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05.29 03:14
여론조사가 위기에 빠진 이유는 '이상한 설문' '왜곡된 표본' 등
親與 응답자 과대 표집… 대통령 지지율에 거품 끼었을 수 있어
'여론조사는 믿을 게 못 된다'는 불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불과 며칠 사이에도 조사 결과가 어지럽게 출렁거린다. 비슷한 시기의 수치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여권(與圈)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나온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국민의 명령'으로 포장해 정책을 밀어붙인다.
그럴수록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여론조사가 신뢰의 위기에 빠진 원인은 '이상한 설문' '왜곡된 표본' '낮은 응답률' 등 복합적이다.
◇넘쳐나는 '부적절한' 설문
5월 5~6일 MBC 조사에서 공수처 설치 '찬성'(70%)이 '반대'(24%)의 세 배에 달했다.
설문을 '전직 대통령·국회의원·판검사·지자체장 등 고위 공직자와 가족 비리를 수사하고 기소하는
공수처 설치'로 제시하고 찬반(贊反)을 물었다.
여야 4당이 공수처법을 합의하면서 판검사와 고위 경찰에 한해 기소할 수 있게 했지만
모든 고위 공직자가 다 포함됐다는 엉뚱한 내용으로 조사했다.
반면 5월 7~8일 SBS 조사는 공수처 설치에 대한 '우려'(48%)가 '기대'(45%)보다 오히려 높았다.
질문은 '고위 공직자 비리 독립 수사가 가능해져 기대되는가,
아니면 야당 탄압 수단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어 우려되는가'였다.
김원봉 서훈(敍勳) 논란에 대한 조사도 종잡을 수 없다.
3월 29~30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는 훈장 수여 찬성(60%)이 반대(34%)를 압도했다.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단체 의열단 단장으로 활동했으나 해방 이후 월북한 김원봉 선생에게
독립유공자 훈장을 수여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서훈 논란 핵심은 보훈처 규정인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인데,
설문에선 그가 북한 정권 핵심이었다는 사실을 쏙 뺐다.
같은 시기 3월 29~31일 알앤써치 조사는 서훈 찬반이 40% 대(對) 39%였다.
질문은 '북한 최고위직을 지낸 의열단장 김원봉 선생의 독립유공자 훈장 수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였다.
찬반 양쪽 논리를 제시하지 않고 한쪽 주장만 담은 설문도 많다.
5월 초 환경운동연합은 '국민 82%가 4대강 보(洑) 해체·개방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환경부는 보 해체·개방 근거로 수질·생태계 개선, 유지·관리 비용 절감, 보 효용성 부족 등을 고려했다'면서
찬반을 물은 결과다.
조사 왜곡 논란이 일자 환경운동연합은 "정부 발표 내용을 있는 그대로 옮긴 것"이라며
"객관성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정부는 어떤 정책이든 그럴듯한 취지를 내세운다.
공정한 설문은 '정부 취지는 이런데, 비판점은 이런 게 있다' 식으로 한다.
공정성과 객관성을 상실한 여론조사는 '선전·선동 도구'일 뿐이다.
◇너무도 낮은 응답률
지난 대선 투표자(최종 투표율 77.2%) 중 문재인 대통령 득표율은 41.1%였다.
전체 유권자 기준으로는 문 대통령 투표자가 31.7%였다.
즉 전국 유권자 1000명 대상 여론조사 표본에는 문 대통령 투표자가 317명이어야 한다.
그런데 2017년 8월 KBS 조사는 562명, 중앙일보 조사도 532명이었다.
최근인 5월 초 한겨레신문 조사도 544명, SBS 조사는 538명이었다.
문 대통령 투표자가 실제보다 계속 200명 이상씩 많았다.
반면 홍준표·안철수 투표자는 실제의 351명에 훨씬 못 미치는 182~221명이었다.
친여 응답자가 과대 표집(標集)되어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에 거품이 끼었을 수 있다.
조사업계는 "과거 정부 때에도 표본에 당시 대통령을 찍었던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정확한 표본 추출이 풀기 어려운 숙제란 얘기다.
표본이 부실한 핵심 원인은 지나치게 낮은 응답률이다.
전문가들은 "ARS 조사의 급증, 스팸 번호로 여론조사 발신 번호 등록 등 조사 환경 변화로 인해
응답률이 하락하고 있다"고 했다.
응답률이 너무 낮으면 여론조사에 적극적인 특정 성향 사람들로 표본이 쏠릴 수 있다.
문 대통령 취임 2주년을 앞둔 5월 3~9일에 실시된 10개 조사의 응답률은 4.3~18.5%로 평균치가 11%였다.
전화를 받은 100명 중 끝까지 대답해준 사람이 11명이란 의미다.
미국에선 응답률 기준이 훨씬 까다롭다.
전화를 했는데 아예 안 받은 접촉 실패도 분모에 포함해서 계산한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10개 조사의 응답률은 1.6~4.4%로 모두 5% 미만이다.
평균치는 3%로 미국 여론조사의 평균 응답률 9%에 한참 못 미쳤다.
청와대가 민심 파악을 위해 실시하는 비공개 여론조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작년 8월 국회운영위에 따르면 청와대는 2017년에 집권 이후 8개월간
17억9000만원을 들여 100~150회 조사를 했다고 한다.
지금도 연간 20억원이 훌쩍 넘는 혈세로 2~3일에 한 번꼴로 조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도 '민심 난독증(難讀症)'에 가까운 소득 주도 성장, 탈원전 등을 보면
'입맛'에 맞는 조사 회사에 '원하는' 결과만 받아보는 것 같다.
여론조사는 민심 파악의 효과적인 수단이고 선거에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하지만 과학을 빙자해 '혹세무민' 도구로 악용되기 쉽다.
조사 회사나 의뢰자의 '선한 의지'에 맡겨두기엔 그냥 넘기기 어려운 사례도 많다.
그래서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기능을 강화해 선거 여론조사뿐 아니라
일반 정치 및 정책 여론조사도 검증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 저널리스트 대럴 허프는 책 '새빨간 거짓말, 통계'에서
"통계에 속지 않기 위해선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지 의심해 보라"고 했다.
원제가 '통계로 거짓말하는 법(How to Lie with Statistics)'인 이 책의 제1장은
'언제나 의심스러운 여론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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