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한민국 출범]

대한민국 지키지 못했다면, 우남도 백범도 역사에서 지워졌다 (김명섭 교수, 조선일보)

colorprom 2019. 6. 5. 19:30



대한민국 지키지 못했다면, 우남도 백범도 역사에서 지워졌다


조선일보
             
입력 2019.06.05 03:01 | 수정 2019.06.05 18:59

[4월 11일, 임시정부 100년 / 이승만·김구의 나라 만들기] [11·끝]
김명섭 연세대 교수 기고

김명섭 연세대 교수
김명섭 연세대 교수


우남 이승만(1875~1965)과 백범 김구(1876~1949)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
대한제국의 독립 촉진과 독립 수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해방 이후 반탁운동으로 대표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운동을 함께했다.

국내외에서 대한독립을 위해 헌신한 많은 인물이 있기에
우남백범만으로 대한독립운동사를 쓰면 과공비례(過恭非禮)가 된다.
그러나 대한제국 시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이어진 대한독립운동을 관통하고 있는 두 인물 중
어느 한 명이라도 빼놓고 대한독립운동사를 쓸 수는 없다.

우남백범이 대한독립을 외치기 시작했을 때 전 세계의 독립국은 약 50개에 불과했지만
오늘날에는 200여개에 달한다.
두 인물은 독립의 세계사를 함께했고, 그것을 선도했다.
우남백범단발령에 맞서지 않고 상투를 자른 것은 대청제국으로부터의 정신적 독립을 상징했다.
두 사람은 시급한 대외적 독립을 위해 군주 주권을 제한적으로 인정했지만,
보황주의적 반동의 길로 빠지지도 않았다.

1500만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우남백범초대 대통령경무국장을 맡았고,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장악되는 것을 함께 막았다.

세계 곳곳의 공산주의 노선과 대한민국의 갈림길은 이때 이미 시작되었다.

김구이승만무장투쟁 노선외교 독립 노선으로 단순하게 대립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이승만은 물론 김구박용만식의 조급한 무장투쟁에는 반대했다.
김구가 주도한 의열 투쟁이승만독립 외교와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었다.
대일 선전포고를 하기 전까지 우남백범은 모두 독립 역량을 키우고 보전하는 데 주력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일본 황실 근위 보병의 장교를 거쳐 일본군 사단장으로 참전했을 때
백범우남이 이끈 대한민국임시정부마저 없었다면
연합국들은 한국인들을 적대국민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연합국들이 카이로 선언을 통해 코리아의 독립을 보장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1948년 10월 16일 일제가 파괴했던 연희대(현 연세대) 설립자 언더우드 동상 재건 제막식에서 김구가 축사를 하고 있다.
1948년 10월 16일 일제가 파괴했던 연희대(현 연세대) 설립자 언더우드 동상 재건 제막식에서 김구가 축사를 하고 있다. 뒷자리에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앉아 있다.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을 다녀온 김구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과 함께 자리한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의미가 깊다. /연세대
5000만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약 720만 일본군에 맞섰던 약 300~500명의 광복군은 미약했지만 그 정신은 투철했다.
이승만김구는 수천만 병력을 동원했던 연합국들과의 동맹을 추구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장개석은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도왔다.
김구이승만의 외교 활동을 통해 미국의 공식적 지원을 받아내고자 했다.
1941년 김구 주석으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장 임명장을 받은 이승만
'Japan Inside Out(일본내막기)'을 미국에서 출판하여 미·일 전쟁을 사전에 경고한 것은
일종의 공공 외교였다.

그러나 루스벨트장개석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지는 않았다.
민주적 선거를 통해 수립된 정부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던 연합국들일본의 항복을 받고 신탁 통치를 실시하고자 했다.

신탁 통치 반대운동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주석 김구)의 지도를 받는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중심으로 제2의 3·1운동처럼 일어났다.

1946년 2월 김구가 이끌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이승만이 이끌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합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되었다.

이승만선거를 통해 대한독립을 촉성하고자 했다.
소련군이 진주해 있던 38선 이북에서는 사실상의 정부가 수립되어
토지 개혁, 화폐 개혁, 조선인민군 창설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 독립 정부를 세우고자 하는 욕구는 아래로부터 분출하고 있었다.
1948년 4월 9일까지 90% 이상이 유권자 등록에 참여했고,
5월 10일 등록 유권자의 90% 이상이 자유선거에 참여했다.

국회가 구성되어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독립이 이루어졌다.

선거 절차가 없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던 국제사회도
마침내 대한민국의 독립을 승인했다.

김구"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조선인민위원회의 의석을 남겨 놓고 선거를 하는 조건이라면
이승만 박사의 단독 정부론과 내 의견은 같은 것"이라는 담화문을 1947년 12월 1일에 발표했었다.
그러나 그는 5·10 총선에 참여하는 대신 남북 협상의 길에 올랐다.

김구는 아들 김신에게 병자호란 당시의 사람들이
"오늘날 최명길이 없으면 안 되고 100년이 흐른 뒤에 삼학사가 없으면 안 된다"고 했던 말을 들려주었다.

한때 백범을 추종했지만 백범북행에 반대했던 안두희의 흉거는
우남백범이 살아서 화해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
우남이 배후라는 억측은 두 거인의 사후 화해마저 어렵게 만들었다.

이미 중국공산화되고 있던 상황에서 백범북행공산군의 무력 남진을 막는 헌신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을 비롯한 평양 정권의 최종 선택은 1950년 6·25전쟁이었다.

백범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옥새를 김일성에게 갖다 바쳤다는 식의 선전·선동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우남이 대통령이 되어 지켜낸 대한민국에서 백범을 기념하지 않았다면
우남은 물론 백범의 역사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 속에서 지워지고 왜곡되었을 것이다.

죽는 날까지 우상 숭배를 금하는 기독교 교인이기도 했던 두 사람이 우상화를 원하지도 않겠지만
후배들이 상대방에 대한 증오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화해를 위한 역사 만들기가 유행이지만
혹독한 세계사적 조건 속에서 대한독립이라는 소원을 함께 이루었던 두 거인의 화해는
역사적 진실을 정확하고 균형 있게 기억하기만 하면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미완의 대한독립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05/2019060500024.html



한철희(doky****)모바일에서 작성2019.06.0508:17:25신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일등공신은 김구임정입니다.
일본에 승전 후 우리의 운명은 카이로회담에서 장개석 제외하고
전부 한국 독립에 부정적 입장이었읍니다.
이들의 회담 결과 선언문에 한국의 독립을 천명한것 입니다.
임시정부 주도의 윤봉길의사 의거를 계기로 장개석은 우리 임정과 한국민을 다시 보고
이같은 주장을 관철하여 선언에 명시합니다.
이승만제헌의회 연설에서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13도 대표들이 모여 국민대회를 열고 임시정부를 건설했는데,
국회는 이 국민대회의 계승이며 국회가 건설하는 정부는 서울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것"
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건설하는 정부수립이라고 하지 건국이라는 표현하면 이승만 제헌의회 연설에 배치됩니다.
이로써 헌법에 명시된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는
국제사회의 대한민국독립을 보장한 카이로 선언부터 시작된 대한민국입니다.
세상에 김구를 암살 후 안두희가 승승장구 한것에 이승만 책임을 물타기하는 행태는
웃기는 않고 슬프기까지 합니다.
김영기(ykkim****)2019.06.0507:18:27신고
당시 모스코바 삼상회의등 친탁 반탁의 활동으로볼때
백범우남의 세계적인 안목과 활동에 비교대상이 되지못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05/201906050002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