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한민국 출범]

이승만만 끌어내리면 정의로운 대한민국 되나

colorprom 2019. 5. 3. 15:08


                       

[만물상] 이승만 사진, 김재규 사진


조선일보
                             
             
입력 2019.05.03 03:16

언젠가부터 일부 좌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10월 26일은 '탕탕절'로 통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당한 10·26을 희화화하려는 목적인데,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도 공교롭게 같은 날이라 이 둘을 엮은 것이다.

'탕탕'은 김재규와 안중근의 총격 소리를 뜻한다.


이 네티즌들은 "'민족의 쾌거'를 일으킨 김재규'열사' 반열에 올라야 한다"고 말한다.


▶인터넷과 달리 에서 김재규금기의 인물로 남아 있었다.

'군 통수권자 시해'는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김재규는 육사 2기 출신으로 18대 3군단장과 15대 6사단장 등을 지냈지만,

은 10·26 이후 김재규 사진을 전 부대에서 떼어냈다.

그가 거쳤던 부대의 기록물에서도 이름을 삭제했다.

10·26 직후 일부 종교 단체에서 김재규 구명운동을 벌이자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아비를 죽인 자식과 다를 바 없는 패륜아"라고 하기도 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40년간 창고에 박혀 있던 김재규 사진이 다시 군에 걸린다고 한다.

국방부'역사적 사실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 한해 역대 지휘관의 사진 전부를 게시할 수 있도록

부대 관리 훈령을 개정하면서다.


이에 따라 김재규의 사진과 약력이 육군 홈페이지에 게재되고,

그가 거쳤던 부대의 역대 지휘관 명단에도 올라갈 예정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김재규 복권' 움직임은 꾸준히 있었다.

재작년 기무사 국감 때 한 여당 의원은

"전두환·노태우 사진도 있는데 사령관 지낸 김재규 사진은 왜 없냐"고 문제 제기를 했다.

기무사는 바로 김재규 사진을 걸려고 했으나 예비역 장성들이 반발하자 철회했다.

그러다 기무사 후신으로 출범한 군사안보지원사령부다시 김재규 사진 복권을 추진했으나 논란이 일자

아예 전두환·노태우를 포함한 모든 역대 사령관 사진을 떼버리는 방식으로 응수했다.


▶'김재규 띄우기'는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폄하하려는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정치적 목적은 일절 없고,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알리려는"이라고 한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중시한다는 사람들이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한다며 서울 도심에 내건 주요 독립운동가 초상화에서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승만 사진만 쏙 뺐다.

아무 설명도 없다.


이 정권 사람들의 이중 잣대는 사진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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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02/2019050203565.html



유홍근(yu****)2019.05.0312:03:30신고
현정권이 건국의 영웅 이고 국부인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고 역적 김 재규사진을 역사의산물로건다 그리고 전두환대통령의 사진도 치운다 그렇게하면 않되
                                                                                                                                       역사의자료는 오로지 자료일 뿐인데 순서대로 역사의 인물로 표식하고
그개인에대한 과와 오는 그날 ㅁ대로 평가할일이지 그런식으로. 표식을거절하면
다음정권에 어떻게 역사를 평가할건지 역사를 이용해서 좌우를 가리면 않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02/2019050203565.htm



[김기철의 아웃룩] 이승만만 끌어내리면 정의로운 대한민국 되나


조선일보
                             

                

 

입력 2019.05.01 03:14

정부 '역사코드'이승만1948년 지우려 1919년 내세워
'건국 100' 맞장구친 좌파 학계, 자아비판하며 임정 정통성 부인
정부와 방송 나선 '官製 역사정치' 언제까지 봐야 하나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작가 조지 오웰은 썼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70년 전 발표한 오웰의 소설 '1984'는 '역사 전쟁'이 한창인 지금의 대한민국을 내다본 듯하다.

이 정부는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욕망이 유달리 강하다. 대통령은 틈만 나면 친일(親日) 잔재를 청산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말한다. 해방 이후 현대사를 친일파와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이끌어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2차 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해방된 국가들 가운데 우리나라처럼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에 함께 성공한 나라는 없다"(2018년 8·15 기념사)고 추켜세운 건 빈말 같다.

1948년 8월 15일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선택한 대한민국 '성공의 역사' 출발점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 사건을 깔아뭉개는 데 팔을 걷어붙였다.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인 2016년 '1948년 건국'을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얼빠진 주장'이라고 했다. 2017년 대통령 취임 후 첫 8·15 경축사에서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라고 선언했다. '1948년 건국'이 유일한 정답은 아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없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정부는 '1948년'을 배척하기 위해 '1919년'만 내세운다.

