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나라

세종대왕도 '범죄와의 전쟁'...집권말 해마다 100명 넘게 죄인 사형 (심영주 기자, 조선일보)

colorprom 2019. 7. 30. 18:12



세종대왕도 '범죄와의 전쟁'...집권말 해마다 100명 넘게 죄인 사형


             
입력 2019.07.30 10:04 | 수정 2019.07.30 11:07

세종대왕 어진. /연합뉴스
세종대왕 어진. /연합뉴스
조선 시대 성군의 상징인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이
집권 말기에는 죄인들을 해마다 100명 넘게 사형에 처하며 ‘범죄와의 전쟁’을 벌였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30일 조병인 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학술지 ‘형사정책연구’ 여름호에 실은 논문
세종시대 도둑과의 전쟁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세종은 재위 29년(1447년)부터 31년까지 3년간 모두 550명의 죄수를 처형했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재위 30년(1448년)에는 무려 233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세종이 임금으로 일한 31년 6개월간 처형당한 범죄자가 모두 1491명이고,
즉위 이후 28년간 처형 인원이 해마다 50명 안팎에 머문 점을 감안하면
말년에 극형이 유난히 집중된 셈이다.
사형수 대부분은 강도⋅절도 등 도둑이었다.

그러나 세종이 처음부터 이렇게 많은 사형 집행을 한 것은 아니다.
논문에 따르면 어진 정치를 다짐하며 즉위한 세종
재위 기간 형정담당 관원들에게 형벌권 발동을 최대한 자제하도록 당부했고,
형 집행을 정지하는 ‘금형일’(禁刑日)을 지정하는 방식으로 사형 집행을 지연시켰다.

갖가지 이유로 형 집행을 미루기도 했다.
부정을 타 농사를 망칠 수 있다는 이유로 집행을 가을로 미루게 하는가 하면
일식과 월식이 있는 날, 초하루, 보름날, 24절기, 비 오는 날 등 여러 이유를 집행 연기 사유로 붙였다.

이 때문에 재위 21년에는 미결 사형수가 190명까지 늘었다.
전 위원은 "세종은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아 병석에서 보낸 날이 많았으니,
처형 재가를 올릴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짚었다.

세종은 또 즉위 초반 온정주의적 형사정책과 함께 사면도 자주 내렸다.
세종실록 기사를 보면
세종은 즉위 4년 ‘절도 3범을 가려서 처형할 때 사면 이전의 범행은 묻지 말도록 했다’고 돼 있다.
종전에는 사면 이전 범행을 합해 절도죄로 세 차례 적발되면 교수형에 처하는 게 원칙이었다.
세종은 도둑 대책을 ‘중벌(重罰)주의’에서 ‘온정주의’로 바꾼 이후 23년간 20차례 사면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런 온정주의 형사정책치안이 불안해지는 역효과를 냈다고 눈문은 지적했다.
횃불을 들고 다니며 재물을 약탈하는 화적(火賊)이 출몰해 신도시 한양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다는 것이다.
화적떼 단속이 국정과제로 떠오르면서
재위 8년에는 오늘날 소방청에 해당하는 금화도감(禁火都監)이 출범했다.

이후 신하들과 장기간 논쟁 끝에 중벌주의를 복구했고
재위 말년에 대대적 사형 집행이 이뤄졌다고 논문은 분석했다.

세종은 재위 27년에 이르러서야 형조판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벌주의 정책을 23년 만에 복구했다.
2년 뒤부터는 소나 말을 훔치다가 적발되면 곤장 100대를 때리고
팔에 ‘소도둑’(盜牛·도우) 등 문신을 새긴 뒤 가족과 함께 섬에 격리했다.
두 번째부터는 곧바로 교수형에 처하기도 했다.
한 번에 십수 명씩 처형당한 끝에 이듬해 기록적인 처형이 이뤄졌다.

재위 말기 죄수들이 무더기로 처형된 이유는 도둑들을 자비로 다루다가 중벌로 회귀한 결과라고
전 위원은 분석했다.
"이전 같았으면 진즉에 처형됐을 도둑들이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하다가
중벌이 복구되자 붙잡혀 처형됐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전 위원은 "사법기관 전체가 아무리 신속히 변해도
사활을 걸고서 지능적으로 범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완벽하게 압도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세종(온정주의적) 형사정책은 도둑들에게는 크게 환영받았을지 몰라도
나라의 치안 수준을 높이는 데는 도리어 걸림돌이 되었던 것 같다"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30/2019073000708.html



안성준(n****)2019.07.3013:46:42신고
세종종천법을 만들었다. 부모중 한쪽이 노비면 자동노비가 되는 세계 유일의 나라를 만들었다던가. 이후 조선 노비는 급증한다. 재산을 늘리기 위해 자기 노비끼리는 결혼금지. 가난한 양인과 결혼시킴. 양반들은 막대한 노비라는 재산을 늘림.
조선의 노비는 전체인구의 약40% 정도까지 기록적으로 늘어남.
한 개인이 7 17-19세기 미국남부 전체 인구의 30%가 노비.
우리는 그걸 뛰어넘은 헬조선이었고, 그걸 만든 이가 세종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조영탁(centa****)2019.07.3014:52:20신고
안성준씨가 정확히 알고 있소.
세종은 성군이라 하지만, 철저히 사대주의 사상의 기반 위에서
국가를 노비들의 노동력 착취로 연명해가는 극소수 양반들만의 착취국가로 만들어버렸지요.
그러나 중국송나라 때 이미 노비제도를 철폐했습니다.
송 태조가 이르기를 같은 나의 백성들 사이에서 양천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라고 천명했습니다.
그때 한반도에는 고려라는 나라가 있었고,
고려에도 역시 조선시대와 같은 악랄한 노비제도는 없었습니다.
전부 다 중원에서 주자학이 조선으로 건너오면서 변질되어 나타난 슬픈 역사입니다.

          김현(happyday****2019.07.3014:03:31신고

1000년 후에 2019년 문씨 정부가 생기지 않았다면 한국은 안망했다는라는 글이나 안나왔으면 좋겠오.. 그래도 현재 당신의 씨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하오.

김상현(ki****)2019.07.3013:22:53신고
국가인권위원회는 533명을 처형한 세종에게 인권탄압 중지하라는 결정 통보하고
인권단체는 세종을 인권억압자라고 시위 해야지?

박준달(qwe2****)2019.07.3012:35:19신고

조선왕조 500년이 이 나라를 망쳤다.선조들이 제대로 나라를 다스렸다면 지금과 같이는 살지 않을꺼다 일본보다 더 기술이 앞섰을텐데.
          조영탁(centa****)2019.07.3014:59:46신고
조선은 사대주의에 입각해서 세워진 나라여서 시작부터 단추가 잘못 꿰어진 나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성계가 명태조에게 나라의 국호를 "조선"과 "화령" 중에 골라달라고 품신을 하니,
주원장이 "너희는 옛 조선의 후예이니 조선으로 하라."고 명하여 그것을 받들었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영문명 KOREA의 나라, 고려는 최소한 중기까지는 칭제건원을 한 황제의 나라였고, 자주성과 문화가 조선을 명백히 능가하는 국가였습니다..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임을 천명한 국명입니다.
카자흐스탄의 케레이 족의 이름 "케레이"는 우리말의 "겨레"이기도 하고,
"고려"의 옛말 "골레이"의 변형이기도 합니다.
좌우간 조선은 지워버리고 싶은 우리 역사입니다.

          변재황(jhbyo****)2019.07.3014:41:21신고
정조대왕 이후의 위정자들이 이 나라를 망쳤죠.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30/201907300070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