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아웃 아르헨티나 르포
이날 오후 1시, 부에노스아이레스 번화가 플로레스타(Floresta) 일대 교차로는 경적 소리로 가득했다. 신호등이 모두 꺼졌기 때문에 다른 차량에 지나가겠다는 신호를 주는 것이다. 지하철과 철도 운행도 전면 중단됐다. 전기로 작동되는 주유기가 멈춰 주유소도 영업을 접고 있었다. 상가 주인들은 전기로 여닫는 셔터를 열지 못해 닫힌 가게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수입 식품점을 운영하는 마리아씨는 "우리 나라가 베네수엘라도 아닌데 나라 전체가 정전되는 일이 어떻게 발생하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국가 전체가 대정전에 빠진 것치고는 사람들이 의외로 허둥대진 않았다. 상점 주인들은 창고에 보관해 둔 소형 발전기를 꺼내 모터를 돌리기 시작했고, 운영이 중단된 국영 에너지사 YPF 주유소 직원들도 퇴근은 하지 않은 채 "오후엔 전기가 들어올 것"이라며 기다렸다. 수시로 발생하는 정전에 이미 익숙해진 탓이었다.
아르헨티나 전역의 전력 공급이 복구되는 데는 약 13시간이 걸렸다. 대정전의 원인은 아직 안갯속이다. 아르헨티나 에너지부는 북동부 연안에서 발생한 폭풍우가 살토 그란데 수력발전소 등을 연결하는 전력망에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감지한 전력공급망 시스템이 과부하를 막기 위해 자동 중단되는 바람에 우루과이와 전국으로 연결되는 전력망이 일시 중단됐다는 것이다. 살토 그란데 발전소는 우리 소양강댐의 20배 정도의 발전 용량을 보유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주요 발전소 중 하나다. 그러나 살토 그란데 발전소 측은 "당시 발전소는 정상 운영 중이었다"고 밝혀 중앙정부의 분석을 전면 부인했다. 중앙정부는 폭풍우가 문제라고 했지만, 대정전 당일 새벽 살토 그란데 지역 강수량은 시간당 1㎜ 이내였다.
대정전 발생 시점이 겨울철인 데다 특히 일요일 오전이라 전력 수요가 많지 않았다는 점도 미스터리라고 현지 언론들은 보도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사이버테러나 사람의 기술적인 실수 등의 인재(人災)라는 의혹도 제기된다.
대정전의 원인이 무엇이든 아르헨티나의 낡은 전력망이 정전 규모를 키웠다는 건 공통된 분석이다. 아르헨티나의 잦은 정전은 악명이 높다. 복지정책을 중시하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그의 아내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키르치네르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때인 2003~2015년 이 부부는 전기·가스·수도 요금 등 공공요금 가격을 동결하고, 재정으로 가격 인상분을 메웠다. 2005년 GDP 대비 0.3%이던 에너지 보조금은 2015년 2.7%로 급증했다. 이 정책으로 아르헨티나의 전력 수요는 급증했다. 이 와중에 전력 설비에 투자할 돈이 남아날 리 없었다. AP통신은 이번 대정전 이후 "수년간 변전소와 전력 공급선 개보수가 부족하게 이뤄지는 등 전반적인 정비 상태가 좋지 않다"고 보도했다.
대정전 이후 시민들은 현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을 비난하고 있다. 2015년 말 취임한 마크리 대통령은 이전 정부의 '에너지 포퓰리즘'을 완전히 손보겠다고 했지만 가시적인 성과가 없기 때문이다. 마크리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베네수엘라처럼 되지 않으려면 전기 요금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고통 분담을 강조했다. 실제 지난 3년간 마크리 정부는 에너지 보조금을 단계적으로 삭감하고 전기 요금을 2배 이상으로 올렸다. 올해 예정된 전기 요금 인상률만 55%에 달한다. 그러나 한번 망가진 전력망은 단기간 내 복구되지 않았고, 이번 대정전처럼 원인 모를 사고가 수시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