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익태의 교향시 ‘에텐라쿠’ ‘降天聲樂’… 日 궁중음악 아닌 통일신라 ‘降天聲曲’· 조선 아악 영향
⊙ 《아이리쉬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아일랜드와 한국 처지 비슷하다. 한국 독립을 염원한다”
⊙ 3국 동맹 이후 일본 입김이 세진 유럽 땅에서 ‘한국’이라는 단어는 금기어
⊙ 안익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佛 기피인물? 佛 일간지에 연주회 호평 기사 실려
金勝烈
1976년 출생. 서울대 대학원 석사, 파리8대학 석사(공연예술학), 파리7대학 박사과정(동양학) 수학 / 유럽 50여 개 도시와 일본·중국 등지에서 세계적인 클래식·오페라 거장들의 무대 900여 회 관람 / 저서 《거장들의 유럽 클래식 무대》(2013, 투티)
⊙ 《아이리쉬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아일랜드와 한국 처지 비슷하다. 한국 독립을 염원한다”
⊙ 3국 동맹 이후 일본 입김이 세진 유럽 땅에서 ‘한국’이라는 단어는 금기어
⊙ 안익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佛 기피인물? 佛 일간지에 연주회 호평 기사 실려
金勝烈
1976년 출생. 서울대 대학원 석사, 파리8대학 석사(공연예술학), 파리7대학 박사과정(동양학) 수학 / 유럽 50여 개 도시와 일본·중국 등지에서 세계적인 클래식·오페라 거장들의 무대 900여 회 관람 / 저서 《거장들의 유럽 클래식 무대》(2013, 투티)
대한민국의 애국가 작곡가이자 20세기 초·중반 동양 최고의 지휘자 안익태(安益泰·1906~1965)의 친일(親日) 의혹이 처음 제기된 것은 2006년 봄이었다. 당시 베를린 훔볼트대학 음악학과에 유학 중이던 송병욱이 안익태의 친일 의혹을 제기하는 글을 《객석》 2006년 3월호와 4월호에 게재했다.
이듬해 음악학자 이경분이 《잃어버린 시간, 1938~1944》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후 고(故) 노동은의 저서와 최근 이해영의 《안익태 케이스》까지 논란에 뛰어들었다.
필자는 이들 4인의 안익태 연구서와 논문·칼럼을 모두 읽었다. 문제는 필자가 보기에 이들의 연구에 상당한 오류가 있다는 점이다.
우선 2006년과 2008년 송병욱은 네 차례에 걸쳐 《객석》에 안익태 칼럼을 연재했다. 그의 칼럼을 반복해 읽으면서 필자는 한 편의 잘 짜인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우선 2006년 3월호 87쪽에서 송병욱은 ‘에텐라쿠(越天樂)’와 ‘강천성악(降天聲樂)’의 의미가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으로 같다고 했다. 안익태가 ‘에텐라쿠’를 1938년 먼저 작곡했는데, 1959년 이를 ‘강천성악’으로 교묘하게 제목만 바꿔 대한민국을 농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고대 궁중음악, 가가쿠(雅樂) 중 하나인 에텐라쿠의 뜻은 ‘하늘을 넘어온 음악’이지,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이 아니다. 서기 794년 출범한 헤이안 시대에 처음 등장하는 ‘에텐라쿠’의 기원은 그보다 30~50년 전 활동한 통일신라시대 거문고 명인 옥보고(742~765년 경덕왕 때 음악가)의 ‘강천성곡(降天聲曲)’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송병욱은 간과하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인 ‘강천성곡’의 뜻이 그대로 에텐라쿠의 의미로 옮겨가지 않고서는 이 같은 의미상 일치는 불가능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인 ‘강천성곡’이 (한반도) 하늘을 넘어 일본열도에 상륙하면서 ‘하늘을 넘어온 음악’인 ‘에텐라쿠’로 탈바꿈됐지만, 통용되는 뜻만은 ‘강천성곡’과 똑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으로 유지됐다는 데에 ‘에텐라쿠’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안익태는 이 비밀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텐라쿠’가 ‘강천성곡’의 다른 이름이라 생각했고, 이 같은 이유에서 훗날 자신의 대표작 ‘야상곡과 에텐라쿠’를 ‘강천성악’이라 명명한 것이다.
