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한민국 출범]

[9] 1942년, 일본의 진주만 습격 이후 (이한수 기자, 조선일보)

colorprom 2019. 5. 16. 15:48


이승만, 방송서 동포 향해 웅변"히로히토의 멸망 머지않았다"


조선일보
                             
             
입력 2019.05.15 03:01

[4월 11일, 임시정부 100년 / 이승만·김구의 나라 만들기]

[9] 1942, 일본의 진주만 습격 이후

'미국의 소리(VOA·Voice of America)' 방송국은 워싱턴 한복판에 있다. 미 국회의사당에서 워싱턴 기념탑을 바라보며 왼쪽 길로 500m쯤이다. 일본의 진주만 습격(1941년 12월 7일) 직후인 1942년 1월 2일 미 정부 예산으로 개국했다. 예순일곱 살 이승만은 이 신생 방송국에서 6월 13일부터 7월에 걸쳐 우리말과 영어로 국내외 동포들에게 육성 방송을 했다. 미 해군이 일본군 주력을 괴멸시킨 미드웨이 해전(6월 5~7일) 직후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발족한 '한인 국방경위대'가 1942년 4월 26일 로스앤젤레스 시가행진을 벌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발족한 '한인 국방경위대'가 1942년 4월 26일 로스앤젤레스 시가행진을 벌였다. 임시정부는 재미 한인경위대를 광복군 산하로 인준했다. /국사편찬위원회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왜적이 저의 멸망을 재촉하느라고 미국의 준비 없는 것을 이용해서 하와이와 필리핀을 일시에 침략하야 여러 천명의 인명을 살해한 것을 미국 정부와 백성이 잊지 아니하고 보복할 결심입니다… 일황 히로히토의 멸망이 멀지 아니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도 설명했다. "우리 임시정부는 중국 중경에 있어 애국열사 김구,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제씨가 합심 행정하여 가는 중이며, 우리 광복군은 이청천(지청천), 김약산(김원봉), 유동열, 조성환 여러 장군의 지휘하에 총사령부를 세우고 각방으로 왜적을 항거하는 중이니…." 그러고는 선동적인 어투로 웅변했다.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는 일일이 파상(破傷)하시오! 적병의 지날 길은 처처에 끊어버리시오! 이순신 임경업 김덕령 등 우리 역사의 열렬한 명장 의사들의 공훈으로 강포무도한 왜적을 타파하야 적의 섬 속에 몰아넣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나니… 우리 금수강산에 발붙이고 있는 왜적은 일제히 함몰하고야 말 것입니다."

한국광복군 대원들이 훈련 중 손을 들어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한국광복군 대원들이 훈련 중 손을 들어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광복군을 휘하에 두려 했다. 김구는 일단 받아들인 후 협상 끝에 지휘권을 회복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이승만은 다른 날 방송에서도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리며 임정을 이끌고 있는 이는 김구라고 설명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들을 위하여 일하는 여러분의 정부를 가졌습니다. 여러분의 정부에는 강력한 인사들이 있습니다. 비열한 왜적과의 투쟁을 쉬지 않았던 영웅적이고 애국적인 김구씨가 지금 중국 중경에 있는 그 정부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 밖에 이시영, 조소앙, 조완구, 차리석 등 저명한 애국열사들이 김구씨를 돕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단파방송 수신기를 통해 방송을 들은 이들은 이승만이 전하는 소식을 주위에 전파했다. 일제 총독부는 1942년 12월 7일 단파방송 비밀 청취와 관련해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300여명을 체포·조사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6일 여운형·허헌 등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조직하면서 아직 귀국하지도 않은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한 까닭은 육성 방송 등을 통해 이승만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광복군총사령부 건물은 충칭 시내 중심 '인민해방기념비'에서 남동쪽 300m쯤에 있다.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지난 3월 29일 복원 기념식이 열렸다. 내부는 아직 공사 중이라 정식 개관은 추후 결정된다. 지난 3월 1일 찾아갔을 때 '충칭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구지(舊址)'라고 적은 대형 가림막을 치고 한창 공사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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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은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미국의 소리' 방송국. 오른쪽은 중국 충칭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지난 3월 1일 한창 복원 공사 중이었다. /이한수 기자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중국군 휘하에 두려고 했다. 1941년 11월 15일 중국 군사위원회는 9개 항목의 '한국광복군 행동 준승'을 이청천 총사령에게 통보했다. 준승은 기준이라는 뜻이다. 중국 정부는 제1항부터 '예속'을 강조했다. '한국광복군은 우리나라(중국) 항일작전 기간에는 본회(중국 군사위원회)에 직접 예속되며, 참모총장이 운용을 장악한다.'

임정 내에서 모욕적이라는 비판이 일었지만, 김구는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중국의 재정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백범일지'에 적었다. '임시정부와 광복군 간부들은 준승 접수 여부에 의논이 비등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교정하려면 시일만 연기될 뿐이므로 우선 접수하고 불합리한 조건을 시정하기로 하였다.'

1942년 1월 1일 예순여섯 살을 맞은 김구는 '해내외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하고 "한국독립당과 한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은 우리 민족의 당·정·군 최고 기구"라고 선언했다. 2월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재미 9개 단체가 연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주도로 78명이 참여한 '한인 국방경위대'가 출범했다. 임시정부는 한인경위대를 광복군 산하로 인준했다. 이승만은 미국 OSS(전략정보국·CIA 전신) 요청을 받고 한인 청년 50명을 국내와 일본 등지로 파견할 특수공작원으로 추천했다.

김구는 임시정부를 미국으로 옮기는 문제를 검토했다. 1942년 11월 3일 김구는 이승만에게 '우리는 임시정부 이전에 대해 조사하고 있습니다'라고 전보를 쳤다. 김구는 중국 국민당 조직부장 주자화(주가화)를 찾아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 자금을 요청하려 한다. 미국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으니 모금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에 대한 압박이었다. 임시정부는 1945년 4월 4일 새 군사협정을 통해 3년 6개월 만에 광복군의 지휘권을 회복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15/2019051500019.html