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논어 제왕학 (4) 리더의 겸손
미천한 가문 출신의 유방(劉邦)은 고제 5년(기원전 202년) 5월 마침내 초나라 항우(項羽)를 깨트리고
천하를 차지했다.
한(漢)나라를 세운 황제 유방은 기쁜 마음으로 낙양의 남궁(南宮)에서 크게 술자리를 베풀고
자신을 따랐던 신하들에게 뜻깊은 질문을 던진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가 전하는 그날의 이야기다.
성과 시스템보다 인사를 중시
"통후(通侯)와 여러 장수는 감히 짐에게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니 모두 그 속내[情]를 말하도록 하라.
성과 시스템보다 인사를 중시
"통후(通侯)와 여러 장수는 감히 짐에게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니 모두 그 속내[情]를 말하도록 하라.
내가 천하를 갖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항씨(項氏·항우)가 천하를 잃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대답했다.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개인 성품이) 오만해 다른 사람을 깔보시는데[女曼而侮人]
항우는 어질어 다른 사람을 공경했습니다[仁而敬人].
그러나 폐하께서는 사람들을 시켜 성을 공격하고 땅을 공략해 점령하게 된 곳을 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천하와 이익을 함께했습니다.
항우는 뛰어난 이를 투기하고 능력이 있는 자를 질시하며[妬賢嫉能] 공로가 있는 자를 해치고
뛰어난 이를 의심하여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다른 사람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땅을 획득해도 그들의 이익을 인정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항우가 천하를 잃게 된 까닭입니다."
유방이 말했다.
유방이 말했다.
"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한다.
무릇 군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에서의 승리를 결정짓는 일에 있어서
나는 자방(子房·장량)만 못하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어루만져주며 식량을 공급하고 군량 공급로를 끊어지지 않게 하는 일에 있어서 나는 소하만 못하다.
또 100만 대군을 이끌고서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적을 패퇴시키는 일에 있어서
나는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人傑)로서 나는 그들을 능히 썼으니
이것이 내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항우는 단지 범증(范增) 한 사람뿐이었는데도 제대로 쓰지를 못했으니
이것이 그가 나에게 붙잡힌 까닭이다."
이에 여러 신하는 기뻐하며 복종했다.
신하에게 겸손하게 대하다
신하들의 대답과 유방의 반박은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신하에게 겸손하게 대하다
신하들의 대답과 유방의 반박은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제아무리 제왕학 이론에 능하다 한들
유방처럼 제국을 창건한 이의 실전형 제왕학에 이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기와 왕릉의 대답은 줄이자면 이렇다.
개인적인 성품이나 자질과 관계없이
공로를 나눠주는 시스템을 잘 만들었기에 천하 제패가 가능했다는 말이다.
이는 현대사회 기업이론에 적용할 경우
오너가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보상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으면 그 회사는 잘 돌아갈 수 있다는 뜻으로
옮길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도 주변에서 종종 보게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한 유방의 답은 단호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유방의 답은 단호하다.
우리가 지금도 쓰는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한다"는 말의 저작권자인 유방은
자신의 승리 요인은 용인(用人)에 있었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적재적소에 사람을 썼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한 무제(武帝)의 사례를 통해 보았던 관(寬)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그 같은 관(寬)을 가능하게 해주는 리더의 마음가짐이다.
유방은 분야별로 자신이 '신하들보다 못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겸(謙), 즉 아랫사람에게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항우처럼 겉모습만 '어질어 다른 사람을 공경하는 것[仁而敬人]'은 겸(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고기나 왕릉은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유방의 자가 진단이다.
공치사 심했던 항우는 실패
이에 반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젊은 시절 항우의 모습이 나온다.
이에 반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젊은 시절 항우의 모습이 나온다.
"항우는 어렸을 때 글을 배웠으나 다 마치지 못한 채로 포기하고는 검술을 배웠는데
이 또한 다 마치지 못했다. (숙부인) 항량이 화를 내니 항우가 말했다.
'글은 이름 석 자 쓰는 것으로 족할 뿐이며 검은 한 사람만을 대적할 뿐이므로 배울 만하지 못하니
만인을 대적하는 일을 배우겠습니다.'