◇'이승만 사냥'에 동원된 김구, 토사구팽

'1919년 건국' 동맹군엔 좌파 민중사학자들이 포함돼 있다.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식이 끝나자마자 이들은 공개적으로 '임정법통론'에 등을 돌렸다. 역사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한국역사연구회 등 민중사학 진영 3개 단체는 지난 4월 12일 학술대회를 열고 '자아비판'에 나섰다. '보수 진영의 1948년 건국설이 제기됐을 때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침묵 속에 방관하든가 1919년 건국설에 동조했다' '임정법통론의 한계를 알면서도 임정 법통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 내몰려 스스로 임시정부주의자가 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임정의 정통성을 믿지 않으면서 '1948년 건국'에 반대하기 위해 '1919년 건국'에 편승했다는 고백이다. 이승만을 끌어내리는 데 이용한 김구를 '토사구팽(兎死狗烹)'한 셈이다.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 내걸린 독립운동가 그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 내걸린 독립운동가 그림. 대통령직속위원회는 4월 초 임정 100주년을 기리기 위해 광화문 정부청사와 이곳에 대표적 독립운동가 그림을 걸면서 임정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뺐다. /남강호 기자
좌파 진영의 임정에 대한 적대감은 뿌리 깊다. 남로당 당수 박헌영은 임정을 '인민과 단절된 망명가 클럽'이라고 비판했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끈 여운형도 임시정부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도 상해에 있어 보았지만 임시정부에 도대체 인물이 있다고 할 수 있소? 밤낮 앉아 파벌 싸움이나 하는 무능무위한 사람들뿐이오. 임시정부 요인들 중에서 몇 사람은 새 정당이 수립하는 정부에 개별적으로 추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할 수는 없소."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을 맡은 대통령 직속 기구에 몸담은 김정인 교수의 논문('3·1운동과 임시정부 법통성 인식의 정치성과 학문성')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런 흐름을 계승한 1980년대 좌파 민중사학 진영은 임정의 정통성은 물론 역할 자체를 낮게 봤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임정을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한 영도기관으로 볼 수 없고, '일개 독립운동단체로 전락'했다고 썼다. 그런데도 2016년 8월 "'임정 법통' 계승이라는 대한민국의 정체성마저 부정하고 있다"며 박근혜 정부의 역사 인식을 비판하는 성명에 강만길·안병욱 교수 등 원로 학자와 역사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한국역사연구회 등 3개 단체가 서명했다.

이승만이 문재인 정부 역사코드

문재인 정부와 민중사학 진영은 이승만이 주도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적대감을 공유한다. 1948년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는 이승만의 권력욕과 분단 획책의 결과라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역사 교사'로 알려진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8·15 직후 분단을 극복하려던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은 반공과 분단을 내세운 미국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고 썼다. 1980년대 이후 민중사학 진영은 이런 주장을 논문과 책으로 확대재생산했다. 잔혹한 숙청과 탄압으로 인민을 노예로 만든 김일성의 북한을 봤으면서도 체제는 상관없이 '통일'했어야 한다는 식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 정부 수립 70주년을 겸한 8·15 경축사에서 이승만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이낙연 총리가 읽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에도 임정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이름은 없었다. 반(反)이승만이야말로 이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사코드'다.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한완상)가 임시정부 100년을 기린다며 서울 광화문 정부 청사에 내건 독립운동가 10명의 초상화에 이승만이 없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한 여운형까지 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위원회는 "예술가들에게 맡기면서 특정 인물을 넣거나 빼라고 한 적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대통령 뜻을 기막히게 헤아리는 위원회다.

KBS도 뒤지지 않는다. "이승만은 괴뢰"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는 막말을 주말 저녁 시간에 내보내고도 변변한 해명조차 없다. 대통령과 정부, 이른바 '공영방송'까지 손잡고 벌이는 '관제(官製) 역사 정치'를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까. 이승만 혼자 대한민국을 만든 건 아니다. 허물도 있다. 하지만 그를 빼놓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설명할 수 없다. 이승만만 욕하고 내동댕이치면 잘못된 역사가 바로잡히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이 될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30/2019043003601.html



동족에 비난받은 이승만, 총탄 맞은 김구20년 독립운동에 찾아온 위기


조선일보
                             
             
입력 2019.05.01 03:01

[411, 임시정부 100/ 이승만·김구의 나라 만들기]

[7] 1938~1939, 임시정부 출범 20

일제의 침략 노골화이승만, 하와이에 광화문 본뜬 교회 세워
임정 수립 후 20년 지나도 독립 못하자 교민들, 이승만 비난

하와이에도 '광화문'이 있다. 호놀룰루 릴리하 스트리트 1832번지. 이승만이 현지 미국인과 교민들 성금을 모아 설립한 한인기독교회 건물이다. 예배당 정면을 광화문 모양으로 세웠다. 1937년 10월 3일 착공해 이듬해 4월 24일 완공했다. 일제가 훼손한 광화문은 한국의 주권을 상징했다. 현재 건물은 2006년 개축했다. 마당에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동상이 서 있다. 교민들이 광복 40주년인 1985년 세웠다.