송병욱은 또한 같은 쪽에서 전정임의 저서 《안익태》 167쪽의 ‘강천성악’ 곡 해설을 인용하고 있다. 안익태의 지휘로 과테말라 국립교향악단이 연주한 실황을 담은 이 작품의 음반에는 안익태가 직접 해설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써 있다는 것이다.
〈이 ‘강천성악’은 맨 처음 우리 세종대왕께서 영감을 받아 아악을 작곡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안익태 지휘 과테말라 국립교향악단의 LP음반을 열람한 필자는 이 같은 ‘강천성악’ 곡 해설을 찾을 수 없었다. 이는 순전히 전정임의 이해할 수 없는 받아쓰기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같은 음반 재킷에는 다음과 같은 곡 해설이 실려 있을 뿐이었다.
〈이 ‘강천성악’은 맨 처음 우리 세종대왕께서 영감을 받아 아악을 작곡한 것으로 1940년 안익태씨가 교향악시로 작곡하였다.〉
즉 안익태는 전정임이 최초 인용한 그 같은 곡 해설을 한 적이 없다. 제3자가 곡 해설 쓴 것을 마치 안익태가 쓴 것처럼 해석했다는 데에 전정임과 송병욱의 동반 책임이 있다.
안익태, ‘한국환상곡’ 계속 지휘
송병욱은 줄곧 ‘에텐라쿠’가 ‘강천성악’으로 둔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40년 9월 27일 베를린에서 체결된 독일·이탈리아·일본의 3국 동맹 전후인 그해 연말까지 안익태는 ‘에텐라쿠’가 아닌 ‘야상곡과 에텐라쿠’를 지휘했음을 증명하는 연주회 프로그램을 필자는 소장하고 있다.
‘야상곡과 에텐라쿠’는 1938년 작곡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것이 3국 동맹 체결 이후부터 일제의 강요로 ‘야상곡’이 거세된 ‘에텐라쿠’로 제목이 바뀌었으나, 곡 자체는 ‘야상곡과 에텐라쿠’ 전체가 줄곧 연주되는 것이다.
또 송병욱은 ‘한국환상곡’이 1940년 로마에서 연주되고 더는 연주기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송병욱의 무지다. 로마연주회가 있은 1940년 4월 30일 이후, 5월 25일의 베오그라드와 9월 4일의 부다페스트에서 ‘한국환상곡’을 안익태가 연달아 지휘했기 때문이다.
《객석》 2006년 4월호에서도 송병욱은 잘못된 해석으로 일관하고 있다. 87쪽 첫머리에 송병욱은 ‘음악을 하늘로부터의 선물로 이해하는 견해가 한민족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하며, 한국 신화나 설화 및 조선조 음악관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대로 8세기 통일신라 경덕왕 때의 옥보고가 ‘강천성곡’이라는 거문고곡을 작곡했다.
송병욱의 이런 해석은 계속된다. 안익태가 1938년 2월 《아이리쉬 타임스》 인터뷰에서 말한 ‘2000여 년 전 음악과 함께 하늘로부터 직접 온 첫 황제’는 진무텐노(神武天皇·일본 개국신화의 주인공-편집자註)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안익태 케이스》의 부록에서 이해영이 정확히 번역해놓았다. ‘2000여 년 전’이 아니라, ‘2000년 훨씬 전에’가 올바른 번역인 것이다.
즉 안익태의 1938년 인터뷰 시점으로부터 ‘2000년 훨씬 전’이란 기원전(BC)을 가리킴은 물론이다. 즉 안익태가 ‘단군 왕검’을 지칭한 것이 송병욱에 의해 그리고 이후에는 이경분(《잃어버린 시간, 1938~1944》 235쪽)에 의해 반복해서 ‘신무천황’으로 잘못 해석된 것이다. 또 《아이리쉬 타임스》와의 인터뷰 내내 안익태는 “식민지배를 당한 아일랜드와 한국 처지가 비슷하다”며 “한국 독립을 염원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문맥 속에 일본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다.
