀐다. 농가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자 농촌에는 일손이 부족해진다. 임금이 올라가니 기계화가 진행되고 노동생산성이 높아지니 농가소득도 높아지게 된 것이다. 그 추동력은 비농업 부문 고용의 빠른 증가에서 왔으며, 경제성장의 혜택이 농촌의 저변에까지 파급된 것이다.
   
   이처럼 장기통계는 해당 시기가 다른 시기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 시기에 대한 이해를 높여준다. 해방 전에 소작농 빈곤의 원인을 전통사회 이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에 의거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에만 특유한 것은 아니고, 빈곤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다른 개도국이 아직도 빠져 있는 함정이기도 하다. 전 교수는 당시 빈곤의 원인을 일제의 식민지 경제정책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지만, 그가 사례로 든 농업정책(산미증식계획)은 수리시설의 확충을 위한 투자를 늘렸고, 생산물인 쌀의 이출을 촉진한 것이다. 현재의 경제학 개념으로 보면, 이들 정책이 소득을 늘리는 데 기여할지언정 왜 빈곤의 원인이 되는지 알기 어렵다.
   
   전 교수는 또한 ‘반일 종족주의’가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을 분명히 강조했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일본은 구 한국 정부의 주권을 강제로 빼앗아 식민지로 지배했다. 한 나라의 주권을 문자 그대로 ‘강탈’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제는 바로 이 점에서 비판과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명확히 밝힌 바 있다. 그렇지만 그 사실이 곧 토지나 식량을 마구잡이로 ‘수탈’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일상생활에서는 민족 간 차별이 무수히 이루어졌겠지만, 차별을 제도로 공식화하지는 않았다. 일제는 조선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완전히 편입해서 일본화하는 동화주의 지배 방식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그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수탈과 악행에는 한없이 관대”한 논리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이를 직시하지 않으면 일제가 조선을 어떻게 지배하려고 했는지를 놓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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