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사랑의 질서 (학생회장의 공약 이야기) (김형석 교수, 조선일보)

colorprom 2019. 6. 22. 13:59


    

식당 직접 운영하려다 두손 든 학생회, 할머니께 다시 맡아달라고 사정했지만


조선일보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9.06.22 03:01

[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일기]

김형석의 100세일기 일러스트
일러스트= 이철원
지난 주간에는 다섯 차례 지방 강연을 다녀왔다.
목요일 오전에는 2000명 정도가 모일 것이라는 얘기여서 그 전날 도착해 호텔에 머물기로 했다.
오래전 자주 들르곤 한 호텔이었다. 크지는 않으나 품격을 갖춘 곳이다.
아침에 식당으로 내려갔는데 손님들은 많지 않았다.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혼자 분주히 일하고 있었다.

조찬 메뉴를 보면서 양식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한식 메뉴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좋아하지 않는 해장국을 주문했다. 다른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칸막이 앞쪽으로 자리를 옮겨 가벼운 케이크나 커피로 보충하려고 했으나 서빙하는 사람이 없었다.
3~4명이 앉아 이야기만 나누고 있었다.
주인 여자에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느냐고 물었다.
지금은 손이 딸려서 안 되니까 10시까지는 할 수 없다면서 다른 손님 쪽으로 갔다.

먼저 앉아 있던 손님들 얘기가 생각났다.
정부에서 52시간 근무 규정,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개편하라는 지시, 최저임금제의 법제화 등이 하달되면서 주인 측이 견딜 수 없어 종업원들을 하나 둘 떠나게 했고
지금은 5명이 하던 일을 2명이 하니까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반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대기하던 차를 타고 강연장으로 떠났다.

강연 전에 커피나 한 잔 마시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차 안에서 나 혼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 웃었다.

총학생회장을 선출하게 되면 입후보자들이 공약을 발표한다.

한 후보가 "내가 당선되면 학생식당을 직접 운영해

아르바이트 학생들에게 일자리도 제공하고 남는 이익금은 장학금으로 쓸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그가 당선됐다.

그때까지 식당을 운영해 오던 할머니 격의 여주인을 해직시키고 새 주인을 공모했다.

몇 사람이 와 보고는 그런 조건으로는 운영할 수 없다고 모두 거절했다.

할 수 없이 전 주인에게 다시 맡아주기를 청했다.

그 할머니는 "시중에 식당 둘이 있고 여기서는 우리 학생들이 값싸게 먹을 수 있도록 봉사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나이도 많아 그만두고 떠나야겠다"고 했다.

그동안 수입은 없었으나 젊은 학생들을 위해 봉사한 것이 감사하다면서 떠났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음식값은 올라가고 학생들만 손해를 보게 되었다.

그다음부터는 회장에 출마하는 후보들이 같은 공약은 내걸지 않았다.

학생들은 한 번쯤 그런 실수를 해서 도움이 될 수 있다.

실패의 경험이 후일의 교훈이 되는 것이 교육이다.

우리 국민은 정부의 연속성과 동일성을 기대하고 있다.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그 동일성이 무너지면 더 큰 혼란을 겪는다.

대화나 공감대 없이 법과 힘으로 요구할 때 더욱 그렇다.


물론 목적의 공통성은 있다. 더 많은 국민의 행복이다.

그렇다고 해도 힘과 법이 앞서고 사랑의 질서가 없으면 신뢰 없는 복종을 요구하게 된다.

부모는 형과 동생들이 함께 잘 살기를 바란다.

명령으로 형의 것을 빼앗아 동생에게 주거나 강요하지는 않는다.

사랑의 질서행복의 최고 가치이기 때문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21/201906210264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