《객석》 2008년 2월호 93쪽에서도 송병욱의 이 같은 주장은 이어진다. 같은 시기 강문야의 ‘대만무곡’이 일제에 의해 금지되지 않았다며, 안익태의 ‘한국환상곡’도 일제에 의해 금지될 이유가 없던 곡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나 ‘애국가’가 금지된 마당에 그 ‘애국가’가 피날레에 삽입된 ‘한국환상곡’ 또한 안익태 본인이 《아이리쉬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금지되었음은 당연한 이치다.
이경분의 성급한 단정
음악학자 이경분은 2007년 3월 독일에서 입수한 자료들을 기초로 《잃어버린 시간, 1938~1944》를 출간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은 저자 독단의 추정들로 넘쳐난다. 118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천황의 생일인 1940년 4월 30일에 있었던 로마연주회가 3국 동맹 연주회였다면, 일본의 대표로 나선 안익태가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했을 리 만무하며 홍보용 팸플릿에 실린 네 편의 비평문에서도 그는 일본음악가로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여기서도 〈코리아 판타지〉가 연주되었을 가능성 또한 희박하다.〉
그러나 음악학자 허영한의 연구에 의하면, 이날 안익태는 ‘한국환상곡’을 분명히 지휘했다. (《낭만음악》 2009년 여름호의 ‘한국환상곡의 여행’ 197쪽, ‘사진으로 보는 안익태’ 247쪽 연보 참조)
저자는 같은 페이지에 실린 각주에서도 ‘야악(아악에 의함)’과 심포니적 판타지 ‘조선’을 연주했다는 1940년 4월24일자 《조선일보》 기사가 신빙성이 약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132쪽 첫머리에서도 저자 이경분은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무턱대고 안익태와 당시 언론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123쪽의 다음과 같은 언급 또한 이경분의 성급한 단정이다.
〈특히 ‘교쿠토’는 ‘극동’을 의미하는데, 안익태를 일본 지휘자로 알고 있는 연주회의 청중은 이를 ‘일본’으로 받아들였을 것이 틀림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올시다’이다. 1940년 11월 3일의 부카레스트 연주회 프로그램에는 ‘교쿠토(極東)’가 한국 선율을 주제로 작곡한 곡이라는 해설이 실려 있었다. 이 해설을 읽은 부카레스트 청중은 ‘교쿠토’를 일본이 아닌 한국으로 인식했지 않았을까. 저자의 빗나간 분석은 계속된다. 120쪽에서 이경분은 ‘그렇다면 이 때(1940년 9월 3일 부다페스트 연주회에서) 연주된 두 작품은 한국 제목으로 소개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때’ 연주된 두 작품은 ‘야상곡과 에텐라쿠’와 ‘한국환상곡’으로 소개되었다.
117쪽부터 127쪽까지의 ‘1940년 안익태 연주회 비평문의 진실’을 종합해보면, 핵심은 저자가 1940년 9월 27일 베를린에서 3국 동맹이 체결된지 모른다는 데 있다. 3국 동맹 체결 전까지 안익태는 ‘한국환상곡’과 ‘야상곡과 에텐라쿠’를 100% 지휘했으나, 3국 동맹 이후부터 일제의 압박으로 ‘교쿠토’ ‘도아(東亞)’ ‘만주국’ 및 ‘에텐라쿠’가 등장함을 이경분은 놓치고 있다.
한스 아들러가 제작한 1942년 3월12일자 안익태 비평문 팸플릿은 3국 동맹 체결 이후의 제작물이므로 고의로 ‘한국환상곡’을 누락했을 가능성이 높음 또한 이경분은 놓치고 있다. 3국 동맹 이후 일본의 입김이 세진 유럽 땅에서 ‘한국’이라는 단어가 금기어였다는 정황 자체를 이경분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저자는 157쪽에서 1941년 12월이 3국 동맹 체결 시점이라 말한다. 이런 잘못된 추정 위에 쌓아올린 안익태 연구가 안익태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시키는 주된 근거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226쪽에서도 이경분은 ‘성공적인 야심가 카라얀처럼 독일에서 안익태는 출세를 위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고자 노력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지금보다 훨씬 더 동양인 음악가가 홀대받던 당시 유럽 음악계에서 안익태가 기울인 각고의 노력이 문제될 게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송병욱과 이경분의 안익태 연구는 최근 이해영의 《안익태 케이스》에서 절정을 구가하고 있다.
