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100세 일기]
김선태 목사는 6·25전쟁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점자(點字)를 배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 학교인 숭실중학과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 후에 목사가 되기 위해 장로회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매코믹신학대학까지 마치고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에는 목사가 되기보다는 실명한 사람과 더 많은 빛을 찾는 환자를 위해 안과병원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사회적 업적이 특출했기 때문에 아시아에서는 모두가 흠모하는 막사이 사이 상을 받기도 하고,
졸업한 숭실대와 신학대학으로부터는 명예학위를 받았다. 대통령 표창과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거지에서 성자(聖者)가 된 김선태 원장의 인생 이야기는 2008년 조선일보 'Why?'에 소개된 적이 있다.
내가 축하 예배에 안내를 받아 들어갔을 때는 병원 안에 있는 예배실이 가득 차 있었다.
식순을 맡아 진행하는 이들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원로 목사이다.
내가 축사 순서를 맡기로 했다.
두 차례 축하 음악 순서가 있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연주자들도 있어서 그런지 청중은 엄숙하기보다는 경건한 자세로 경청했다.
김선태 목사가 답사를 할 차례가 되었다.
"존경하는 은사님과 포옹하는 인사를 하고 싶다"면서 나를 강단 앞으로 맞아들여
오래도록 서로 껴안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김 목사가 그렇게까지 나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모든 식순을 끝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았다.
김 목사는 책을 쓸 때마다 '태양의 빛'과 '태양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얘기한다.
그는 어렸을 때 실명했다. 그때 이후 태양에서 오는 빛이 얼마나 아쉬웠을까.
그 빛을 다시는 볼 수가 없으니까 상실한 시각 대신에 청각으로 그 광명 모두를 대신했을 것이다.
태양과 빛, 소리가 80평생 삶의 희망이고 소원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날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목사님 오래오래 사셔서 우리에게 감사와 행복을 깨닫게 해주시고
절망은 없다는 가르침을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