1938년 5월 7일 창사 난무팅에서 총상을 입은 김구의 모습.
193857일 창사 난무팅에서 총상을 입은 김구의 모습.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1902~1949)의 유품에서 나온 사진이다.
부산박물관이 69일까지 '파리의 꼬레앙, 유럽을 깨우다' 전에서 전시한다. /부산박물관
이승만이 하와이에 광화문을 세운 때는 일제가 중국 침략을 노골화하던 시기였다. 일본 관동군은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근교 노구교(루커우차오)에서 병사 한 명의 실종을 빌미로 전면 침략 전쟁에 돌입했다. 베이징·상하이 등 주요 도시를 장악하고 12월 13일 국민당 정부 수도 난징을 점령해 시민 20만~30만 명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전쟁 상황을 관망했다. 예전 같으면 바로 워싱턴으로 건너가 외교 활동을 펼쳤을 터이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 워싱턴·상하이·제네바 등을 오가며 20년간 독립운동을 펼쳤지만 독립을 이루지 못하자 이승만을 비난하는 교민이 많아졌다. 이승만은 당시 상황을 "내가 혼자 인도자 책임을 가지고 동포의 재정을 쓰면서도 독립은 회복하지 못하고 보니 자연 내게 대한 악감(惡感)이 심해져서…"라고 '태평양주보'(1939년 4월)에 썼다.

주저하는 이승만에게 지지 단체인 대한인동지회가 결심을 촉구했다. 이승만이 1921년 7월 설립한 동지회는 출범 때부터 '임시정부 옹호'를 천명했다. 동지회 회장 이원순은 이승만에게 워싱턴으로 가서 구미위원부 활동을 재개하고 독립운동에 관한 책을 집필해야 한다('세기를 넘어서')고 설득했다. 이승만은 "나도 원하는 바였다"고 승낙했다. 이승만은 1939년 3월 30일 호놀룰루를 떠났다. 5월 7일 워싱턴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구미위원부 활동을 재개했다.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이승만이 1938년 광화문 모양으로 세웠다. /이한수 기자
이승만은 3개월 후 다시 하와이에 갔다가 11월 10일 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워싱턴으로 완전히 이주했다. 당시로선 '기약 없는 길'이었다. 한인기독교회 목사 김형식은 "선생의 이번 길은 잠시가 아니고 기약 없는 길이다. 중국의 승리냐 일본의 패망이냐 하는…(이때) 우리 민족의 목적을 관철하고 개선가를 부르는 영수(領袖·지도자)를 불원(不遠)한 장래에 환영하리라는 희망을 가진다"('태평양주보' 1939년 11월 18일)고 했다. 예순네 살 노(老)독립운동가는 해방 때까지 하와이로 돌아가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대륙을 침략하는 일본군을 피해 여러 차례 근거지를 옮겼다. 항저우(1935년 11월)→진장(1937년 11월)→창사(1938년 7월)→광저우(1938년 10월)→류저우(1939년 3월)→치장(1940년 9월)을 거쳐 국민당 정부 전시 수도인 충칭으로 이동했다.

김구는 중일전쟁이 터지자 분열된 우파 진영을 통합하는 '광복진선(光復陳線)'을 1937년 8월 17일 결성했다. 김구가 이사장으로 있는 한국국민당, 조소앙이 이끄는 한국독립당, 이청천의 조선혁명당 등 3당과 미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대한인동지회 등이 연합했다. 광복진선은 임정 옹호를 선언했다. "임시정부는 3천만 민족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영도기관으로서 3·1운동의 정맥을 이은 기구이다. 임시정부는 전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이다."('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선언')

통합 과정에서 김구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3당 통합을 위해 1938년 5월 7일 조선혁명당 본부인 창사 난무팅(楠木廳·남목청)에서 회합 중이었다. 한 청년이 난입해 권총을 쏘았다. 조선혁명당 현익철이 숨졌고, 김구는 왼쪽 가슴에 총상을 입었다. 예순두 해 인생에서 맞은 최대 위기였다. 다행히 탄환은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의사는 갈비뼈 아래 박힌 탄환을 빼내지 않아도 생명에 지장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김구는 이후 탄환을 몸속에 갖고 살았다. 김구는 '재미동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래도 동족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다. "단군 한배의 피를 가진 놈이면 왜적의 개질을 하는 놈이라도 나를 해하지 못하리라고 믿었습니다. 저는 과거의 신념을 뉘우치지 아니하며 앞으로 그것을 고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1938년 6월 20일 '여러분 선생께')

김구는 1939년 8월 민족혁명당 김원봉 등 좌파 4개 단체를 포함해 '7당 통일회의'를 열어 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려고 했다. 임시정부에 재정을 지원하는 중국 국민정부가 한국 독립운동 단체의 연합을 종용했다. '국공합작' 중인 중국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된 힘을 대일 항전에 이용하려고 했다. 김구는 조완구·엄항섭 등 측근의 만류와 미주 단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통합 작업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김구는 이를 공산주의자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비판했다. 김구는 국민당 중앙당부에 보낸 편지(1940년 1월 26일)에서 "지난 20년간 한국 독립 단체 간 분쟁의 씨앗은 공산당이 뿌린 것"이며 "그들은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민족운동의 역량을 분산시키고 소멸시키고자 획책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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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30/201904300363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