이해영發 허위사실 날조
연초에 출간된 이해영의 《안익태 케이스》는 사실과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안익태 케이스》의 54쪽에 이런 구절이 있다.
〈더군다나 전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 바로 옆 마요르카섬에 머물면서도 그가 환대받았던 프랑스 음악계에 단 한 번도 출연하지 않은 사실은 그가 프랑스의 ‘기피 인물’일지 모른다는 심증을 강화시킨다.〉
그렇지 않다. 안익태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프랑스 음악계에 출연한 적이 있다. 1961년 2월 2일(목) 밤 9시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안익태는 당시 프랑스 최고악단 파리음악원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했다. 당시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죽음과 정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1번(해럴드 콘 협연), 안익태의 ‘한국환상곡’〉
필자는 당시 연주회 프로그램을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연주회가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주는 프랑스 일간지의 리뷰 기사 또한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의 위와 같은 언급은 사실이 아니다. 안익태는 종전 후 프랑스의 기피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난 1월14일자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저자는 지금껏 확인된 나치 부역만으로도 종전 후 프랑스에서였다면 안익태는 사형감이라고 단정짓는다.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나치 점령기의 프랑스에서 안익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나치 부역을 일삼은 벨기에 출신 프랑스의 명지휘자 앙드레 클뤼이탕스(1905~1967)와 스위스의 명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1877~1962)의 사례를 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클뤼이탕스는 연합군이 파리를 탈환하고 얼마 후 보르도와 비시에서의 나치 부역 혐의로 고발당한다. 나치 치하 비시괴뢰정부의 여름음악회를 수시로 지휘하고, 보르도에서 나치에 부역한 혐의로 클뤼이탕스는 추방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몇 달간 추방 후 클뤼이탕스는 혐의를 벗고 파리음악원 오케스트라와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수장으로 취임한다. 클뤼이탕스보다 노골적이던 명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 또한 종전 후 1년의 연주정지 처분 이후 매년 100여 회의 왕성한 연주활동을 이어나갔다. 코르토는 비시괴뢰정부로부터 고등판무관(haut commissaire)이라는 작위를 받는 등 나치에 철저히 부역한 극렬 나치주의자였다. 그럼에도 종전 후 프랑스는 프랑스 국적의 코르토와 클뤼이탕스를 사형에 처하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 국적이었다 해도 안익태가 종전 후 사형에 처해질 일은 없었다.
또 이해영은 《안익태 케이스》의 53쪽 각주에서 안익태가 1944년 4월 파리에서 히틀러 생일 경축음악회를 지휘했다고 주장한다. 히틀러의 생일은 정확히 1889년 4월 20일이다. 히틀러 생일 경축음악회가 성립하려면 그의 생일 당일인 4월 20일이나 그 전날인 4월 19일의 전야음악회를 지휘했어야 한다. 그러나 저자가 같은 각주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1944년 4월 19일과 20일에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히틀러 생일 경축음악회를 지휘한 사람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이지 안익태가 아니었다. 카라얀은 나치당원에다 극렬 나치주의자이기에 히틀러 생일 경축음악회를 지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익태는 살 플레이엘이라는 파리의 다른 연주회장에서 1944년 4월 14일과 18일, 21일에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베토벤 페스티벌을 주재했을 뿐이다. 당시 프로그램 또한 보유하고 있는 필자는 그 어떤 히틀러 생일 경축음악회라는 언급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안익태는 카라얀처럼 나치당원도 아니었다. 당시 17만명 넘게 가입되어 있었다는 제국음악회원일 뿐이었다.
안익태는 이승만·박정희에게 청탁을 일삼은 기회주의자다?
이해영은 이 책의 37쪽 도표에서도 다섯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1940년 4월 30일 로마에서 안익태가 지휘한 연주곡목을 ‘미상’이라고 했지만, 명백히 ‘야악(아악에 의함)’이라는 1940년 4월24일자 《조선일보》 기사가 존재한다. 이 ‘야악’은 ‘야상곡과 에텐라쿠’일 가능성이 100%다. 이후 1940년 5월 25일과 9월 4일, 10월 19일, 11월 3일 베오그라드와 부다페스트, 소피아, 부쿠레슈티에서의 연주곡이 ‘에텐라쿠’라 한 것 또한 명백한 오류다. 당시 연주곡 모두 ‘야상곡과 에텐라쿠’라는 사실을 증빙하는 프로그램과 근거자료를 필자는 소장하고 있다. ‘야상곡과 에텐라쿠’와 ‘에텐라쿠’라는 제목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바, ‘에텐라쿠’라는 단독 제목은 3국 동맹이 체결되고 1년이 지난 1941년 연주회부터 등장한다.
