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독본: 파란' 펴낸 정민 교수]
"조선천주교, 신자 1000명 넘자 독자적으로 신부 10명 임명… 형 정약전과 함께 선출돼
훗날 배교를 선택한 정약용, 문집서 천주교 관련 내용 빼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은 것"
정민(58)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이렇게 주장하고 나섰다.
지난 27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정 교수는
열 명의 신부 중 이름이 확인된 이는 7 명이다.
프랑스 선교사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다섯 명 이름이 나오고, 별도의 기록에 2 명이 더 있다.
그중 정약용은 없다.
정 교수는 "신부를 결정한 모임에 다산과 형 정약전이 있었다"면서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나머지 셋 중 다산 형제가 반드시 포함됐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기록에 왜 빠졌을까?
"다산은 이후 배교하면서 문집 등에서 천주교 관련 문제를 스스로 검열했다.
만년에 '조선복음전래사'를 썼는데, 여기에서도 자신 관련 이야기를 뺐다.
달레의 책은 '조선복음전래사'에서 기록을 가져왔으므로 다산의 이름이 기록될 수 없었다."
이번에 두 권으로 낸 책은 마흔 살까지의 다산을 다룬 평전이다.
특히 다산과 천주교의 관계에 집중했다.
정 교수는 "천주교 측에서는 다산이 한때 배교했지만 만년에 회개해서 신자로 죽었고,
국학 쪽에서는 신자였다가 배교한 뒤로는 온전한 유학자로 돌아왔다고 한다"면서
"모든 것을 진영 논리로 파악하니까 중간에 위치한 다산을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로 끌고 가
실상을 왜곡 아니면 은폐하는 굴절 현상이 생긴다"고 했다.
청년 다산은 왜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을까.
정 교수는 "서학(西學)에 심취했던 다산은 이 놀라운 물질문명의 배후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정조가 '중용(中庸)'에 대한 문제 70 개를 냈을 때
다산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이용해 풀이해서 극찬받았다.
그러니까 '아, 이게 먹힌다. 경학(經學)에서도 새로운 시선을 가능하게 하는구나,
조선사회 변혁의 에너지를 여기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을 것이다."
정 교수는 "정치가·행동가로서의 젊은 시절 다산을 들여다보니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면서
"권모술수에 능하고 추진력·돌파력도 대단한 '정치가 다산'이
천주교라는 문제와 결부되어 사회 변혁의 흐름에 어떻게 올라타고 휩쓸려갔는지 이해해야만
만년의 다산을 온전히 그려낼 수 있다"고 했다.
앞으로 유배기와 해배(解配) 후 시기를 짚어 4~5권 정도로 책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애민의식으로 가득한 성인(聖人) 다산을 만들 생각이 없다.
그도 우리와 같이 숨 쉬고 고통받고 고민하던 청춘이었다.
흠결도 있고, 고뇌도 많은 입체적인 인간으로 다산을 복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