이에 항량이 병법을 가르치니 항우는 크게 기뻐하였으되
대략 그 뜻만을 알고는 또한 끝까지 배우고자 하지 않았다."
항우는 대대로 제후의 집안이었으므로 배경이 좋았다. 그리고 여기서 보듯 재주가 뛰어났다.
항우는 대대로 제후의 집안이었으므로 배경이 좋았다. 그리고 여기서 보듯 재주가 뛰어났다.
재승박덕(才勝薄德)의 전형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대로 힘이 장사였다.
"항우는 키가 8척이 넘고 힘은 커다란 쇠솥을 들어 올릴 정도였으며 재기가 범상치 않아
그 일대의 자제들이 모두 항우를 두려워했다."
진시황이 죽고 2세 황제가 자리를 이었지만 각박한 통치로 인해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진시황이 죽고 2세 황제가 자리를 이었지만 각박한 통치로 인해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항우는 불과 3년 만에 다섯 제후를 거느리는 최대 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사마천의 지적을 보자.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것을 스승 삼지 아니하며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것을 스승 삼지 아니하며
패왕의 공업이라고 하고는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하고 다스리려고 하다가 5년 만에 마침내 나라를 망치고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으면서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책망하지 않았으니 이는 잘못된 것이다."
결국 항우는 한때 자신이 데리고 있던 유방이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데서
결국 항우는 한때 자신이 데리고 있던 유방이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데서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다해야 했다.
그렇게 된 까닭에 대해 사마천은 두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옛것을 스승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록에 기록된 정조의 말, 자기 자랑 많아
이 둘은 다 '논어(論語)' 학이(學而)편 첫머리에 나오는 두 구절에 해당한다.
실록에 기록된 정조의 말, 자기 자랑 많아
이 둘은 다 '논어(論語)' 학이(學而)편 첫머리에 나오는 두 구절에 해당한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속으로조차 서운해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군자가 아니겠는가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를 어긴 것이 스스로 공로를 자랑함이고,
'(옛날의 뛰어난 애씀의 사례들을) 배워서 이를 늘 익힌다면 참으로 기쁘지 않겠는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를 어긴 것이 옛것을 스승 삼지 않음이다.
둘 다 '논어'의 중요한 주제인데 여기서는 일단
둘 다 '논어'의 중요한 주제인데 여기서는 일단
'(옛날의 뛰어난 애씀의 사례들을) 배워서 이를 늘 익힌다면 참으로 기쁘지 않겠는가!'만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이는 한마디로 줄이면 호학(好學)이다.
그런데 호학을 우리는 흔히 독서를 좋아하는 것 정도로 여긴다.
그러다 보니 호학군주라고 하면 조선의 세종과 더불어 정조를 꼽는 경우가 많다.
호학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데서 나오는 코미디다.
같은 학이(學而) 편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일을 할 때는 주도면밀하게 하고[敏於事] 말은 신중하게 하며[愼於言]
"일을 할 때는 주도면밀하게 하고[敏於事] 말은 신중하게 하며[愼於言]
이어서 도리를 갖추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 자신의 잘잘못과 옳고 그름을 바로잡는다면
그런 사람을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好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의 풀이이자 호학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의 풀이이자 호학하는 모습이다.
위에서 유방이 스스로를 묘사한 겸(謙)도 바로 이런 모습이다.
따라서 유방은 별도로 학문을 배우지 않았어도 호학(好學)하는 제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종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호학군주다.
세종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호학군주다.
반면에 정조는 결코 호학하는 군주였다고 할 수 없다.
실록에서 만나게 되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다 자기 자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조 4년(1780년) 3월 8일 홍문관 교리 서정수(徐鼎修 ?~1804년)가 올린 상소의 한 대목이다.
"전하께서는 성지(聖智)를 독운(獨運)하시므로 자신(自信)하는 병통이 없지 않고
"전하께서는 성지(聖智)를 독운(獨運)하시므로 자신(自信)하는 병통이 없지 않고
신료들을 만나볼 때 깔보시는 뜻이 뚜렷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능히 위임하는 방도를 다하고 공경스럽게 대우하는 도리를 다하도록 힘쓰소서."
이런 병통은 정조의 즉위 내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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