그리고 저자는 안익태가 이승만과 박정희에게 각종 청탁을 일삼은 기회주의자였다고 폄하한다. 그 대표사례로 안익태가 이승만에게 워싱턴 문화참사관 자리를 요구하고, 자신의 ‘한국환상곡’을 주제로 뮤지컬영화 제작을 요청했음을 든다. 그러나 당시 1950~1960년대 한국은 지금의 소말리아보다 못살던 세계 최빈국이었다.
세계적인 지휘자 안익태가 조국의 이미지를 쇄신시키기 위해 워싱턴 문화참사관이라는 직함으로 미국 순회연주를 하고 싶다는 발상이 무슨 큰 허물이란 말인가. ‘한국환상곡’의 뮤지컬영화 제작 요청 또한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 본다.
그 밖에 고(故) 노동은 교수의 저서와 세 사람의 또 다른 주장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면밀히 검토된 연구가 재정립되어 선구자 안익태가 복권되기를 소망한다.⊙
이듬해 음악학자 이경분이 《잃어버린 시간, 1938~1944》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후 고(故) 노동은의 저서와 최근 이해영의 《안익태 케이스》까지 논란에 뛰어들었다.
필자는 이들 4인의 안익태 연구서와 논문·칼럼을 모두 읽었다. 문제는 필자가 보기에 이들의 연구에 상당한 오류가 있다는 점이다.
우선 2006년과 2008년 송병욱은 네 차례에 걸쳐 《객석》에 안익태 칼럼을 연재했다. 그의 칼럼을 반복해 읽으면서 필자는 한 편의 잘 짜인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우선 2006년 3월호 87쪽에서 송병욱은 ‘에텐라쿠(越天樂)’와 ‘강천성악(降天聲樂)’의 의미가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으로 같다고 했다. 안익태가 ‘에텐라쿠’를 1938년 먼저 작곡했는데, 1959년 이를 ‘강천성악’으로 교묘하게 제목만 바꿔 대한민국을 농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고대 궁중음악, 가가쿠(雅樂) 중 하나인 에텐라쿠의 뜻은 ‘하늘을 넘어온 음악’이지,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이 아니다. 서기 794년 출범한 헤이안 시대에 처음 등장하는 ‘에텐라쿠’의 기원은 그보다 30~50년 전 활동한 통일신라시대 거문고 명인 옥보고(742~765년 경덕왕 때 음악가)의 ‘강천성곡(降天聲曲)’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송병욱은 간과하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인 ‘강천성곡’의 뜻이 그대로 에텐라쿠의 의미로 옮겨가지 않고서는 이 같은 의미상 일치는 불가능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인 ‘강천성곡’이 (한반도) 하늘을 넘어 일본열도에 상륙하면서 ‘하늘을 넘어온 음악’인 ‘에텐라쿠’로 탈바꿈됐지만, 통용되는 뜻만은 ‘강천성곡’과 똑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으로 유지됐다는 데에 ‘에텐라쿠’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안익태는 이 비밀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텐라쿠’가 ‘강천성곡’의 다른 이름이라 생각했고, 이 같은 이유에서 훗날 자신의 대표작 ‘야상곡과 에텐라쿠’를 ‘강천성악’이라 명명한 것이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의 흉상 제막식이 2001년 12월 11일 오전 서울 올림픽 공원 내 평화의 광장에서 열렸다. 안익태 기념재단이 세운 선생의 흉상을 부인 로리타 안 여사와 외손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
〈이 ‘강천성악’은 맨 처음 우리 세종대왕께서 영감을 받아 아악을 작곡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안익태 지휘 과테말라 국립교향악단의 LP음반을 열람한 필자는 이 같은 ‘강천성악’ 곡 해설을 찾을 수 없었다. 이는 순전히 전정임의 이해할 수 없는 받아쓰기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같은 음반 재킷에는 다음과 같은 곡 해설이 실려 있을 뿐이었다.
〈이 ‘강천성악’은 맨 처음 우리 세종대왕께서 영감을 받아 아악을 작곡한 것으로 1940년 안익태씨가 교향악시로 작곡하였다.〉
즉 안익태는 전정임이 최초 인용한 그 같은 곡 해설을 한 적이 없다. 제3자가 곡 해설 쓴 것을 마치 안익태가 쓴 것처럼 해석했다는 데에 전정임과 송병욱의 동반 책임이 있다.
안익태, ‘한국환상곡’ 계속 지휘
지난 1984년 안익태 선생의 유족들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안익태 대한국 애국가 자필악보’. |
‘야상곡과 에텐라쿠’는 1938년 작곡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것이 3국 동맹 체결 이후부터 일제의 강요로 ‘야상곡’이 거세된 ‘에텐라쿠’로 제목이 바뀌었으나, 곡 자체는 ‘야상곡과 에텐라쿠’ 전체가 줄곧 연주되는 것이다.
또 송병욱은 ‘한국환상곡’이 1940년 로마에서 연주되고 더는 연주기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송병욱의 무지다. 로마연주회가 있은 1940년 4월 30일 이후, 5월 25일의 베오그라드와 9월 4일의 부다페스트에서 ‘한국환상곡’을 안익태가 연달아 지휘했기 때문이다.
1943년 부다페스트 연주를 마치고 로마로 떠나는 안익태 선생. (제공=안익태기념재단) |
송병욱의 이런 해석은 계속된다. 안익태가 1938년 2월 《아이리쉬 타임스》 인터뷰에서 말한 ‘2000여 년 전 음악과 함께 하늘로부터 직접 온 첫 황제’는 진무텐노(神武天皇·일본 개국신화의 주인공-편집자註)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안익태 케이스》의 부록에서 이해영이 정확히 번역해놓았다. ‘2000여 년 전’이 아니라, ‘2000년 훨씬 전에’가 올바른 번역인 것이다.
즉 안익태의 1938년 인터뷰 시점으로부터 ‘2000년 훨씬 전’이란 기원전(BC)을 가리킴은 물론이다. 즉 안익태가 ‘단군 왕검’을 지칭한 것이 송병욱에 의해 그리고 이후에는 이경분(《잃어버린 시간, 1938~1944》 235쪽)에 의해 반복해서 ‘신무천황’으로 잘못 해석된 것이다. 또 《아이리쉬 타임스》와의 인터뷰 내내 안익태는 “식민지배를 당한 아일랜드와 한국 처지가 비슷하다”며 “한국 독립을 염원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문맥 속에 일본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다.
《객석》 2008년 2월호 93쪽에서도 송병욱의 이 같은 주장은 이어진다. 같은 시기 강문야의 ‘대만무곡’이 일제에 의해 금지되지 않았다며, 안익태의 ‘한국환상곡’도 일제에 의해 금지될 이유가 없던 곡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나 ‘애국가’가 금지된 마당에 그 ‘애국가’가 피날레에 삽입된 ‘한국환상곡’ 또한 안익태 본인이 《아이리쉬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금지되었음은 당연한 이치다.
이경분의 성급한 단정
1962년 5·16혁명 1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축전에서 작곡가 안익태씨가 자신이 작곡한 코리아 환타지를 지휘하고 있다. |
〈천황의 생일인 1940년 4월 30일에 있었던 로마연주회가 3국 동맹 연주회였다면, 일본의 대표로 나선 안익태가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했을 리 만무하며 홍보용 팸플릿에 실린 네 편의 비평문에서도 그는 일본음악가로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여기서도 〈코리아 판타지〉가 연주되었을 가능성 또한 희박하다.〉
그러나 음악학자 허영한의 연구에 의하면, 이날 안익태는 ‘한국환상곡’을 분명히 지휘했다. (《낭만음악》 2009년 여름호의 ‘한국환상곡의 여행’ 197쪽, ‘사진으로 보는 안익태’ 247쪽 연보 참조)
저자는 같은 페이지에 실린 각주에서도 ‘야악(아악에 의함)’과 심포니적 판타지 ‘조선’을 연주했다는 1940년 4월24일자 《조선일보》 기사가 신빙성이 약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132쪽 첫머리에서도 저자 이경분은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무턱대고 안익태와 당시 언론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123쪽의 다음과 같은 언급 또한 이경분의 성급한 단정이다.
〈특히 ‘교쿠토’는 ‘극동’을 의미하는데, 안익태를 일본 지휘자로 알고 있는 연주회의 청중은 이를 ‘일본’으로 받아들였을 것이 틀림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올시다’이다. 1940년 11월 3일의 부카레스트 연주회 프로그램에는 ‘교쿠토(極東)’가 한국 선율을 주제로 작곡한 곡이라는 해설이 실려 있었다. 이 해설을 읽은 부카레스트 청중은 ‘교쿠토’를 일본이 아닌 한국으로 인식했지 않았을까. 저자의 빗나간 분석은 계속된다. 120쪽에서 이경분은 ‘그렇다면 이 때(1940년 9월 3일 부다페스트 연주회에서) 연주된 두 작품은 한국 제목으로 소개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때’ 연주된 두 작품은 ‘야상곡과 에텐라쿠’와 ‘한국환상곡’으로 소개되었다.
117쪽부터 127쪽까지의 ‘1940년 안익태 연주회 비평문의 진실’을 종합해보면, 핵심은 저자가 1940년 9월 27일 베를린에서 3국 동맹이 체결된지 모른다는 데 있다. 3국 동맹 체결 전까지 안익태는 ‘한국환상곡’과 ‘야상곡과 에텐라쿠’를 100% 지휘했으나, 3국 동맹 이후부터 일제의 압박으로 ‘교쿠토’ ‘도아(東亞)’ ‘만주국’ 및 ‘에텐라쿠’가 등장함을 이경분은 놓치고 있다.
한스 아들러가 제작한 1942년 3월12일자 안익태 비평문 팸플릿은 3국 동맹 체결 이후의 제작물이므로 고의로 ‘한국환상곡’을 누락했을 가능성이 높음 또한 이경분은 놓치고 있다. 3국 동맹 이후 일본의 입김이 세진 유럽 땅에서 ‘한국’이라는 단어가 금기어였다는 정황 자체를 이경분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저자는 157쪽에서 1941년 12월이 3국 동맹 체결 시점이라 말한다. 이런 잘못된 추정 위에 쌓아올린 안익태 연구가 안익태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시키는 주된 근거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226쪽에서도 이경분은 ‘성공적인 야심가 카라얀처럼 독일에서 안익태는 출세를 위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고자 노력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지금보다 훨씬 더 동양인 음악가가 홀대받던 당시 유럽 음악계에서 안익태가 기울인 각고의 노력이 문제될 게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송병욱과 이경분의 안익태 연구는 최근 이해영의 《안익태 케이스》에서 절정을 구가하고 있다.
이해영發 허위사실 날조
2005년 3월 19일 안익태 선생 부인 로리타 안씨와 가족들이 안익태 선생의 유해가 안장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
〈더군다나 전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 바로 옆 마요르카섬에 머물면서도 그가 환대받았던 프랑스 음악계에 단 한 번도 출연하지 않은 사실은 그가 프랑스의 ‘기피 인물’일지 모른다는 심증을 강화시킨다.〉
그렇지 않다. 안익태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프랑스 음악계에 출연한 적이 있다. 1961년 2월 2일(목) 밤 9시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안익태는 당시 프랑스 최고악단 파리음악원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했다. 당시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죽음과 정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1번(해럴드 콘 협연), 안익태의 ‘한국환상곡’〉
필자는 당시 연주회 프로그램을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연주회가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주는 프랑스 일간지의 리뷰 기사 또한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의 위와 같은 언급은 사실이 아니다. 안익태는 종전 후 프랑스의 기피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난 1월14일자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저자는 지금껏 확인된 나치 부역만으로도 종전 후 프랑스에서였다면 안익태는 사형감이라고 단정짓는다.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나치 점령기의 프랑스에서 안익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나치 부역을 일삼은 벨기에 출신 프랑스의 명지휘자 앙드레 클뤼이탕스(1905~1967)와 스위스의 명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1877~1962)의 사례를 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클뤼이탕스는 연합군이 파리를 탈환하고 얼마 후 보르도와 비시에서의 나치 부역 혐의로 고발당한다. 나치 치하 비시괴뢰정부의 여름음악회를 수시로 지휘하고, 보르도에서 나치에 부역한 혐의로 클뤼이탕스는 추방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몇 달간 추방 후 클뤼이탕스는 혐의를 벗고 파리음악원 오케스트라와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수장으로 취임한다. 클뤼이탕스보다 노골적이던 명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 또한 종전 후 1년의 연주정지 처분 이후 매년 100여 회의 왕성한 연주활동을 이어나갔다. 코르토는 비시괴뢰정부로부터 고등판무관(haut commissaire)이라는 작위를 받는 등 나치에 철저히 부역한 극렬 나치주의자였다. 그럼에도 종전 후 프랑스는 프랑스 국적의 코르토와 클뤼이탕스를 사형에 처하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 국적이었다 해도 안익태가 종전 후 사형에 처해질 일은 없었다.
또 이해영은 《안익태 케이스》의 53쪽 각주에서 안익태가 1944년 4월 파리에서 히틀러 생일 경축음악회를 지휘했다고 주장한다. 히틀러의 생일은 정확히 1889년 4월 20일이다. 히틀러 생일 경축음악회가 성립하려면 그의 생일 당일인 4월 20일이나 그 전날인 4월 19일의 전야음악회를 지휘했어야 한다. 그러나 저자가 같은 각주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1944년 4월 19일과 20일에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히틀러 생일 경축음악회를 지휘한 사람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이지 안익태가 아니었다. 카라얀은 나치당원에다 극렬 나치주의자이기에 히틀러 생일 경축음악회를 지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익태는 살 플레이엘이라는 파리의 다른 연주회장에서 1944년 4월 14일과 18일, 21일에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베토벤 페스티벌을 주재했을 뿐이다. 당시 프로그램 또한 보유하고 있는 필자는 그 어떤 히틀러 생일 경축음악회라는 언급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안익태는 카라얀처럼 나치당원도 아니었다. 당시 17만명 넘게 가입되어 있었다는 제국음악회원일 뿐이었다.
안익태는 이승만·박정희에게 청탁을 일삼은 기회주의자다?
이해영은 이 책의 37쪽 도표에서도 다섯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1940년 4월 30일 로마에서 안익태가 지휘한 연주곡목을 ‘미상’이라고 했지만, 명백히 ‘야악(아악에 의함)’이라는 1940년 4월24일자 《조선일보》 기사가 존재한다. 이 ‘야악’은 ‘야상곡과 에텐라쿠’일 가능성이 100%다. 이후 1940년 5월 25일과 9월 4일, 10월 19일, 11월 3일 베오그라드와 부다페스트, 소피아, 부쿠레슈티에서의 연주곡이 ‘에텐라쿠’라 한 것 또한 명백한 오류다. 당시 연주곡 모두 ‘야상곡과 에텐라쿠’라는 사실을 증빙하는 프로그램과 근거자료를 필자는 소장하고 있다. ‘야상곡과 에텐라쿠’와 ‘에텐라쿠’라는 제목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바, ‘에텐라쿠’라는 단독 제목은 3국 동맹이 체결되고 1년이 지난 1941년 연주회부터 등장한다.
그리고 저자는 안익태가 이승만과 박정희에게 각종 청탁을 일삼은 기회주의자였다고 폄하한다. 그 대표사례로 안익태가 이승만에게 워싱턴 문화참사관 자리를 요구하고, 자신의 ‘한국환상곡’을 주제로 뮤지컬영화 제작을 요청했음을 든다. 그러나 당시 1950~1960년대 한국은 지금의 소말리아보다 못살던 세계 최빈국이었다.
세계적인 지휘자 안익태가 조국의 이미지를 쇄신시키기 위해 워싱턴 문화참사관이라는 직함으로 미국 순회연주를 하고 싶다는 발상이 무슨 큰 허물이란 말인가. ‘한국환상곡’의 뮤지컬영화 제작 요청 또한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 본다.
그 밖에 고(故) 노동은 교수의 저서와 세 사람의 또 다른 주장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면밀히 검토된 연구가 재정립되어 선구자 안익태가 복권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